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 십자군 이야기를 쓰면서 느낀 솔직한 생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앙고백도 하지 않았고, 세례도 받지 않은 믿음으로, 그가 기독교의 모든 지도자들을 니케아에 불러 모은 후 공의회를 열었다. 이단 문제와 교회의 당면 과제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공의회가 롤 모델이 되어서 그의 후임 황제들은 교회 문제를 공의회를 열어서 해결하는 샘플을 제공 받게 된 것이다.
- 공의회 (Σύνοδος. Concilium)의 시작
- 일곱 공의회 시대(Era septem conciliorum)
- 하나님을 낳았기에 하나님이 된 마리아, ‘데오도코’ (Δεοδόκο)
십자군 이야기를 쓰면서 느낀 솔직한 생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말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신앙고백도 하지 않았고, 세례도 받지 않은 믿음으로, 그가 기독교의 모든 지도자들을 니케아에 불러 모은 후 공의회를 열었다. 이단 문제와 교회의 당면 과제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공의회가 롤 모델이 되어서 그의 후임 황제들은 교회 문제를 공의회를 열어서 해결하는 샘플을 제공 받게 된 것이다.
[미션저널] 공의회 시대: 다수가 진리인가?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6) »
필자가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판결 받아 추방된 것과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이라는 에베소 공의회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필자가 가끔 방문객이 있어 동행하는 곳이 메떼오라 수도원 지역이다. 이곳 수도원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채플이 아이콘 화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이콘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인데 그 성화 속의 성모 마리아는 겉옷은 붉은 색이며, 안쪽 옷은 파란색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전자의 옷은 파란색, 후자의 옷은 붉은색 이다. 일면식이 있는 현지인 가이드 도라 여사는 파란색은 인간을 뜻하는 색상이고 붉은 색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색깔이라고 설명을 주었다. 즉 사람인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았기에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상징이라고 했다.
정교회 교인인 그녀에게 충격이 될 약간의 짓궂은 질문했다. “정말 마리아가 완전한 하나님인가?” 그녀는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매년 8월 15일은 성모 승천일”이라고 묻지 않은 보충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럼 에베소에 있는 마리아의 무덤은 왜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 몰라,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렇게 결정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라는 볼멘 소리를 질렀다. 필자는 실없이 웃고 말았다.
공의회 (Σύνοδος. Concilium)의 시작
그리스 정교회에서 보물처럼 여기는 ‘거룩한 문서’ 아기아 그라피(Αγια Γραφή)들이 있다. 신구약 성경을 포함한 각 공의회 회의록(Πρακτικά του Συμβουλίου)등이다.
정교회가 공의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 지를 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공의회가 시작된 것은 신약성경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The Conference of Jerusalem) 행 15:1-21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인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종교회의였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제 1차 전도를 마친 뒤 이들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Church of Antioch)고 돌아왔다. 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안디옥 교회 안에 유대계 성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규정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이 난무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및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파견하여 이 문제의 공식적 해결을 요청함으로써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2~3세기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Κατακόμβες)으로 상징되는 기독교 박해시대에는 교회의 감독들과 지도자들이 지역별로 모여, 현안 문제를 의논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관계를 돈독히 하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회의를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이다. 대표적인 회의가 성경의 정경과 외경을 결정한 카르타고 공의회(Concilium Carthaginiense)가 있다. 공의회라고는 하지만 초기 교회 내부에서만 공인된 회의였다.
니케아 공의회부터는 세상에 알려진, 세상이 인정하는 공의회 시대로 들어왔다. 앞서 누누이 이야기 했 듯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교회는 자유와 평화라는 일상 속에 젖어있었다.
그동안 속 사도들과 교부들의 도그마(Δόγμα)로 내려오던 신학적인 문제들이 하나씩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황제는 이 문제들을 가만히 두면 교회 뿐 아니라 제국 안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안에서 아타나시우스파(Athanasianus)와 아리우스파(Arianus)사이에서 교리 논쟁이 일어났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머물고 있던 니케아로 주교들을 소집했다. 신앙심이 없는 황제는 교리에 무지했다. 특별한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교리를 통일할 목적과 제국의 평안을 위해서는 공의회를 열어야 했다. 그는 황제의 권위를 가지고 공의회 회의의 의장이 되어 공의회를 주재했다.
교리논쟁에 황제는 서로가 합의 하기를 원했지만,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선고 후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것이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파 주교 5명을 제외한 남은 313명이 찬성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회의의 의사 결정에 세속 권력이 개입한 선례가 되었다. 황제의 입김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공회의가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이다.
일곱 공의회 시대(Era septem conciliorum)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시작으로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종교인 기독교의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여러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는 테살로니키 칙령(Edictum Thessalonica)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를 인정하는 여러 로마의 종교 중 하나였다면 데살로니키 칙령은 이제 기독교만이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것이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56년만인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열려 니케아 신경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431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에베소 공의회가 열렸다. (에베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와 마리아의 신성문제라는 제목으로 아래에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성이 없고 신성만이 유일하다는 단성론을 배제 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다’라는 칼케돈 신조를 공포했다.
니케아공의회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한 논쟁이 칼케돈 공의회에서 일단락된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대제가 소집한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5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기독교의 여섯 번째 공의회이다. 기존 공의회 결정들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형태의 아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단성론(Μονοφυσιτισμός)을 단죄한 공의회였다. 새로운 이교인 이슬람이 등장하기 전까지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680-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린 것은 단성론을 배격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뜻(의지)과 사람으로서 뜻(의지)인 두 가지를 다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에베소 공의회가 열린 에베소 교회 유적지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레온 4세(Legionis IV)의 황후이자 비잔틴 제국의 여 황제인 이레네(Irene)가 주도하여 이루어진 이 공의회에서 교회는 “성화(εικόνα)는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한 것이지, 성화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성화를 인정하는 것은 절대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성화에 대한 성상(Αγία Άγαλμα)박해를 끝내고 성상 공경을 인정하는 것을 결의하였다.
869~870년, 879~88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된 공의회이며 이 시점부터 가톨릭과 정교회가 따로 공의회를 구분한다. 869년 10월 5일에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성당에서 열렸다. 콘스타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로마 총대주교 하드리아노 2세(Hadrian II)와 동로마제국 황제 바실리우스(Basilius)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직 임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했다. 여기서 이전 황제 미하일(Mikhail)이 해임시킨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Ignatius)가 복직되고 미하일이 임명한 총대주교 포시우스(Posius)의 퇴위를 추인하고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로마가톨릭 교회는 869년의 공의회만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이자 제8차 세계 공의회로 인정한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에서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7개 세계 공의회만을 세계 공의회로서 인정한다. 다만 879년 공의회를 정교회의 교리로서 인정한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공의회는 중세 초기부터 여러 형태로 보여준 동방과 서방,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균열을 나타냈으며 200년 후 1050년 동서 대분열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말았다.
제1차 공의회에서 제7차 공의회까지는 동로마 황제가 소집한 회의들이었다, 장소들은 비잔틴 제국의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에베소, 칼케돈 지역 등이었다. 이들은 5대 교구 좌 교회의 대표들이 다 모였지만 주로 동로마제국안의 대표들이 주를 이루었다. 소수인 로마 가톨릭은 당연히 소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을 낳았기에 하나님이 된 마리아, ‘데오도코’ (Δεοδόκο)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기에 기독론에 대한 깊은 이야기보다는 그 당시의 상황을 현재의 눈으로 다시 한번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덧붙여 논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과 논쟁은 두 학파로 나누어진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na schola)학파와 안티오키아(Antiochena schola)학파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그리고 참 사람이라고 믿는다. 이 같은 신앙고백이 등장하기까지의 수고는 니케아 공의회를 거치면서 바른 기독론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었음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에베소 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은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로스(Cyrillus)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논쟁이었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神)성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 신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는 신성을 탄생한 테오도쿠 (Θεοδόκου)라고 주장하는 키릴로스와 반대로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격과 인격을 갖춘 완전한 분인데,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는 인간 예수를 낳으신 어머니다. ‘그래서 신(神) 이신 예수의 어머니는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마리아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이기에 마리아를 ‘흐리스토 토코스’(Χριστοτόκος)라고 불러야 한다. 기독교를 양분시킨 이 논쟁은 과거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오래된 반복의 결과이기도 했다.
키릴로스가 주장한 ‘데오도꾸θεοτόκου’ 라는 표현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부들이 관용적으로 사용해오던 표현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반 기층민들의 신앙적 언어로 자릴 잡았다.
공의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 본질이다’라는 명제 아래 끝을 내어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까지 인격과 신격을 이야기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마치 마리의 무덤도 있는데 그녀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말이 안 되는 논리를 펼치는 것처럼.
그리고 다른 문제는 에베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회의장에 도착하기 전 공개적으로는 키릴루스가 정치적인 수완을 동원하여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및 다른 주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단성론자로 정죄한 후 출교시켰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이집트로 유배 되었는데, 436년 사막에서 쓸쓸하게 그의 생을 마감했다.
요한복음 19장 26-27 “… 그 모친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제자가 그때부터 자기 집에 모시니라“ 그 제자가 사도 요한이고 에베소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작은 그리스도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게도 분명한데…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신전을 아테네 여신전이 아닌 파르테논( Παρθενώνας)신전이라고 부른다. 모두가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 왜 아테네 사람들은 아테네 신전이라는 표현보다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불렀는가? 그들이 섬기는 여신을 더욱 존귀 하게 여기는 의미인 것이다. 신화 속의 모든 여신들은 결혼을 하였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여신들은 동성애를 즐겼지만 오직 아테네 여신만은 평생 동정녀로 지냈기에 “파르테논”동정녀의 집이라고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 파르쎄노나스(Παρθενώνας)는 예수님의 어머니에게도 불러졌다. 동정녀 마리아 (παρθένα Μαρία). 동정녀 마리아면 충만한데 사람들은 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정녀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낳은 분이기에 하나님의 어머니 ‘데오도쿠’ (Μητέρα του Θεού θεοτόκου’)라는 논쟁 속으로 빠졌는가?

그리스 성화의 특징: 색깔론 붉은 것은 신성, 파란 것은 인성,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 임을 나타내는 성화 상징
이 같은 논쟁으로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결국 마리아는 무오한 하나님이 되었고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매년 8월 15일 승천 기념일이 오면, 더욱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에 있는 마리아의 무덤은 무엇인가?
다수가 진리인가?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이단적인 것인가?
동일한 주장을 하므로, 이단으로 정죄 되어 모든 재산과 직위를 잃고 먼 사막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은 네스토리우의 이야기를, 그의 변호를 다음번 십자군 이야기에서 하고 싶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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