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저널] “황색공포” 차이나 신드롬과 십자군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13) »
필자는 오래 전, 즉 유럽 국가 연합이 활성화되기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 초기 비자가 없을 때는 3개월마다 한번 씩 이웃나라로 나갔다가 들어오면 3개월 비자가 연장되는 시절이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국경은 옛 유고 연방 마케도니아 공화국이었다. 지금도 가장 가까운 국경이기도 하다. 국경에 가면 경찰들은 유고식 발음으로 우리 아이들 이름을 ‘주’라고 읽지 못하고 모두 ‘유’라고 발음했다. 당시 유치원생이던 막내는 그 국경 경찰을 향해 한국말로‘아빠, 저 아저씨 바보’라고 말하곤 했다. 알파벳 J를 그들식으로 ‘유’ 라고 발음하니 ‘주신’이 ‘유신’이 된 것으로 어린 아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슬래브 계통의 인종은 제이를 지읒 발음이 아닌 이응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슬라브계가 그렇게 잘하는 이응 발음을, 영어권에서 안 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이응이 안 되어서 예루살렘을 제루살렘 또는 요한이 안 되어 존이라고 표현하는 영어권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말은 참으로 좋은 말이라고 말하곤 가끔씩 웃었다.
사가(史家)들이 오래전부터 말하던 차이나 증후군과 황색공포 즉 엘로우 패닉이라는 의미를 이번 호에서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황색공포가 왜 십자군 운동과 연관되는가? 십자군 운동 본말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번은 살펴보아야 할 이야기이다.

훈족의 약탈을 그린 조르주 로슈그로스의 그림
왜 서양 사가들은 중국 사람들이 무섭다는 뜻의 차이나 신드롬(China Syndrome)과 황색공포,(Yellow Panic)를 말해왔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필자도 십자군 이야기에 중국 고대 역사를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시대 구분을 뛰어 넘어 십자군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는 변명 아래 이번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흉노족의 서(西)진과 훈족의 공포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혼란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중국은 마침내 진(秦)나라에 의해서 통일되었다. 몽염, 백기, 왕전이라는 장군들을 앞세워서 1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韓)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제(齊)나라까지 여섯 나라를 제압하여 전국을 통일시켰다. 이때가 기원전 230년이다.
정(政)이라는 이름을 가진 진나라의 왕은 이때부터 통일왕조의 시황제로 불렸다. 진시황은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한다. 중국을 36개 군으로 통일하고 정치를 단행하여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 집권적의 전제 군주제를 완성시킨 것이다. 각 지역의 저울과 사용하던 통화를 통일시킴으로서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구조를 닦아놓았다.
이렇게 중국은 통일시켰지만 북쪽 국경으로 흉노족의 침략이 빈발하자, 이를 징벌하고자 대장군 몽염과 30만 명을 출병시켜 흉노를 하남의 땅(오르도스 Ordos)밖으로 쫓아내고 아예 만리 나 되는 장성을 세워 침략을 막았다. 남쪽으로는 광시성(廣西省)에서 현재 베트남 북부까지 정벌하였다. 오늘날 중국을 영어로 China라고 불리는 것도 진나라의 Chine에 시작된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불리는 폭압의 정치를 실시하면서도, 자신은 불로장수(不老長壽)를 꿈꾸었지만, 그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한다. 진시황제의 죽음으로 진나라는 혼란의 구덩이 속으로 빠진다. 그동안 억눌린 민심이 폭발하여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완전히 정치와 통제력을 상실한 이 시기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오늘날 이 두 사람을 가리켜서 초한전쟁(楚漢戰爭)의 주인공이라 부르는 황우(項羽)와 유방(劉邦)이다. 초나라의 항우와 유방은 서로가 중국의 패권을 두고 5년에 걸쳐서 경쟁하게 된다. 항우는 각 지역의 권력자들이 세운 작은 나라들을 초나라 아래에 흡수시킨 후 봉건제를 실시한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분지를 나누어주고 반대로 변방의 땅을 분배하였기에 좋은 곳을 분배받지 못한 이들은 항상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다. 부하 장수들과 친인척들을 제후(諸侯)나 왕(王)으로 봉해 각지에 내보냈다.
오래 전에 장국영이라는 배우가 출연했던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영화의 이야기로 황후와 유방의 이야기를 마무리 했으면 한다. 필자는 ‘패왕별히’라는 영화를 여러 번 볼 정도로, 좋아 했다. 패왕별희는 사면초가와 함께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의 비극적인 죽음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데, 중국 전통 경극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초패왕 황우는 사면의 한나라 진영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한나라의 노래가 아닌 초나라의 노래인 것을 알고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 우희를 향해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가 패왕별희 이다.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내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으나
시세가 나빠져 애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야 우야 사랑하는 너를 어찌 하오리
이제 유방의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통일된 중국을 다시 통치한다. 이때가 기원전 206년이다. 중국의 글자는 한자(漢子), 중국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부르는 이유는, 한나라의 한 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중국 역사에 끼쳤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늠쇠인 것이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으로 중국 내의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할 때, 흉노는 장성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흉노의 우두머리는 묵돌 선우였다. 묵돌 선우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 때와 비슷한 시기이다. 묵돌 선우의 아버지는 두만 선우이다. 두만은 아들을 매우 싫어하여 아들이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고 한다.
흉노(匈奴)란 이름은 기원전 4~5세기부터 문헌에 등장한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등에 의하면 흉노는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존재한 유목국가이다. 기원전 209년 묵돌 선우(冒頓 單于)는 흉노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제국을 세웠다.. 김종래가 쓴 ‘유목민 이야기’에는 묵돌 선우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버지 두만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에 대해서 그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그의 활촉에 구멍을 내어 활을 쏘았을 때 화살에서 소리가 나는 명적(鳴鏑)을 만들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적을 따라 화살을 쏠 것을 명령했다. 자신의 화살을 따라 쏘지 않은 부하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자신이 아끼는 애마와 애첩을 차래로 쏘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두만 선우(頭曼 單于)를,,,
이 같이 냉혈한 전략가 묵돌 선우와 백등산 전투에서 한고조(漢高祖)유방은 포로가 될 뻔한 패배를 당한다. 유방은 묵돌 선우와 화친으로 오랫동안 공물을 보냄으로 불안전한 화평의 시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한나라 무제(유방의 손자)가 즉위한 이후, 한 무제는 기원전 139년 장건을 서역 월지국에 정탐을 보낸 후 한 무제는 실크로드를 개척한다.
이 길을 따라서 오르도스고원, 하서주랑, 고비 사막 방면으로 기원전 129년 대장군 위청과 곽거병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정벌하고 무위, 장액, 주천, 둔황에다 하서 4군을 세운다. 당시 한반도 고조선에 한사군을 세운 것처럼… .
서기 89년 한 나라를 적대하던 북 흉노가 멸망함으로써 220년간의 한나라와 흉노전쟁은 한 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흉노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부족들에게 몽골의 대초원을 물러 주어야했다. 남은 흉노들은 오르도스 지역의 소국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흉노족 중 일부는 서진한다.
이방인들에게 훈족으로 불러지는 이 종족은 워낙 사납게 게르만 지역을 공격하자, 게르만족들은 이들을 당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싸우기보다는 이들을 피해서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는 일이 벌어지고 결국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된다.
중국으로부터 쫓겨난 흉노족이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훈족이 되어 당시 현지인들이 느껴보지 못한 공포를 선사한 것이다. 어느 도시가 빼앗겼다는 전령보다, 훈족이 먼저 들어 닥치니 교부 어거스틴(Augustine)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서 이들의 출현은 지구의 종말이자,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기록했다.
고고학계와 사학계에선 흉노족은 몽골계가 아닌 튀르크계라는 학설이 지배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 유럽을 휩쓸었고, 게르만족의 민족 이동을 일으킨 아틸라의 훈족(Hun族)을 이 흉노와 같은 종족으로 보는 시각이 옛부터 통일되게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흉노족 언어의 계통은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파악이 안 된다. 다만 학자들은 튀르크어원이거나 몽골족 언어에 속했다고 여긴다. 당나라 이후 몽골 지역은 튀르크나 몽골 계통 민족이 거주했으므로 흉노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시대적으로도 흉노에서 훈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훈족이 흉노의 유민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다시 한 번 김종래의 ‘유목민 이야기’를 예를 든다면, 흉노의 지도자는 선우로 선우는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로 칭했다. 흉노 선우가 하늘의 아들이라 칭했듯이, 아틸라도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로 칭했다고 한다.
훈족의 유럽 침략을 역사가들과 유럽인들이 왜 황색 공포라고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칭기즈칸이 유럽에 심어준 공포
징~징~칭기즈칸 하늘의 별처럼 모두가 사랑하네. 또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땅따먹기 챔피언
징~징~칭기즈칸 내 작은 가슴에 용기를 주었네. 겁이 많은 내게 우허허허. 용기를 주었네 우허허허…
오래 전 서독의 그룹밴드 칭기즈칸이 불렀던 칭기즈칸의 노래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안 곡으로 한때는 많이 불러진 노래이기도 하다. 유럽인들이 이렇게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 것에 대해서 한 때 말이 많은 곡이기도 했다.
칭기즈칸은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한 군사, 정치 지도자이자 몽골 제국을 성립시키고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한 사람이다. 서양에서는 훈족 못지않게 몽골 인들을 서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 인물 중 한사람이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그가 침략을 하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를 인정하고 많은 도움을 허락했다. 그러나 저항 할 경우 그 옛날 로마인들처럼 아니 더 심하게 초토화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국가들은 칭기즈칸의 군대가 도착 전에 항복이냐 저항하다 죽음인가? 이 부분을 고민해야만 했다.
100,000개 정도의 인골로 탑을 쌓은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에서 벌인 살육으로 몽골군은 두려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런 만행을 저지른 몽골군이 우리나라에서 벌인 살육은 애교로 봐 줄 정도였다.
몽골이 멸망시킨 금나라와 한창 전쟁 중일 때, 몽골군은 중앙아시아의 강력한 제국인 호라즘과 조우한다. 1218년에 처음으로 양측의 군대가 만났다. 호라즘의 알라 웃딘 무함마드(Allah ud in Muhammad)샤(왕)는 제국 말기의 아바스 왕조를 대신하여 주변국들을 속국으로 삼을 정도로 강력한 나라였다. 몽골 내부에서 메르키트 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호라즘 국경까지 추격하여 전멸시킨다.
칭기즈칸은 메르키트(Merkit)족에 대해서는 메르키트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아내 보르테(Borte)를 납치하여 첫아들 주치를 낳았다. 장남 주치는 칭기즈칸의 아들이 아닌 메르키트의 아들이라는 상처를 죽을 때 까지 떠안고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메르키트 족과의 전투는 패배가 용납되지 않는 전투였다. 그 메르키트 추격전 끝에 만난 몽골과 호라즘 군대와의 대치는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았던 몽골군은 특유의 기마술로 호라즘 군대를 격파했다. 그 후 금나라와 전쟁 중이었기에 강대국 호라즘과의 전쟁은 불필요하다고 느낀 칭기즈 칸이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단 450명의 상인들을 보내게 된다.

오트라르 성의 유적지와 복원 중인 오트라트 성과 유적 터
호라산과 중국대륙을 이어주는 실크로드 교역 도시인 오트라르(Otrar)에서 이 도시의 영주인 이날축(Inalchuq)이 칭기즈칸의 사절 모두를 죽인다. 몽골군이 호라즘을 침공할 때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는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적의 적은 친구이기에)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한 후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를 잡기 위해 샤의 모든 영토를 취하게 된다, 도망가는 샤와 추격하는 몽골의 군대, 샤는 카스피 해의 작은 섬에서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기나긴 추격전은 끝을 맺는다.
칭기즈칸은 호라즘 원정 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한 서하를 침략하여 멸망시킨다. 그리고 아바스 왕조를 바그다드에서 멸망시킨다. 다만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만 점령 당하지 않았다. 1226년 여름 칭기즈칸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하던 중 사망한다. 몽골군은 이미 항복을 약속한 서하의 흥경(興京) 주민 대부분은 학살하고 만다,
몽골 내전과 십자군 상황
칭기즈칸의 사후 셋째 오고타이(Ögedei Khan)가 대 칸에 올랐다.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Batu)는 자신의 아버지 주치를, 칸의 계승전인 쿠릴타이(Yeke Quriltai)에서, 항상 주치의 칭기즈칸의 친자 여부를 물고 들어진 작은 아버지 차가타이(Chagatai Khanate)와 그의 후손들에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2대 칸 오고타이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나쁜 감정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236년 2차 유럽 원정길에서 오고타이의 아들 귀위크(Guiweek)가 자신이 大 칸의 아들임을 내세워, 바투를 무시하는 여러 일들로 인해서, 바투는 大칸 오고타이마저 미워하게 된다.
1253년 2대 大칸 오고타이는 바투에게 키예프 루스國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결국 키예프와 루스의 군대를 몽골군이 격파한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불가 강(江)까지 점령을 한 군대는 헝가리 왕국과 모히 평원의 셔요강(江)가에서 몽골 장군 수부타이(Sübegedei)와 바투의 몽골 군대는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 벨러 4세(Beller IV)의 헝가리 군대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다.

레그니차에서 몽골 군과 폴란드 군과의 전투
바투의 군대는 킵차크(Kipchak Khanate)와 알란(Alani)을 침략하여 크림 반도전역을 점령했다. 바투는 폴란드마저 침공한다. 몽골군의 빠른 공격에 유럽의 국가들은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마저도 공포에 떨며 피난민들은 몽골군을 피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신성 로마제국의 모태인 합스부르크(Haus Habsburg)가문의 수도인 비엔나 공격을 앞두고 비엔나와 신성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은 패닉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포의 대상이었던 몽골의 군대가 홀연히 동쪽으로 사라진 것이다.
1242년 늦은 봄에 바투는 자신의 주력부대인 마자르(Magyar)인 군대와 폴란드(Polish)와 킵차크(Kipchak)인 부대 그리고 투르크(Turkish)인 부대를 이끌고 카라코룸(Karakorum)의 그레이트 쿠랄(Great Kural)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이 대 칸이 되기를 원했다.
앞서 말했듯이 바투의 군대는 현지에서 조달된 용병의 가까운 군대였기에 몽고에는 바투의 지지자가 적었다. 몽고제국의 총리인 퇴레게네 카툰(Töregene Khatun)이 있는 한 바투가 大칸의 지위에 오를 수 없을 깨닫자, 그는 그의 본영으로 돌아간다. 바투는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大칸에 귀위크가 오르자 새로운 大칸 귀위크가 주관하는 모든 쿠릴타이 모임에는 거부의사와 함께 불참을 하게 된다.
대신 본국 몽골과는 관계를 줄이는 대신 자신의 다스리는 영토인 킵차크에만 온 신경을 쏫아, 다스리기 시작했다. 1248년 4월 3대 칸 귀위크가 서쪽으로 이동 하던 중 오늘날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사망한다. 사인은 그의 아버지 오고타이와 마찬가지로 술 중독으로 젊어서 둘 다 죽은 것이다. 바투는 자신의 사촌 몽케를 추대하여 4대 칸으로 옹립시켰다. 몽케는 자신의 4대 칸의 즉위를 도운 바투에게 킵차크 칸국의 자치를 허용해 주었다. 할아버지 칭기즈칸의 잔인함을 빼다 밖은 바투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몽골인의 침략이 한창일 때 유라시아 지역에서 몽골인들에 대한 공포의 소식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확대되어 몽골인들은 유대인이며, 다윗의 재림을 앞두고 자신들을 학살한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유럽인들은 위기가 닥쳐오면 죄를 전가할 희생양적인 반유대주의인 안티 세미즘(Anti-semitic)까지 등장한 것이다.
바투와 그의 장남 사르타크(Sartaq)가 짧은 간격으로 죽자 바투의 동생 베르케(Berke Khan)가 1257년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되었다. 베르케는 킵차크 칸국을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바투와도 전혀 다른 정치를 펼쳤고, 이슬람을 받아드려 그는 1252년 이슬람교로 개종한다.
그러나 대 칸 몽케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훌라구(Hūlākū Khān)가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인 알 무스타심(Al mustasim)을 죽임으로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자 그는 분노에 못이겨 홀라구가 세운 일 칸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내전에 돌입하자, 차가타이 칸국, 오고타이 칸국 역시 내전에 참전 하면서 몽골 제국은 흔들리게 된다. (칭기즈칸의 이야기와 그의 후손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려고 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중국사람 무서워’, 즉 차이나 신드롬 또는 황색 공포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이다.) 이 정도면 황색 공포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피부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돌궐의 서진
터키인의 조상 돌궐(突厥)족은 고구려의 이웃에서 살아왔다. 중국의 수양제는 돌궐의 칸인 계민가칸(啓民可汗)의 막사를 방문 중에 칸의 막사에 고구려의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와 돌궐이 동맹을 맺는다면 아무리 강한 수나라도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모여진 끝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게 되었다고 한다.
돌궐족은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긴 강인 예니사이 江 상류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이들이 오늘 우랄알타이 산맥의 남부로 이주한 것은 흉노들을 대신하여 초원 지역에서 유목을 하던 유연(柔然)이 이들을 노예로 삼은 것이다. 강제로 자신들을 위해서 알타이 산맥에서 나오는 철(鐵)을 제련시키기 위해서였다. 철을 제련하던 노예들인, 단노(锻奴)들이 몽골 영토에 있던 유연을 정복하고 552년 나라를 세웠는데 돌궐 칸 국이다.

1. 티무르의 무덤인 구르 에 아미르. 2. 티무르 및 사파비 왕조 양식 건물에서 자주 보이는, 태양을 이고 있는 호랑이 문양. 3. 샤히 진다 영묘의 타일. 4. 바이바르스는 영토 곳곳에 자신의 상징인 표범 무늬를 새겼다. 사진은 예루살렘 사자의 문이다
지금 이란의 카스피 해에서 동쪽은 동 만주 지역인 요동의 요하 상류까지이다. 즉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중앙 아시아에서부터 한반도의 북부지역까지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수(隋)나라 시대에 돌궐은 동서 돌궐로 나누어진다. 동돌궐은 630년 중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당나라에 의하여 사라진다. 그 옛날 한나라에 의해 사라진 흉노처럼, 일부는 대조영의 발해로 흡수되었다.
서돌궐은 해를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지역에 셀죽 튀르크와 오스만 튀르크로 역사에 재등장한다. 터키민족은 돌궐인과 소아시아 및 근동의 원주민이 장기간 융합하여 이루어졌다. 셀죽 투르크족이 아나톨리아에서 성장하게된 것은 아바스 왕조의 말기가 되면서 쇠약한 국력을 대신하여 싸워줄 군대가 필요했고, 시아파 파티마 조와의 싸움에 동원된 군대가 셀죽 투르크족이었다.
칼라파는 한 명이기에 투르크인에게는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술탄(Sultan)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허약한 아바스 왕조를 대신하여 군대, 정치 실질적으로 모든 정치는 튀르크인 들이 가진 반면에 종교적 권위만 아바스가 가진 형태의 상황이 되었다.
셀죽 튀르크는 콘야(Konya) 성경에 나오는 이고니온에 수도를 세웠다. 이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성지 순례를 금지하자 십자군 운동의 원인을 제공한다. 잘 나가던 셀죽 투르크 왕조가 멸망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칭기즈칸의 손자의 침입으로 인해서 아바스 왕조와 함께 멸망당하고 만다.
셀죽 튀르크의 전위부대로 십자군 전쟁에서 한 이름을 떨친 오스만은 이스탄불 남쪽의 부르사(Bursa)에 수도를 세웠다. 일한(Ilhan)튀르크와 오스만(Osman)튀르크가 튀르크왕조의 쟁탈전 끝에 십자군 전쟁에서 공로를 인정받은 오스만튀르크가 왕조를 열게 된다. 오스만 튀르크는 십자군 전쟁의 승리와 함께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1453년 멸망시킨다.
역사가들이 동서 로마 제국의 멸망은 중국의 변방에서 일어난 흉노와 돌궐의 추방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면서 강력했던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에서 오늘날 차이나 신드롬과 황색 공포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흉노와 훈, 돌궐과 튀르크라는 말들이 나온 이유도 같은 맥락인 것을… 이제 십자군 이야기가 본말로 나와야 할 것 같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표지 사진/ 티무르가 정성으로 건축한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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