그리스의 소수 민족 로마(집시)족 이야기

그리스의 소수 민족 로마(집시)족 이야기
집시(Gypsy) ◙ Photo&Img©ucdigiN
집시의 사회는 지나간 과거를 기록해 두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 집시의 역사는 언어나 종교, 영토처럼 한 국가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요소들로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견고한 문화를 보여주는 독특한 민족의 역사이다.

집시 민족의 언어에는 ‘소유’ 와 ‘의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유와 의무를 몰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으며 또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의무’와 ‘소유’는 삶에서 잃어버린 두 단어이지만, 다른 두 단어 ‘사랑’과 ‘자유’는 그들의 찾고자 하는 전부였다.”_ 앙리에트 아세오(Henriette Asseo)


[미션저널] 그리스의 소수 민족 로마(집시)족 이야기 » 김수길 선교사 » 그리스 이야기(35회)  » 내가 이곳에 살고 있는 이유인, 한 종족의 이야기를 두 세 번에 걸쳐 이야기하므로 그리스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처음에는 이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에게 가르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이들로부터 배웠다. 앙리에트 아세오(Henriette Asseo)는 그녀의 저서 ’집시 유럽의 운명‘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각 시대는, 우리 시대도 예의는 아니지만 집시의 존재에 의해 축복 받은 혹은, 저주 받은 마지막 시대라고 여겨져 왔다.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혹은 낭만적이든 냉소적이든 간에 모든 전문가들은 요지부동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즉 세상을 떠돌아다니던 자들, 이제는 길들여졌고, 유랑하던 그들의 삶의 방식도 유행을 벗어났으며 마침내 ‘집시의 시대가 과거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집시들은 환경변화에 적응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 방식을 놀랄 만큼 성공적으로 보존해 가고 있다.”고…

내가 처음으로 집시라는 단어를 인식하게 하였던 것은 지금은 희미한 기억 속 에 자리한‘길‘이라는 흑백 영화에서 안소니 퀸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대비된 상대역의 백치 집시 여인인 ‘젤소미나‘를 통했을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 누구나 한 번 쯤 읽었을 메르메(Prosper Mérimée)의 소설 ‘카르멘’에서 돈 호세가 운명적으로 사랑했던 집시 여인 카르멘을 통해서 집시들의 삶이 못 말리는 뜨거운 피를 가진 정열적인 사람들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종지기 콰지모도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사랑했던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 등에서 나는 집시라는 언어를 만났다. 그러기에 나는 “포장마차를 타고 일생을 전전하고 사는 집시의 생활이 나에게는 가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쓴 오래 전 요절한 전혜린의 ‘먼 곳의 그리움’이란 수필이 남의 글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의 소수 민족 로마(집시)족 이야기

노트르담의 꼽추 영화 ◙ Photo&Img©ucdigiN

그러나 오랜 시간 그리스에서 느꼈던 집시의 개념 이해는 1930년 일제 강점기 조영출 시인의‘북행열차’에 기록한 “나라도 없는 집시의 자손들이 깎고 저미는 사과의 빨간 피부”이었다. 본디 이 집시란 이름도 그들이 원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개념 만큼이나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왜곡되어졌고 그리고 이름들 역시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타인에 의해서 아무렇게 불렸다.

이들 무리를 처음으로 본 영어권 사람들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외모 역시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어떤 집시들은 스스로를 이집트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시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도망 온 유목민과 로마제국의 후손이 섞여서 생긴 혼혈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주장으로는 고대 이집트에서 도망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그들의 발음대로 하자면, “에집션(?)” (이집트인) 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두음소실(頭音消失)에 의한 변형 gicyan의 역성(逆成)으로서 gipcy가 쓰였으며 이것이 차츰 “집시”로 불리기 시작한 것 같다.

다만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집시(Gypsy)는 일반적으로 헬라어의 “Ejiftos”, “Giftoi”, 스페인어 “Gitanos” 등등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나라 외에도 러시아에서는 찌가니, 이교도를 뜻하는 중세 헬라어에 의해 독일어로 치고이네르(Tsigoiner), 헝가리에서는 치가니 폴란드에서는 Ciganie,이탈리아에서는 Zingari 등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가 문학적 장르를 통해서 알고 있는 집시를 뜻하는 보헤미안은 프랑스에서 집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14세기경 보헤미아 왕이 유랑민족인 집시에게 거주와 통행을 허락하자 이 지방에 집시가 많이 살게 되므로, 15세기경 프랑스인은 집시를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의 관습에 구애 되지 않는 방랑자,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예술가, 문학가, 배우,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 말은 집시처럼 방랑하는 방랑자(vagabond)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프랑스어로 집시를 치가느(tsiganes)라고 부르고 있다. 그 외 중동지역에서는 “고르바티”(Ghorbati)와 “나와리”(Nawari)의 두 개의 집단으로 구분되어 불리고 있다. 고르바티는 아랍어인 구르베트(gurbet)란 단어에서 온 것으로 이방인(Stranger)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는 집시들을 나우아르(Nauar)라 불리고 있다.

집시를 가르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치고이, 치간이’ 이다. 그래서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 이나 “라벨의 치간느”는 집시풍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에서도 이 말은 역시 닮은꼴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일반적으로 집시들을 가리켜 ‘징가니’라고 부른다.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는 집시란 의미의 단어들이 비슷하다. 집시라는 표현 대신 ‘로마’라는 말을 써야 하지만 읽는 분들의 이해를 위해서 집시라는 표현을 대해서는 양해와 사과를 구한다.

바람의 후예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집시들의 태동과 이동경로에 대해서 정확한 문서나 사료가 없기에 그들의 민족 기원 이론 역시 다양한 이름 만큼이나 참으로 많은 가설이 있다. 그 기원에 관하여 두 가지의 이론이 있다. 이집트 기원(基源)설과 인도 기원설이다. 먼저 이집트 기원설은 18세기 말까지는 두 이론 중에서 이집트 기원설이 우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집시의 짙은 피부색에서 찾았고, 그 다음으로는 이집트인들이 중세에 주술사(Shamans)로 이름을 알린 것처럼, 당시에 많은 집시들이 주술에 관련된 업종에서 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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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Gypsy)아이들 ◙ Photo&Img©ucdigiN

집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집트 기원설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많은 반박을 하였다. 1788년 독일의 언어학자 그렐만(H. M Grellmann) 은 집시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수집하여 그 수집된 언어의 삼분의 일이 힌두어(語)에서 나온 것임을 발견했다. 나아가 인도 북부 펀잡 지역의 수라트 방언(Surat tongues)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것을 찾아내었다. 오늘날 인도의 자트(Jateu) 족 언어가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찾아낸 후 산크리스트(Sanskrit)어 와 자트어(語)가 집시어의 모체(母體)임을 발표한다.

인도 기원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주로 유럽 학자들이 주장하는 설(設)이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침공할 때 데려온 종족(Ethnic)중 하나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학설은 중국 한나라 황제인 무제에 의해서 쫓겨난 흉노족들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원후 5 세기경에는 인도의 굽타 왕조 또는 바르다니 왕조를 침공하였다. 이들의 공격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인도는 결국 굽타왕조(바르다니 왕조)가 멸망하고 성과 도시는 파괴되어 도시는 질병과 기아에 노출되었다. 이때 인도의 네 계급 중 즉 브라만(brahman)사제 계통, 크샤트리아(ksatriya)군사와 정치 귀족 신분 계통, 바이샤(vaisya)일반기층민계통, 수드라(sudra)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 able)중 하위 계급인 바이샤와 수드라 계급의 사람들이 고대 인도를 떠나 유럽으로 흘러갔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1차 집시 태동 이동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차 집시 민족 이동 설은 터키 남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1038년에 회교도들인 터키인에 의해서 셀주크 투르크 왕조가 등장한다. 그리고 1148년 오늘 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셀주크 투르크의 지원을 받은 가즈니(Ghazni)왕조가 역사에 나타난다. 신생 가즈니왕조는 영토 확장과 이슬람을 전파한다는 목적으로 인도의 북서부, 오늘날 인도 펀잡(Punjab)지역의 구르자라(카나우즈) 왕국을 침공하게 된다. 구르자라 왕국은 급격하게 변화는 주변 정세에 대비하여 오래 전부터 군대를 육성해 왔다. 이들 군대에는 인도 계통의 사람들 뿐 아니라 이슬람의 박해를 피해 멀리는 동 아프리카에서부터 온 사람들과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정치 종교적 문제로 피난해 온 사람들로 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1192년까지의 끊임없는 이슬람의 공격으로 구르자라 왕국이 파괴되어 그 난민들이 여러 곳으로 떠돌다가, 어떤 그룹은 인도의 남부로 떠나가기도 하고, 다른 무리는 중국 서부 지방으로, 또 어떤 그룹들은 유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집시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집시들은 먼저 카슈미르에 도착해서, 페르시아로 향하는 실크로드를 타고, 페르시아 제국에 머무르다, 흑해 연안의 트레디 지역과 비잔틴 제국에까지 유입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침략군에 대항하기 위해 비잔틴제국 군대에 집시들을 재 편입시켰지만, 피부 색깔로 인해 이슬람교도로 오해가 생긴 뒤로는 다시금 난민으로 격리됐다고 한다.

이후의 집시들의 삶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선명한 편이고, 자료나 문건 역시 남아 있다. 비잔틴(The Byzantine Empire area)으로 들어간 집시들을 1300년 초에 남동부 유럽에서 그들을 보았다는 보고가 있었고, 1400년대에는 중부와 동부유럽에서 그리고 1400년에서 1500년 사이에서는 서부와 북부유럽에서 그들에 관한 기록(History documents)들이 있다.

중동부 유럽의 빵 바구니인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도착한 이후, 집시 그룹은 각각 리더에 의해 소규모로 뿔뿔이 흩어졌다. 15세기경에는 유럽의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 1500년까지 집시는 영국에서 스웨덴, 폴란드와 노르웨이에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에 걸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집시들이 유럽에 들어 올 때 처음 얼마 동안은 그들의 동질성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정체성은 흐려졌고 그들을 하나로 묶을 만한 결집력 역시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리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한 뼘의 영토도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을 보호해 줄 자치 군대나 그들을 대신할 정부조차 없었다. 죽어 한 조각 뼈 묻을 고향도 그들에겐 없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도는 생활이었기에 통일된 언어 체계와 가장 기본적인 사회 구조 형성조차도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약점을 가진 집시들에게 가해지는 인종적인 억압과 편견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책 없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인 힘이 없었기 때문에 불공평하게 책정된 세금을 내지 못해 노예로 팔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때로는 영주나 지주들이 농민들의 불만을 이들에게 돌리게 하여 그들은 피의 굶주린 민중들의 희생양이 되었고, 재판에 있어서도 언제나 불평등했다.

중세 시대에는 마녀 사냥과 살아 숨 쉬는 악마를 대신하여 이들은 산체로 화형에 처해지거나 매장을 당해야만 했다. 중세시대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집시 학살은 정확한 숫자가 어려울 정도의 죽임을 당했다. 단지 집시라는 이유만으로, 이 저주의 사슬과 같은 인종적 편견(偏見)은 오늘날도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대로 답습(踏襲)되고 있는 것이다.

집시의 사회는 지나간 과거를 기록해 두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 집시의 역사는 언어나 종교, 영토처럼 한 국가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요소들로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견고한 문화를 보여주는 독특한 민족의 역사이다. 늘 쫓기는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탓에, 오히려 친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불행한 운명을 견뎌온 한 민족의 역사이다.

앙리에트 아세오(Henriette Asseo)의 글로 오늘은 마치려고 한다.
“집시 민족의 언어에는 ‘소유’ 와 ‘의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유와 의무를 몰랐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으며 또 아무 것에도 구속 받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의무’와 ‘소유’는 삶에서 잃어버린 두 단어이지만, 다른 두 단어 ‘사랑’과 ‘자유’는 그들의 찾고자 하는 전부였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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