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슈바(Teshuvah תשובה)의 길: 아가다와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회개의 신학-3

테슈바(Teshuvah, 회개)는 많은 이들에게 죄인이 스스로 결단하고 방향을 바꾸는 신앙 행위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유대 랍비 전통과 예수님의 비유에 천착해 보면, 이 회개의 근원에는 인간의 결단보다 앞선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어진 자녀를 바라보는 자비의 눈으로 먼저 움직이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회심은 그분의 기다림에 대한 응답일 뿐...

[영성계발] 테슈바(Teshuvah תשובה)의 길: 아가다와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회개의 신학-3 » The Way of Teshuvah (תשובה): The Theology of Repentance in the Aggadah and the Parables of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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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가는 말>

그 이름은 오래 전부터 울려온 메아리였습니다 — 테슈바(תשובה).

이 단어는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잊었던 사랑의 기억을 따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의 여정입니다. 구약은 이것을 언약의 회복이라 말했고, 랍비 유대교는 아가다의 이야기로 그 신비를 노래했으며, 예수님은 비유로 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 글은 바로 이 귀환의 신학, 곧 테슈바를 구약, 아가다, 그리고 신약의 비유 속에서 통합적으로 조망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글에서 우리는 랍비 유대교 전통의 신학과 신약의 뿌리를 살폈고, 두 번째 글에서는 아가다와 예수님의 비유를 신학적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이제 세 번째 여정에서는, ‘왜 지금, 우리에게도 테슈바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이 회개의 개념이 어떻게 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지를 탐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글에서는, 이 회복의 길이 오늘의 신학과 영성, 교회와 제자도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를 더욱 확장해 나갈 것입니다.

<왜 ‘테슈바’인가?>

“테슈바” — 존재의 근원으로의 귀환

히브리어 ‘테슈바’(תְּשׁוּבָה)는 문자적으로는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동사 ‘슈브’(שׁוּב)—돌이키다, 되돌아가다—에서 파생되었으며, 단순한 방향 전환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테슈바는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적 근원인 하나님께로의 회복, 즉 언약적 관계의 회복을 뜻합니다. 이는 마음의 결심이나 일시적인 후회가 아니라, 기억(זָכַר)과 돌이킴,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귀환이라는 전인격적 영적 운동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테슈바는 단지 교리적 명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비유라는 서사적 예술을 통해 이 진리를 펼쳐 보이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총 37개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약 23개, 마가복음에 9개, 누가복음에는 28개 정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중복을 제외하면 독립적인 비유는 약 30여 개로 정리됩니다. 이 비유들 속에는 반복적으로 흐르는 공통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돌아가야 할 집이 있다는 것,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회개가 단절이 아니라 회복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라, 언약을 저버린 자와 그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구속사의 서사를 압축한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 아버지, 그분은 하나님의 자비의 형상이요, 돌아올 수 없는 죄인조차 다시 받아들이시는 구속의 품입니다. 이 아버지와 대비되는 탕자, 그가 상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비를 저버린 인류 전체입니다.

이와 유사한 구조는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도 발견됩니다. 호세아서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그녀를 끝없이 받아들이는 신실한 남편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배반당한 신랑이지만 여전히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요엘 등 여러 예언자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 사이에서 “돌이키라”(שׁוּבוּ)고 촉구하며,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돌아오라 외칩니다.

이러한 신학적 구조는 랍비 문헌, 특히 미드라쉬, 미쉬나, 그리고 아가다에서도 발견됩니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테슈바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죄인은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며, 하나님은 그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메시지는 유대 민중의 삶 속에서 설화로 살아 움직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아가다 속 이야기들은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손짓으로 기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지금, 우리에게도 테슈바인가?”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테슈바를 중심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그의 첫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문은 열려 있으며, 누구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의 비유들은 그 문이 얼마나 넓고 열려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잃어버린 자가 발견되고,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바로 테슈바의 실재이며, 하나님의 나라이며, 복음의 중심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테슈바’라는 영적 귀환의 개념을 중심으로, 구약성경, 랍비 문헌(아가다 포함), 그리고 신약성경을 통합적으로 비교하며,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의미와 구속사적 깊이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교리 연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에 함께 동참하려는 영적 묵상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구약과 아가다의 테슈바: 언약과 정의 그리고 내면과 신비의 회복>

구약에서 테슈바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심 주제입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호세아, 이사야 등의 예언서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지만,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라”(shuvu elai, שׁוּבִי אֵלַי)고 부르십니다.

“너는 돌아오라, 패역한 이스라엘아… 내가 너의 배역을 고치리라.” (예레미야 3:12, 22)
이러한 회개의 요청은 단순히 죄를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사랑(헤세드, חֶסֶד)의 관계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회개는 공동체적이며, 외적인 종교 행위와 함께 도덕적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사 1:16–18, 욜 2:12–13).

아가다와 미드라쉬에서 테슈바는 율법적 규범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깊은 인격적 회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랍비 엘리에제르, 랍비 요하난 등은 회개를 “천지를 창조하기 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물”이라고 표현합니다(Midrash Rabbah, Bereshit 1:4).

바사드 바알 솀 토브(Keter Shem Tov)에서 등장하는 ‘왕과 아들의 이야기’는 회개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새겨진 신적 기억을 따라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영적 여정임을 상징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잊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않으며,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를 때 아버지는 달려오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순한 행동의 수정이 아닌, 정체성의 회복, 영혼의 본향으로의 귀향입니다.

랍비들은 “회개하는 자의 자리는 의인조차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테슈바를 단순한 도덕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향해 도달하는 가장 높은 경지로 여겼습니다(Talmud, Berakhot 34b).

<구약, 아가다, 신약의 테슈바(회개) 개념 비교>

첫째, 구약성경에서의 테슈바는 하나님의 언약 관계의 회복과 공동체적 정의 실현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타락할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이 회개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의 방향 전환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테슈바는 공동체적이며, 외적인 실천(예: 제사, 금식)과 함께 도덕적·사회적 공의의 회복을 요청합니다.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속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시 거룩한 길로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둘째, 아가다와 미드라쉬 전통에서 테슈바는 보다 내면적이며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의미로 확장됩니다.

랍비들은 테슈바를 단지 죄를 멈추는 행위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일치로 나아가는 영적 여정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회개는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마련하신 선물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단 한 번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이미 달려와 우리를 맞이하신다고 말합니다. 아가다 전통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새겨진 신적 기억(Zikaron)을 회복함으로써, 본래의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테슈바의 본질로 이해합니다. 이로써 테슈바는 존재론적 회복, 즉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의 회복으로 해석됩니다.

셋째, 신약성경에서의 테슈바—곧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인격적 응답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복음 사역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는 선언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신약에서의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반성하는 것을 넘어, 삶 전체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전환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이것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아들은 타락과 자기 상실 속에 있지만,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그를 달려와 안고 회복시킵니다. 신약의 테슈바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인격적 응답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으로 기능합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구약은 테슈바를 언약적 삶과 공동체 정의의 회복으로, 아가다는 내면적 영성 회복과 하나님의 긍휼로, 신약은 은혜에 대한 응답과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으로 이해합니다. 세 전통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본질적 공통점을 지니되, 그 표현과 강조점, 신학적 배경은 각 시대와 계시의 깊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회개(Metanóia):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문>

신약에서의 회개는 헬라어 μετάνοια (metanoia), 즉 “마음을 바꾸는 것, 사고방식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죄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존재적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는 선언으로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특히 탕자의 비유는 회개의 의미를 단순한 규칙 복귀가 아닌 관계적 회복, 은혜의 입문으로 재해석합니다.

탕자는 스스로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돌아오며 아버지의 무조건적 사랑 속에서 회복됩니다. 이 비유는 아가다에서의 내면적 기억의 회복과 직접 연결되며, 회개가 단순히 과거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본질적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돌아감”은 규범이 아니라 은혜의 중심입니다.

구약, 아가다, 신약은 각각의 맥락 속에서 테슈바(회개)를 다루지만,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동일한 영적 여정을 가르칩니다.

• 구약은 그것을 율법과 정의를 통해,
• 아가다는 심령과 이야기를 통해,
• 신약은 복음과 은혜를 통해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돌아오는 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이며, 회개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본래 방향으로 돌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테슈바는 단지 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의 모든 존재가 회복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테슈바와 예수님의 비유들>

다음은 Teshuvah(회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예수님의 비유들과, 그에 비견 가능한 유대교의 스토리 또는 사상을 연결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비유 (눅 18:9–14)

예수님의 비유
• 바리새인은 자신이 금식하고 십일조 드린 것을 자랑하며 기도함.
• 세리는 멀리서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함.
• 예수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선언함.

유대교 유사 구조
• 탈무드 베라코트 34b:
“회개한 자는, 일생 의롭게 산 자가 도달할 수 없는 자리에 이를 수 있다.”
• 미드라쉬 전통에서도, 하나님은 상한 마음을 더 귀히 여기시며, 단지 율법적 행위보다 심령의 통회를 원하신다고 반복적으로 강조됨.
(예: 미드라쉬 라바 시편 34편,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아니하신다.”)

Teshuvah의 교훈
• 겸손한 회개의 기도는 가장 짧고 강력한 테슈바의 형태.
• 하나님은 율법적 공로가 아니라, 진심의 돌이킴을 기뻐하심.

잃은 양의 비유 (눅 15:3–7)

예수님의 비유
• 목자가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 99마리를 두고 떠남.
• 찾은 후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돌아옴.
• 예수는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더 큰 기쁨이 있다”고 말씀함.

유대교 유사 구조
• 미드라쉬 시르 하쉬림 라바 2:9: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 가운데 있어도 그들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며,
“내 백성은 잃은 양 같으나 나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심.
• 탈무드 요마 86b:
“회개는 하나님을 사람 가까이에 있게 한다.”

Teshuvah의 교훈
• 하나님이 먼저 죄인을 찾으시는 선제적 은혜
• 회개는 인간의 결단이지만,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가능함.

불의한 아내와 다시 맞이하는 남편 (구약 호세아서 & 유대교 미드라쉬)

호세아의 삶과 설교
•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심.
• 그녀가 타락한 후에도 다시 데려오게 하시며 “너는 다시 내 백성이라” 선언하심.

유대교 확장 서사
• 미드라쉬 호세아 라바 2:5:
하나님은 “나의 신부, 이스라엘아, 너는 떠났으나 나는 너를 기다린다.”
• 테슈바는 파기된 언약을 다시 잇는 능력이라고 설명됨.
• 랍비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감정, 즉 기다림, 슬픔, 기쁨을 모두 포함시킴.

Teshuvah의 교훈
• 죄인의 회개는 깨진 언약의 재연결
• 하나님은 언약의 남편으로서 기다리며 받아주시는 분

삭개오 이야기 (비유는 아니지만 회개 서사) – 눅 19:1–10

• 세리장이며 부정한 자였던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감.
• 예수께서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말씀하시고, 삭개오는 자기 죄를 고백하며 재산을 나눔.
• 예수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선포.

회개의 진정성은 단지 고백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와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남.

<아가다: 랍비와 창녀 이야기>

출처: 탈무드 아보다 자라 17a

내용 요약:
랍비 엘라자르 벤 두르다야는 율법 교사였으나, 한 명의 창녀와 관계를 맺기 위해 먼 도시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녀는 그와 잠자리를 갖기 직전에 그에게 말합니다:
“엘라자르, 너는 회개할 수 없는 자다.”
그 말이 그의 마음을 찔렀고, 그는 산으로 가서 하늘과 땅, 바다, 해, 달에게 중보를 요청하지만 아무도 도울 수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마침내 그는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통곡하며 외칩니다:
“회개는 내게 달렸도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이 떠나가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랍비 엘라자르 벤 두르다야는 이 세상에서 영생을 얻었다!”

주제: 진정한 테슈바는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면의 깨달음과 회개의 결단에서 시작된다는 아가다의 가르침입니다.
핵심 포인트: 죄의 깊이가 아니라 회개의 깊이가 사람을 새롭게 만듦.

예수님의 비유: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눅 18:9–14)

내용 요약:
한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기도하지만, 세리는 감히 머리를 들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갔다고 선포하십니다.

비교 포인트:

• 랍비 엘라자르와 세리는 모두 깊은 죄 가운데 있지만, 진심 어린 통회가 하늘의 은혜를 움직입니다.
• 외면의 율법이나 경건이 아니라 회개와 겸손이 하나님 앞에서 결정적 기준이 됩니다.

<아가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

출처: 예샤야 라바 (이사야 미드라쉬)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조차 그분의 옷자락이 눈물에 젖는다는 묘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보시며 애통하시고, 그들을 버릴 수 없어 하늘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내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밤마다 통곡한다.”

비교 가능성:
예수님의 비유 중 탕자의 아버지는 매일 아들을 기다리며 지켜보다 달려 나갑니다. 아가다의 하나님 역시 감정의 하나님, 기다리는 아버지로 묘사됩니다.

신학적 요약:
신학적 요약: 아가다 이야기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회개의 본질

아가다 이야기와 예수님의 비유는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 속에 있지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의 본질이라는 공통된 신학적 주제를 공유합니다.

먼저, 주인공의 측면에서 아가다 이야기에는 타락한 랍비나 죄인이 등장하며,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세리, 탕자, 창녀와 같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물들이 중심에 놓입니다. 이 인물들은 모두 자기 내면의 죄를 직면하고 회개에 이르는 존재들로 묘사되며, 이는 회개란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깊은 내면의 자각과 방향 전환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반응에 있어서는 아가다에서는 하나님께서 긍휼로 타락한 자를 즉각적으로 수용하시는 모습이 강조되고,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잃었던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즉시적이고 전폭적인 용서가 표현됩니다. 이 공통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진심으로 기뻐하시며, 그를 다시 품으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회개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도 양쪽 전승은 하나의 핵심을 향합니다. 아가다에서 회개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돌이킴이며,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겸손과 자기부정, 즉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가 강조됩니다. 이 모두는 회개가 단지 법적 선언이 아닌 존재의 귀환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근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유사 사례:

• 막달라 마리아 (눅 7:36–50):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인 — 랍비 이야기의 창녀와 유사한 구조
• 감춰진 보화와 진주: 마음속 보물이 바뀌는 결단은 곧 회심의 형태

테슈바(Teshuvah)는 비유 너머의 삶의 전환이며, 하나님의 품으로의 귀향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유대 문헌은 서로 다른 시대적 맥락과 문학적 형식을 지녔음에도, 테슈바(Teshuvah) — 즉 회개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신학적 공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공통된 메시지는 단지 교리적 명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돌이키는 삶의 전환, 그리고 하나님의 품으로의 귀향이라는 실존적 초청입니다.

예수님의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에서는, 외적 경건보다 중요한 것은 겸손한 기도와 상한 심령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유대 문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으신다”(시 51:17)는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참된 테슈바는 자기 의를 버리고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회개 이전에 하나님의 먼저 오시는 사랑, 곧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추적과 포기하지 않는 긍휼을 보여줍니다. 유대 전통에서도 하나님은 “잃은 자”를 끝까지 찾으시는 분으로 묘사되며, 이는 테슈바가 먼저 하나님의 주도하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복음적 메시지와 연결됩니다.

호세아의 부부 이야기는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자비로 회복되는 여정을 그립니다. 이는 미드라쉬 속 “신부 이스라엘”의 귀향 이야기와도 맞물리며, 언약의 파괴 이후에도 회복은 가능하다는 희망, 곧 자비의 능동성을 증언합니다. 테슈바는 단지 죄책감의 정화가 아니라, 언약을 회복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삭개오의 회심은 회개가 단지 내면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삶 전체로 드러나는 실천적 변화임을 보여줍니다. 유대 윤리 문헌들도 마찬가지로, 참된 회개는 행동을 동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테슈바가 존재의 방향뿐 아니라 실제 삶의 방식까지 전환시키는 총체적 회복임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테슈바는 단순한 회한이나 감정의 표현을 넘어서, 삶의 재배치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으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그것은 비유 속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하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영원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왕과 아들의 이야기>

케테르 솀 토브(Keter Shem Tov, 좋은 이름의 왕자, כֶתֶר שֵׁם טוֹב)에 나오는 “왕과 아들의 이야기”는 바알 셈 토브(Baal Shem Tov, 바알 쉠 토브) 전승에 전해 내려오는 하시딤의 영적 우화로, 하나님의 사랑, 회개, 그리고 인간의 영혼 회복을 상징하는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고대 미드라쉬(예수님 당시)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가다 전통에서 구전되어 온 것을 문헌화 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다음은 왕과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출처: 케테르 솀 토브 (Keter Shem Tov)

옛날 옛적에, 위대한 왕이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자비로웠으며, 나라 전체를 평화롭게 다스렸다. 왕에게는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었고, 그는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왕국의 영광을 이을 후계자로 자랐다.
하지만 어느 날, 왕은 그 아들을 먼 나라로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왕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너를 낯선 땅으로 보내야 하겠다. 그곳은 나의 왕국이 아니고, 너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곳일 것이다. 너는 고난을 겪을 것이고,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너도 나를 잊지 말거라.”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순종하여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얼굴과 말씀이 선명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는 고난과 유혹에 지쳐 점차 아버지를 잊고 말았다.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모르게 되었고, 결국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그는 땅바닥에서 잠들고, 굶주리고, 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오래전 들은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그 말은 그의 심장을 울렸고, 그는 눈물 속에서 외쳤다.
“아버지여! 저는 당신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를 잊지 않으셨습니까?”
그 순간, 그의 영혼은 하늘을 향해 열렸고,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서 아버지 왕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왕은 아들을 끌어안고 말하였다.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았다. 내가 너를 그곳으로 보낸 것은, 너의 깊은 사랑과 갈망을 깨우기 위함이었다. 이제 너는 내 진정한 아들이다.”

이 이야기는 하시딤 전통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 왕은 하나님을,
• 아들은 인간의 영혼을,
• 먼 나라는 이 세상(세속적 현실)을,
• 잊음과 기억은 신앙의 희미함과 회복을,
• 눈물과 부르짖음은 테슈바(회개)를 상징합니다.

여기에서 성경의 매우 중요한 주제인 “테슈바(Teshuvah, תשובה)”가 나옵니다. 테슈바는 ‘돌아 오는 것 (return)’을 의미하며 이는 같은 의미로 ‘회개(repentance)’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부르짖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케테르 솀 토브의 “왕과 아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가 있습니다. 이 두개의 스토리를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왕과 아들의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케테르 솀 토브 (כתר שם טוב, Keter Shem Tov)라는 하시딤 문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은 바알 솀 토브(Baal Shem Tov, 1698–1760), 즉 하시딤 운동의 창시자의 가르침과 일화를 제자들과 후계자들이 수집한 것입니다. 정식 출판은 1794년이며, 그의 사후 수십 년간 전승되던 구술 자료를 문헌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왕과 아들의 이야기”는 18세기 중반 유럽 하시딤 영성 전통에서 유래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가다 전통의 확장선상에 있지만, 고대 탈무드 문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탈무드는 주로 기원후 3세기~5세기경에 바빌로니아와 예루살렘에서 정리된 랍비 율법(할라카) 및 설화(아가다)의 모음집으로, 케테르 솀 토브의 이야기는 훨씬 후대인 18세기 동유럽 하시딤 운동 시기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탈무드적 아가다의 구조와 신학을 이어받아 발전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왕으로, 인간을 아들 또는 신부로 비유하는 구조는 미드라쉬 라바, 탈무드 요마, 탈무드 베라코트 등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가장 이른 기록은 1794년 출판된 케테르 솀 토브 초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알 솀 토브의 활동기(1730~1760년대)에 그의 제자들을 통해 구술로 전승되던 내용으로 추정됩니다. 즉, 이 이야기는 18세기 중엽 동유럽 유대교 하시딤 신비주의 전통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비교 분석: “왕과 아들” 이야기 vs. 탕자의 비유>

1.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구조

케테르 솀 토브에 나오는 “왕과 아들” 이야기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왕과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하며, 작은 아들이 중심 인물로 묘사됩니다. 두 이야기 모두 부성적 존재(왕 또는 아버지)와 그로부터 떠난 아들이 중심 주제를 이끕니다.

2. 떠남의 원인과 시작점의 차이

케테르 솀 토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도적으로 먼 나라로 보내집니다. 이는 영혼의 성숙과 자기 정체성 회복을 위한 신적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반면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자발적으로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며, 이는 자유의지에 따른 욕망과 독립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3. 타락과 잊음

두 이야기 모두에서 아들은 새로운 땅에서 삶에 고통과 혼란을 겪고, 결국 아버지를 잊거나 외면하게 됩니다. 케테르 솀 토브의 아들은 정체성과 기억을 잃고 자기 존재의 뿌리를 잊게 되며, 탕자는 타락한 삶의 결과로 궁핍과 수치를 겪습니다.

4. 회복의 전환점

케테르 솀 토브에서는 어느 날 아들의 내면 깊은 곳에서 “아버지”라는 기억이 되살아나며, 이는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그 순간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들이 스스로 “나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그를 멀리서 보고 먼저 달려와 끌어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회개의 순간에 “먼저 움직이시는 아버지”를 묘사합니다.

5. 아버지의 반응과 회복의 방식

왕은 아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즉시 달려와 말없이 그를 끌어안습니다. 이는 아들의 행위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의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잔치를 준비하고 그를 가문과 관계 속에 회복시킵니다. 두 경우 모두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사랑이 중심입니다.

6. 신학적 함의

케테르 솀 토브는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와 인간 내면에 새겨진 “신적 기억”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었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잊지 않으신다는 하시딤적 신비주의가 핵심입니다. 반면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적 본질—회개하는 죄인을 향한 무한한 용서와 하나님의 기쁨—을 선포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조건이나 도덕적 성취가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공통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길, 아버지께 돌아가는 여정>

아가다의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구약의 선지자적 외침을 중심으로 한 “테슈바(Teshuvah)”의 신학

1. 예수님의 비유: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11–3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Prodigal Son)의 비유는 랍비 전통의 이야기들과 구조적으로 놀라운 유사성을 지닙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요구한 후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삶을 삽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리며 말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리라!”
그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달려와 그를 껴안고 새 옷을 입히며 잔치를 엽니다. 큰아들은 이를 못마땅해하지만, 아버지는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비유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그리고 테슈바의 본질인 “관계의 회복”을 중심으로 서사화됩니다. 회개는 규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사랑의 회복입니다.

2. 아가다, 예수의 비유, 구약의 테슈바(회개)에 대한 비교 분석

아가다의 전통(예: 케테르 솀 토브), 예수님의 비유 중 탕자의 이야기를 포함한 신약 성서, 그리고 구약의 예언서들(호세아, 예레미야 등)은 모두 인간의 회복과 하나님의 자비를 중심 주제로 다룹니다. 이 세 전승은 회개와 구원의 주제를 공통적으로 품고 있으나, 그 표현 방식과 강조점은 다소 다릅니다.

첫째, 주제 측면에서, 아가다는 왕과 아들의 관계 회복을 비유적으로 그려내며, 왕권과 신분의 회복을 통해 영적 귀환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개인적 화해가 핵심을 이루며, 가족적 사랑과 자비가 강조된다. 반면, 구약의 예언서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간의 언약 회복을 중심 주제로 삼아, 집단적이고 언약적인 관계 회복을 드러냅니다.

둘째, 회개의 기초는 세 전승 모두에서 내면의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아가다에서는 잊혀졌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점이며, 탕자의 비유에서는 죄에 대한 인식과 돌이킴이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구약 예언자들은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의 본질로 봅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도 서로 유사하면서도 구체적 차이를 가집니다. 아가다는 변함없이 기다리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가는 아버지의 자비가 두드러집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의로우신 재판자이심을 강조합니다.

넷째, 회개의 방식에서는 표현 양상이 다양합니다. 아가다는 마음의 깨달음과 과거 사랑의 기억을 통한 내적 회복에 방점을 찍고,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행동의 전환과 겸손한 고백이 회개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구약은 더욱 공동체적이며 금식과 외침을 통한 집단적인 회개가 중심입니다.

마지막으로, 회개의 결과에 있어서는 모두 회복과 기쁨을 약속하지만, 그 양상은 다양합니다. 아가다에서는 왕자의 지위가 회복되며 왕국 전체의 기쁨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잃은 자가 다시 돌아오며 잔치가 벌어지는 환영의 장면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용서와 회복이 주어지되,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도 함께 수반된다는 점에서 경고적 성격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이 불성실한 이스라엘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며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 (호 4:17)

그러나 동시에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8)

예언자적 테슈바는 감정 없는 규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찢긴 마음에서 비롯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아가다는 이러한 구약의 토대를 품고 있지만, 더욱 개인적이고 관계 중심적이며 신비한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3. “왕과 아들” 이야기 외에 발견되는 심오한 테슈바의 이야기들

1. 미드라쉬 라바 – 회개하는 창녀의 이야기:

한 창녀가 매번 유혹과 죄에 빠졌지만, 어느 날 진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그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라는 선포가 내려옵니다.
→ 이는 하나님께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신다는 유대 신학의 표현입니다.

2. 탈무드 요마 86b – 테슈바는 창조보다 먼저 준비된 은혜

랍비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테슈바를 창조하셨다.”
→ 이는 회개가 단지 인간의 반응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에 속한 창조 이전의 개념임을 강조합니다.

3. 신약의 삭개오 이야기 (눅 19:1–10)

부정한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스스로 재산의 절반을 나누며 잘못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선언합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라.”
→ 테슈바는 혈통이 아니라 믿음과 응답으로 이뤄지는 새 언약의 정체성 회복입니다.

<테슈바란 누구의 집으로 돌아가는가?>

아가다와 비유, 구약은 모두 돌아감에 대해 말하지만, 그 돌아감의 대상은 단순한 도덕적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 아버지의 집, 언약의 관계입니다.

• 구약은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 아가다는 내면의 기억과 사랑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 예수님은 은혜로의 응답과 하나님 나라로의 귀환을 선포합니다.

테슈바는 단지 죄를 멈추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새롭게 보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만납니다.

<경계를 넘는 자비: 선한 사마리아인과 유대 랍비 전통의 자비 이야기 비교>

“누가 내 이웃입니까?”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께 묻습니다. “선생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구약 율법의 요약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응답됩니다. 하지만 그는 더 깊이 묻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윤리적 질문이 아니라, 경계와 정체성, 자비의 실천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종교적으로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의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는 모든 고정관념을 깨뜨리십니다.

이 이야기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미드라쉬의 자비 이야기들은 랍비 문헌에서도 발견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병든 이방인을 도운 라삐 요하난 벤 자카이의 이야기나, 고아를 살려낸 나하문 벤 심온의 행적이 있습니다. 유대 랍비 전통은 “자비의 실천”을 율법 준수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두 이야기의 구조와 신학적 메시지

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누가복음 10:25–37)

•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칩니다. 율법의 전문가들임에도 고통을 외면합니다.
• 사마리아인은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여관에 데려가 돌봅니다.
• 예수님은 묻습니다: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이 비유의 핵심은 자비는 국적과 계급,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관념적 이웃 정의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이웃됨이 중요합니다.

2. 미드라쉬의 자비 이야기

• Midrash Leviticus Rabbah 34:14에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로마인 병사에게 먹을 것을 주어 그의 병을 고치고, 그로 인해 유대 공동체가 로마 박해에서 구원받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Avot d’Rabbi Natan 17에서는 한 여인이 고아를 돌보는 라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비”라고 강조합니다.
• 유대교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Chesed” (헤세드, חֶסֶד, 자비,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3. 비교: 자비의 신학적 의미와 실천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유대 랍비 전승 속 미드라쉬의 자비 이야기는 자비의 신학적 본질과 실제 삶 속에서의 구현 방식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두 전통은 문화적, 신학적 맥락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자비의 실천 속에서 드러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마리아인이 고통받는 유대인을 돌보는 장면을 통해, 자비란 누구에게나 확장되어야 할 도덕적 책임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행동임을 강조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에게 다가가 상처를 치료하고, 여관에 데려가 직접 비용을 지불하며 돌봅니다. 이처럼 자비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희생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표현됩니다. 특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적대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자비는 사회적 장벽을 허무는 신적 성품의 반영임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자비의 행위가 참된 이웃됨을 결정한다”는 급진적 선언입니다.

반면, 미드라쉬 자비 이야기들에서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나 나하문 벤 심온과 같은 유대 지도자들이 이방인이나 고아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구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자비를 율법에 부가되는 보조적 덕목이 아니라, 율법 자체의 중심으로 이해하며, 율법을 온전히 실천하는 길은 바로 타자의 고통에 함께하는 사랑의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자비는 인간적 연민을 넘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신학적 행위입니다. 이러한 실천은 유대-이방, 종교-세속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의 자비’로 나타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자비를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을 통해 구현되는 방식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자비의 실천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방식임을 보여주고, 미드라쉬는 자비가 곧 하나님의 율법의 정수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결국, 자비는 율법보다 앞서거나 그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과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는 도구이며, 실천을 통해 진리가 현실이 되는 신앙의 길입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얼굴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율법을 아는 자들이 아니라, 자비를 행하는 자들에 의해 드러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선한 행위의 찬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의 열매이며, 회심의 행위이며, Teshuvah의 실천적 얼굴입니다.

유대교의 아가다는 오랜 세월 동안 자비가 인간 존재의 중심이며, 율법의 완성임을 가르쳐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계승하셨고, 더욱 급진적으로 확장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가장 멸시받던 자—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는 가장 약한 자에게서 흘러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질문이 던져진다: “누가 당신의 이웃입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은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것입니까?”

<기억과 집중의 상실: 죄의 본질과 테슈바의 회복>

1. 죄의 본질: 비벨리 다앗(Bi-veli da’at,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 בי-בּלִּי דָּעַת), 집중의 결여

죄는 단지 행위나 도덕적 위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벨리 다앗(Bi-veli da’at)—즉 ‘지각 없음’, ‘주의의 상실’—은 유대 사상에서 죄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단순히 죄의 원인, 곧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로 이해하지만, 보다 깊은 해석에서는 이 무심함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tzelem E-lokim, בְּצֶלֶם אֱלֹהִים)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실패로 간주됩니다.

랍비 모세 마이모니데스(람밤, Rambam)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다앗’(דעת, 지각, 인식)이라 보았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인식 능력을 극대화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인 첼렘 엘로킴을 실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무지하거나 집중하지 않는 상태, 즉 벨리 다앗(beli da’at, בי-בּלִּי דָּעַת)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2. 시케차(Shikhecha, שכחה): 죄의 더 깊은 차원

성경과 탈무드 전통은 망각(shikhecha), 곧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에 대한 관심의 상실을 죄의 한 형태로 묘사합니다. 단순히 “죄인”이라기보다는, 삶의 염려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정신적·영적 거리두기로서 죄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이때 죄는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는 행위입니다.

3. 테슈바: 인식의 회복, 거리의 극복

이런 망각과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테슈바(회개, 귀향)입니다. 테슈바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의식의 회복, 관계의 재건, 하나님과의 거리 해소를 의미합니다. “비벨리 다앗”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그것이 테슈바의 여정입니다.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시 73:28)는 말은, 이 귀환의 본질을 보여주는 절정입니다.

테슈바는 단순히 인지적 활동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참여하는 실존적 전환입니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적인 각성과 함께, 삶 전체의 방향을 새롭게 정의하는 궁극적 선(summum bonum)입니다. 그 여정은 개인의 결단이자, 공동체의 노력입니다.

4. 계절적 테슈바: 로쉬 하샤나에서 욤 키푸르까지

히브리력으로 로쉬 하샤나부터 욤 키푸르까지의 열흘 간의 회개의 날들은 테슈바의 절정기입니다. 유대 전통은 이 시기를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때”(이사야 55:6)로 이해하며, “가까운 자들에게, 곧 가까워져야 할 먼 자들에게” 부르심이 임합니다(산헤드린 99a).

이 부르심은 단순히 도덕적 죄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영적 집중에서 멀어진 자, 잊음 속에 방치된 자,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먼저 다가오시며, 기억하라(זָכוֹר, zakhor)는 명령을 통해 망각에서 회복으로 초청하십니다.

5. 기억(zakhor, זָכֹר)과 망각(lo tishkach, לֹא תִּשְׁכַּח)의 신학

탈무드(메길라 18a)는 “기억하라”(신 25:17)와 “잊지 말라”(25:19)의 차이를 구분합니다. 후자는 마음의 상태, 즉 망각하지 않는 자세를 말하지만, 전자는 입술로, 행동으로, 의지로 기억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아말렉을 “잊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기억하라”고 명령하심으로, 적극적인 기억의 실천, 곧 의식의 적극적 표현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지식의 보관이 아니라, 인식의 현재화, 다앗의 회복, 즉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집중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헤이세흐 하-다앗(heise’ach ha-da’at, היסח הדעת)—집중하지 않는 것—역시 죄로 간주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집중을 풀어버리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 바로 그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테슈바는 존재 전체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이고, 테슈바는 존재 전체로 그분께 나아가는 귀환입니다. 이 귀환은 지성뿐 아니라 의지, 감정, 삶의 방식 전체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고자 하는 사랑의 응답이며,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시는 시간에 우리가 그 손을 붙잡는 신비로운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회개의 신학: 감정하시는 하나님과 테슈바의 신비>

테슈바(Teshuvah, 회개)는 많은 이들에게 죄인이 스스로 결단하고 방향을 바꾸는 신앙 행위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유대 랍비 전통과 예수님의 비유에 천착해 보면, 이 회개의 근원에는 인간의 결단보다 앞선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어진 자녀를 바라보는 자비의 눈으로 먼저 움직이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회심은 그분의 기다림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랍비 전승 속에서도 하나님은 단지 계명을 주고 심판을 내리는 분이 아닙니다. 예샤야 라바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볼 때조차 “옷자락이 눈물에 젖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 묘사는 무감각한 심판자 대신, 슬픔과 기대, 애통과 기다림이 뒤섞인 하나님의 감정적 실재를 드러냅니다. “내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밤마다 통곡한다”는 표현은 테슈바를 단순한 도덕적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재정의합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 역시 이 신정(神情) 신학을 가장 아름답게 펼쳐 보입니다. 아버지는 매일 길을 바라봅니다. 돌아온 아들이 아직도 멀리 있는데, 아버지는 그를 보고 먼저 달려 나갑니다. 그분은 자녀의 회개를 계산하거나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고백보다 앞선 포옹, 뉘우침보다 앞선 잔치. 이것이 복음의 테슈바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시며, 그 손을 내미십니다.

유대 전통에서도 이 사상은 깊습니다. 미드라쉬 호세아 라바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남편”, “속마음이 불붙듯 하는 분”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자를 향해 여전히 애타게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감정 없는 명령이 아니라, 찢긴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애정의 외침입니다. “돌아오라, 내 신부야!” 이는 법보다 깊고, 정의보다 오래된 사랑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테슈바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죄를 지은 아담에게 먼저 다가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단죄의 음성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애타게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테슈바는 이 하나님의 감정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회개는 추상적인 윤리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다림 속에 도달한 영혼의 귀향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테슈바는 “하나님께로의 귀환”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는 진실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울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셨고, 우리가 돌아서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길 위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회개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이지만, 그 길의 첫 걸음은 언제나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만난다. 눈물 젖은 옷자락의 하나님을.

<글을 맺으며>

테슈바는 단지 죄를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새롭게 바라보는 영적 각성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아가다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
그리고 더 깊이 들려준다.
“아버지는 지금도 길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계신다.”
잊음과 무관심의 시대 속에서, 회개는 기억의 회복이며, 사랑의 되살림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아버지의 발걸음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테슈바는 과거의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초청이며, 존재의 방향을 새롭게 재정렬하는 믿음의 응답입니다.
그것은 회개의 언어 너머에 있는 은혜의 목소리이며, 우리를 살리는 사랑의 부름입니다.

2025년 6월 4일 저녁에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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