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저널]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사이의 유대인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14) »
2015년 5월 그리스와 스코피아(구 유고연방 공화국, 현재 북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국경인 에도메니(Εdomeni)에는 매일 많은 수의 난민들이 통과하는 난민 게이트가 열렸다. 필자는 약 일 년 동안 이 국경에서 난민 사역을 진행했었다. 처음에는 아내와 함께 단기사역자로 수고하신 장로님 내외 등 4명의 동양인이 난민 사역하는 것이, 외국 텔레비전 기자들에게도 이상하게 보였는지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어느 프랑스 방송 여자 기자는 아내가 난민여성에게 생리대를 비롯한 여성 용품을 나누어주자 직접 ‘얼마 되지 않은 돈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전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난민 사역은 당시 그리스 개신교 청년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모 교회 목사님의 충고대로 이곳의 청년들을 볼런티어로 불러 모았다. 나중에 이들은 국제 난민단체의 훌륭한 사역자들이 되었다.
우리 로마(집시)형제들도 틈만 나면 난민사역에 동참했다. 어느 날 로마형제 P가 한 난민에게 휴대폰의 웹을 통하여 전도를 하였다. 아마도 ‘예수를 믿으셔요! 정도의 전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상대는 너무도 화가 난 상태로 P형제에게 소리쳐서 필자가 말려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화나게 했는지를‘ ’당신들은 우리가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모릅니다. 십자군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당신도 모르잖아요! 아마도 이 이슬람 형제는 한 백 명의 난민을 인솔해 가는 인솔자로 보였다. 영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가 전쟁 중이어서 이렇게 난민이 되었지만 우리의 마음마저 난민이 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라고 응해주었다.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와 십자군은 우리가 느끼는 사라센의 감정보다도 더 안 좋은 것 같았다. 세월이 이렇게 지났음에도 십자군의 기억이 부정적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놓고 한동안 생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를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사이에서의 유대인‘이라고 정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막스 아이 디몬트 (Marx I Dimont)의 저서 『유대인, 신과 역사 사이의 틈바구니에서』 (Jews, God and Histoey)가 갑자기 생각났기에 정한 것이다. 십자군 이야기의 서두에 이슬람이 아닌 유대인 그것도 반유대주의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은 십자군 운동은 반 이슬람 적이기도 하지만 어쭙잖게 안티세미쯤(anti-semitism)의 요소로 인해 유대인 학살이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Contents
혼란 속의 비잔틴 제국과 황제들
앞선 이야기들에서 소개한 돌궐족의 서진이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는 이들을 튀르크라고 불렀다는 것을 이미 말했다. 이해가 되리라 믿지만, 살을 조금 더 붙인다면 튀르크족의 갈래 중 하나인 셀주크 튀르크(Seljuk Turks)는 쇠약해 가는 아바스 왕조의 용병으로 고용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바스 왕조를 대신하여 군사, 정치 등의 중요한 요직을 다 관리하였기에 아바스왕조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놓았다. 이들은 동쪽은 비잔틴 제국과 땅따먹기 전쟁에 돌입하고 서쪽은 파티마 이슬람왕조의 영토와 종교의 명분인 아바스 왕조를 대신하여 땅따먹기 전쟁이었다.

레온 6세 소포스
이 시기 즉 867년 비잔틴 제국은 제2의 중흥기라고 말하는 마케도니아 왕조가 설립된다. 로열 패밀리가 아닌 아르메니아의 농민 출신인 바실리우스 1세 마케돈 (Βασίλειος A’ Μακεδών)이 아모리아 왕조의 미하일 3세(Μιχαήλ)를 살해하고 마케도니아 왕조를 세웠다. 약 200년간 유지한 비잔틴 제국의 마케도니아 왕조는 좋은 황제들이 등장하여 이슬람 등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고 내부적으로 안정된 재정 기반과 영토 수복 등으로 제국의 안정을 다녀놓았다. 법률과 행정의 레온 6세(Λέων ΣΤ), 문화를 꽃피운 콘스탄티누스 7세(콘스탄티노스 7세 (Κωνσ ταντῖνος Ζ) 불가리아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는 바실리오스 2세 (Βασίλειος Β)등이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조의 말기는 어느 왕조의 말기보다도 깊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한다.

오른쪽/ 바실리오스 2세/ 중앙/그리스도에게서 왕관을 받는 로마노스와 에우도키아/ 왼쪽/ 알렉시오스 황제와 예수 그리스도 성화
1028년 11월 콘스탄티누스 8세 포르피로게니투스 (Κωνσταντῖνος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가 아들 없이 사망한다. 딸만 세 명을 두었다. 그래서 막내딸인 테오도라 포르피로옌니티 (Θεοδώρα Πορφυρογέννητη)와 친척인 로마노스 3세 아르이노스(Ρωμανός Αργυρός)와 결혼시키기를 원했지만 테오도라가 거절하자 테오도라의 언니인 조이 포르피로게니타 (Ζωή Πορφυρογέννητη)를 결혼시켜서 로마노 3세가 제위에 오른다.
테오도라는 칩거 상태에 들어가지만 질투심 많은 언니 조이는 동생에게 누명을 씌워 수녀원에 감금 시킨다. 테오도라는 수녀원에서 나가는 길은 결혼임을 알고 불가리아의 프레시안과 결혼한다. 그녀는 황위를 꿈꾸었지만 실패했다. 이번에는 제국의 서부방면 총 사령관 콘스탄티누스 디오예니스(Κωνσταντῖνος Διογένης)와 반역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한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언니 조이는 첫 남편 로마노 3세와 둘째 남편 미하일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양아들 미하일 5세를 황제로 옹립시킨다. 그러나 양아들인 미하일 5세 칼라파테스(Μιχαήλ Καλαφάτης)가 황후인 조이를 추방하자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미하일 5세는 추방되고 대신 조이와 테오도라가 공동으로 여 황제(女帝)에 오른다. 동생을 끔찍이 싫어한 조이는 또 다시 결혼을 한다.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호스(Κωνσταντῖνος Μονομάχος)이다. 테오도라는 여제의 예후를 받았지만 그녀는 다시 수녀원으로 보내어지고, 권력은 조이의 세 번째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9세가 가지게 된다. (이스탄불의 아기아소피아 성당 2층 끝에 가면 조이의 모자이크가 있다. 조이를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동자가 재미있는 모자이크인데 사실 조이가 남편을 바꿀 때 마다 남편의 얼굴 모자이크만 바꾸었다고 한다.)

오른쪽/ 아야 소피아에 콘스탄티노스 9세와 조이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사실 이 모자이크는 그녀가 재혼을 할 때마다 남편의 얼굴과 이름을 새 남편에 맞추어 바꾼 거라고 한다. /왼쪽/ 아기아_소피아 성당의_알렉시우스 모자이크화
1050년 조이의 죽음과 1055년 콘스탄티누스 9세가 죽자 테오도라는 단독 여 황제에 오르게 된다. 1년 후인 1056년 8월 테오도라는 군 요직을 거친 미하일 6세 브링가스(Μιχαήλ Βρίγγας)에게 황위를 양도한다. 그녀의 죽음으로 마케도니아 왕조는 문을 닫는다. 22년 동안 7명의 황제가 혼란의 절정을 이루었던, 비잔틴 제국의 마케도니아 왕조가 문을 닫을 즈음 제국의 내부사정은 더욱 혼란의 상태에 빠진다. 이러한 제국의 혼란은, 변방의 적들에게는 더 없는 기회였다. 내부적으로는 미하일 6세가 황제로 오른 지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동부 방면 아나톨리아의 사령관 이사키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Ισαάκιος Α Κομνηνός)가 황제에 오른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1세는 자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신을 지지해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하일1세 키룰라리오스(Μιχαήλ Α Κηρουλάριος)와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문제로 갈등을 빚는다. 강직한 미하일 대주교는 정치를 잘못할 경우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황제를 폐위 시킬 것이라는 설교를 하자, 황제는 총대주교의 친척이자 자신이 동부 방면 사령관으로 재임할 때 동료였던 콘스탄티누스 두카스를 황제로 세울 것이라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황제의 친위부대에 의해 미하일 대주교는 많은 굴욕을 당하다 사망한다. 총대 주교의 죽음 이후 황제는 벼락을 맞아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총대주교의 죽음에 대한 후회 속에 고민하던 황제는 아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갔다. 자신의 군 동료이자 죽은 미하일 대주교의 친척인 콘스탄티누스 두카스를 황제로 세운다는 양위 각서와 함께 자신의 죄를 참회 한 후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개월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콘스탄티누스 두카스(Κωνσταντῖνος Δούκας)가 콘스탄티누스 10세(Κωνσταντῖνος Ι)로 황제에 등극하자 6개월도 안되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0세는 반대 세력과의 합의로 모든 내부의 어려움을 잘 넘겼다. 그러나 그가 범한 한 가지 실수는 셀주크 튀르크에 대한 판단 미스였다. 그의 전임자 이사키오스는 쿠데타로 아나톨리아 방면 군을 이동시킨 이후 수비대의 병력을 충원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 역시 황제가 된 후에도 수비대 병력을 그대로 두어, 제국의 동쪽 방어의 벽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수비대의 인원으로는 튀르크의 유민들의 끝없는 침임을 속수무책으로 방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국의 운명보다도 자신의 후계 문제를 먼저 걱정한 황제였다. 자신의 아들 미하일 7세와 콘스탄티우스 두카스 가 성년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아내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Εὐδοκία Μακρεμβολίτισσα)에게 아들들이 장성 할 때 까지 결혼을 하지 말라는 유언과 약속을 받는다. 에브도키아는 두 아들과 함께 섭정의 지위로 여 황제에 오른다. 콘스탄티누스 10세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과 같은 군인 출신의 황제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비대의 병력의 증원도, 자신의 아내가 군인에게 재혼하여 다시 군인 황제가 생기는 것도 원치 안았다. 그러나 인생이 자기가 꿈꾸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만지케르트 전투(Μάχη του Μαντζικέρτ)

오른쪽/ 니키포로스 3세와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 /왼쪽/ 만지케르 전투와 로마노스 4세를 능욕하는 알프 아르슬란
이즈음 셀주크 튀르크의 군대는 비잔틴 제국의 동부주둔군 사령부인 네오 케사리아(Νεο Kαισάρεια)지역을 점령한다. 이제 아나톨리아 전역이 셀주크 튀르크에게 넘어가자, 아나톨리아 북부인 아르메니아 지역은 자연스레 튀르크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같은 상황이 도래되자 비잔틴 제국의 원로들은 여 황제인 에브도키아에게 능력 있는 군인과 재혼하여 국방을 강화하라고 요청을 거듭한다.
에브도키아 역시 제국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전남편과 약속은 없던 것으로 한다. 그래서 두 명의 후보 중 한명인 로마노스 디오예니스(Ρωμανός Διογένης)와 재혼하여 로마노 4세(Ρωμανός Δ)로 황제에 오른다. 군인 출신답게 로마노 4세는 제국을 위협하는 적들과 전투를 벌인다. 오늘날 반 호수(Lake Van)가의 도시인 만지케르트(Μαντζικέρτ) 전투에서 로마노 4세는 패배하고 튀르크의 알프 알란(Alp Arslan)에게 포로가 된다. 만지케르트 전투가 유명한 것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전투에서 포로가 된 사건이다. 로마노 4세는 극적으로 포로에서 풀려났지만,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들 미하일 7세 두카스(Μιχαήλ Ζ Δούκας)에게 황제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미하일 7세 두카스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무능의 극치를 보여준 인물이다. 백성들이 그를 부를 때는 미하일 7세가 아니라 파라피나케스(Παραπινάκες)라고 불렀다. 제국 내의 물가가 너무 올라서 돈의 가치가 4분의 1로 내려갔기에 붙여진 별명이 4분의 1이었다. 결국 정치적인 실망을 넘어선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은 원로원의 주도로 무능한 황제 미카엘 7세를 퇴출시킨다.
그리고 원로원이 추천한 카파도기아 군인 출신인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Νικηφόρος Γ Βοτανειάτης)를 황제로 세웠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황제에서 퇴출된 후 수도원에 들어간 미카엘 7세의 아내 알라니아의 마리아(Μαρία της Αλανίας)와 결혼한다. 많은 나이의 니키포로스 3세는 내부적으로는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외부적으로는 튀르크의 유목민의 불법 침임에 골치를 썩여야했다. 황제는 서부방면군 사령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와 그의 형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 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자신의 처가인 미카엘 7세의 가문인 두카스 가문과의 협력으로 군대를 영토 수복지가 아닌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행군시켰다. 수도의 성문은 이미 매수된 수비병에 의해 열려지고 성안에서는 황제를 지지하는 시민들과 내전에 들어가지만 일방적인 전투 끝에 황제는 폐위되고 알렉시오스 1세가 황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 1세(Αλέξιος Α)의 ’우리를 도우라’
알렉시오스 1세는 앞서 이야기 한 대로 군부 쿠데타로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1세 콤니노스의 조카이다. 삼촌에 이어 그 역시 쿠데타로 황제에 올랐다. 비잔틴 제국은 이야기하기도 힘든 혼란의 정점에서 새로운 왕조를 세운 알렉시오스 1세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적이다. 혹자는 알렉시오스 1세가 세운 콤니노스 왕조를 가리켜서 ‘비잔틴 제국의 몇 안 되는 현군이자, 콤니노스왕조의 부흥기(Komnenian Restoration)라고 말하기도 한다.
새로운 왕조를 세운 황제의 나이는 34세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 내부적으로 전임 황제들이 벌려놓은 재정 문제인 4/1 로 폭락한 재정 등의 설거지를 해야 했다. 외부적으로 베네치아공국과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노르만족과 튀르크 족으로부터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에 오르기 전후의 비잔틴 제국의 상황은, 바이킹의 분파인 노르만(Normand)족은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1070년 얼마 남지 않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잔틴 영토인 남부 브린디시를 빼앗았다. 그리고 일 년 후인 1071년에는 그리스와 가장 가까운 항구인 바리마저 점령했다. 바리는 비잔틴제국의 이탈리아반도의 총독부였다.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가 이끄는 노르만족에 의해 결국 비잔틴 제국은 다시는 이탈리아를 수복하지 못한 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나마 노르만족은 전원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가끔씩 로마 교황의 눈치라도 보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북쪽의 국경에서는 유목민인 페체네그(Πατζινάκοι)족과 쿠만(Cumania)족은 흑해 주변의 영토를 침략해왔다. 그리고 동쪽은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유명한 도시 이고니움(현재 이름은 코냐)에 셀주크 튀르크의 수도를 세웠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자신을 폐교시킨 전임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신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관계 개선으로 튀르크가 점령한 성지수복을 요청한 것이다. 이것이 알렉시오스 1세의 ’우리를 도우라’ 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와 또 다른 교황 클레멘스 3세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의 개혁을 도운 그는 1078년 오스티아의 추기경이 되었다. 그레고리 7세를 이을 교황후보로 우르바누스 2세가 가장 유능한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085년 그레고리우 7세의 후임 교황은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대원장인 데시데리우스가 선출되어 빅토르 3세(Vittore III)로 즉위하였다. 빅토르 3세가 1년 3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하자, 1088년 3월 12일 교황 빅토르 3세를 이어 교황에 오른다.
교황이 된 그는 전임 교황이 벌여 놓은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자신을 발탁해서 교황까지 오르게 한 그레고리 7세가 진행한 교회개혁과 신성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세운 대립교황(Antipapa)라벤나의 주교 클레멘스 3세 (Clemens III)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클레멘스 3세는 그레고리 7세와 대립했던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가 세웠다. 우르바누스 2세 시대 뿐 아니라 그의 후임 파스칼 2세 때까지 두 명의 교황이 가톨릭교회에 존재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가 하인리히 4세와 손을 잡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사실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노르만족 문제로 도움을 요청한 사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르바누스 2세의 든든한 뒷 배였던,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권의 권위와 교회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당시 귀도 가문(Guidonids)의 신성로마 제국 하인리히 4세와 오랜 시간동안 반복과 갈등 속에 전쟁까지 치러야했다. 갈등의 원인은 세속 권력인 황제가 로마교회의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세속 권력이 교회 내부 문제에 개입함으로 교회는 부패했다고, 확신한 그레고리 7세는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속권력의 성직자 임명권을 막아야 했다. 왜냐면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 교회를 좌지우지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인리히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진행해 온 성직자 임명권을 내려놓기 싫었던 것이다. 그레고리 7세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단호한 입장을 내어 놓는다.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함과 동시에 하인리히 4세를 도와주는 사제나 귀족들 역시 같이 파문한다는 파문 장이었다. 신성로마 제국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인리히를 멀리할 뿐 아니라 새로운 황제를 선출할 기미가 보인다. 불리함을 깨달은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에게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위/ 3.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107-1대 황제이자, 두카스 왕조의 제3대 황제. fhakshtm 4tp /오른쪽 아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토스카나의 마틸데, 클뤼니의 후고/ 그 옆/ 4.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의 미니어처로 묘사된 교황 우르바노 2세 / 중앙/ 우르반 2세/ 왼쪽/ 클레레몽 교회회의 (그림_위키백과 참조)
카노사의 굴욕(The Humiliation of Canossa)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가 있는 카노사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다. 한겨울에 신발을 신지 않고 황제의 의복이 아닌 평민의 옷을 입고 용서를 구했지만, 그레고리 7세는 처음에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 성문 밖에 3일을 세워두었다. 교황의 열렬한 후견자인 카노사성 성주의 부인인 마틸데 디 카노사(Matilde di Canossa)와 하인리히는 그레고리 7세가 인도하는 저녁 미사에 참여함으로 교황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카노사의 사건은 교황의 권력이 세속 권위보다 높다는 것을 경고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와신상담 끝에 독일에서 자신을 반대한 정적을 제거하는 내전에서 승리한다. 권력을 회복한 후 이번에는 교황 그레고리에게 복수를 진행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는 3년 간 공방전 끝에 1084년 로마를 탈환한 후 교황 그레고리 7세를 폐위시킨다. 라벤나의 주교를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세웠다.
그레고리 7세는 산탄젤로성(城)으로 피신 한 후 노르만족의 로베르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노르만족이 로마로 공격해오자 하인리히는 자신의 영지로 군대로 철군시킨다. 노르만족은 그레고리 7세를 구출했지만 야만족답게 로마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한다. 노르만족의 만행을 저지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야했다. 로마시민들의 원성은 노르만족을 불러들인 그레고리 7세에게 돌아갔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그레고리 7세는 로마에서 철수하는 노르만족의 군대와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세속권력과 싸움, 그리고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던 그레고리 7세는 망명지인 살레르노(Salerno)에서 로마로 돌아오지 못한 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우르바누스 2세의 ‘하나님의 뜻’(It is the will of God)
후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레고리 7세의 정책을 완성시키기를 원했다. 아니 더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그는 로마에 머무는 시간보다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그의 고국인 프랑스를 자주 방문하였다. 방문도시에서 종교회의를 인도하면서 하인리히가 세운 클레멘스 3세를 비판했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트 2세(Konrad II)에게는 시칠리아 백작 로제 1세(Roger I)의 딸 막시밀라(Maximilla)와 중매를 서고 결혼을 시켰다. 그리고 콘라트에게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라는 반란을 부추겼다. 이 같은 상황에 있는 우르바누스 2세에게 알렉시우스 1세의 ’우리를 도우라’는 메시지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기회인 동시에 신의 선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남부 산악도시인 클레르몽(Clermont)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교황의 방문과 종교회의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교황은 연설을 시작했다. 성지 하나님의 뜻은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죄가 사면(promised remission of sins)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는데 참여한 사람들은 영생에 이른다. 는 연설을 하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It is the will of God)이다. 라고,,, ,
클레르몽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연설할 당시에는 십자군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다만 순례자인 페레그리나티오(peregrinatio)와 여행자(이테르,iter)라는 말만 있었다. 이 순례자들이 이제는 군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친 군중들의 손에는 칼과 창이 들려져 있었다. 귀족과 농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에 참여를 선언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그들의 옷과 방패에 붙였다. 이후 사람들을 이들을 십자가의 사람들인 십자군(crusades)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른쪽 위/ 5.유럽에서 11세기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며, 유대인을 외모적으로도 다르게 그리는 등 인종적인 차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수를 유대교 종교재판소에 넘기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린 12세기 영국의 성화. 구부러진 코 등으로 유대인을 다르게 그리고 있다. REUTERS / 아래/ 전쟁의 역사 / 좌쪽/ 제1차 십자군 당시 기사, 병사, 여자들을 이끄는 피에르 레르미트.
유대인 학살과 십자군
필자와 함께 이스라엘에서 같이 있었던 S형제는 현재 한국의 모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에 남는 S형제의 말은 형제가 당시 히브리 대학에서 만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면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우르바누스 2세와 마르틴 루터였다고’ 한다. 수많은 자신들의 동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였는데 어떻게 나에게 전도를 할 수 있느냐는 소리를 들었을 때 형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우르바누스 2세의 성지회복의 외침은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다름 아닌 한밤중에 홍두깨 격이었다. 아니 두 눈 뻔히 뜨고 모든 것을 빼앗긴 귀 막힌 학살을 경험해야 했다.
예루살렘 획복을 주장했던 십자군들이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는 대학살이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일상의 평안함을 누리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현지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게토)삶 속에서 일반 평민들이 가지지 않은 금융업과 보석 가공업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 할 수 있었다. 가난한 유럽의 빈민들은 재정을 가진 이들 유대인들이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을 가르쳐서 은둔자(l’Ermite)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사이비 선동가라고 부르고 싶다. 예나 지금이나 먼 길을 가려면 재정과 세세한 일정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꿈속에서 베드로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슬람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믿는 많은 빈민들과 얼마 정도의 귀족들이 모집된 초기 십자군이었다. 이들은 1096년 4월에 프랑스를 출발하여 먼저 독일의 서부 지역으로 이동한다.(사실 피에르의 이야기는 다음호에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할 주제이다. 그렇기 이번호에서는 이정도만 하려고 한다.)
사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을 모집할 때만 해도 이런 일들이 생길 줄을 그도 몰랐을 것이다. 성지 회복을 위한 모집된 십자군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향해 동진하는 중 만나는 유대인들을 이슬람과 동일한 이교도로 생각했다.
비잔틴 제국이 빼앗긴 성지를 회복하는 것을 돕는 차원에서 시작된 십자군 운동은 프랑스와 독일 지역 특히 라인 강변과 계곡지역에 살고 있던 애꿎은 유대인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는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엉터리 십자군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살려준다고 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들은 개종보다는 죽음을 받아 드렸다고 한다. 빈민들로 구성된 빈민 십자군이라는 이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살인과 약탈을 시작했다. 이 같은 혼란은 유대인의 재산을 눈 여겨 보아왔던 일반 기층 빈민들까지 약탈에 합류했다. 사실 유대인들이 현금과 보석을 많이 가지고 잇던 것도 사실이었다.
약탈과 살인이 동반된 폭동은 통제가 불가능 할 정도로 거세지자 주교들과 귀족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약탈에 가담한 주모자들을 처형하기 이르렀다. 이것도 잠시였다. 어느 곳에서도 유대인을 보호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을 도우려던 마인츠의 대주교는 오히려 폭동을 피해서 피신해야 할 정도였다. 결국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치 경비단을 만들었지만 이교도를 박멸하려는 십자군과 도시빈민들의 강한 세력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비대원들이었던 젊은 유대인들과 어린 아이들까지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기독교로 강제 개종을 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십자군 운동을 주도한 우르바누스 2세는 아마도 이러한 꿈을 꾸지 않았을까?
십자군 모집 군중을 선동한 연설을 한 1095년 11월로부터 40년 전인 1054년 서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로마 정교회는 서로가 이단으로 정죄하고 완전한 분리의 길을 걸었다. 교황은 십자군 운동을 통해서 분리된 동서를 화합한 교황이 되고 싶을 것이다. 덧붙여서 통합 교황의 헤게모니까지 가진 권력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합리적인 의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직면한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당연히 군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로마보다도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방을 순례해야 하는 것은 로마에는 다른 교황 클레멘스 3세가 로마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이 왜 신성로마 제국을 배제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 십자군 모병을 원했는지를 독자들은 이제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다. 프랑스가 고국인 교황은 자신의 고국 프랑스에 잉여자원인 봉건기사들이 일으키는 잦은 분쟁 등으로 골머리를 알아왔다. 프랑스의 주교들과 영주들의 의견은 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피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작은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지 수복이라는 목표는 분명한 교황의 의지 중 하나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표지 사진/ 만지케르트 성채 (말라즈기르트 칼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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