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본향, 그리고 문명의 이야기-26

집: 단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울림은 깊고 넓습니다. 누구에게나 집은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없는 이에게는 머물 곳이 사라지고, 마음 둘 자리조차 사라집니다.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의 압축된 상징입니다. 지붕은 하늘을 가려주고, 마당은 땅을 열어주며, 벽은 안과 밖을 구분하면서도 이어줍니다. 집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작은 우주이자,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가장 친밀한 그릇입니다.

[영성계발] 집과 본향, 그리고 문명의 이야기-26 » 부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영혼의 초상 » Home, Homeland, and the Story of Civilization » Subtitle: A Portrait of Nature, Humanity, and the Soul »

“집은 몸을 덮는 지붕에서 시작해, 기억을 저장하는 그릇이 되었고, 오늘은 삶·도시·기술을 매개하는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서구의 house가 질서와 직선으로 세계를 길들이려 했다면, home은 그 틀 안에서 관계·기억·기도로 공간을 다시 살린 이름이다.”
“건축가는 집을 설계하지만, 거주가 그 집을 완성한다.”

Contents

<글을 시작하면서: 집에서 본향으로>

베낭 하나 메고 세계를 떠돌던 나그네, 그는 끝내 멈추어 서서 돌아갈 집을 그리워합니다. 기나긴 전도 길 위에서 지치고 상한 전도자의 꿈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분주한 노동을 마친 소시민이 바라는 소망도 그렇습니다. “빨리 집에 가 쉬고 싶다.” 이 소박한 고백 속에는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도 보편적인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일주일의 바쁜 일과가 지나면, 주말에 집에서 늦잠을 자고, 게으름도 부리며, 가족과 함께하는 단란한 시간이 곧 최고의 위로가 됩니다.

집.
단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울림은 깊고 넓습니다. 누구에게나 집은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없는 이에게는 머물 곳이 사라지고, 마음 둘 자리조차 사라집니다.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의 압축된 상징입니다. 지붕은 하늘을 가려주고, 마당은 땅을 열어주며, 벽은 안과 밖을 구분하면서도 이어줍니다. 집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작은 우주이자,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가장 친밀한 그릇입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를 다시 읽어 보면, 그것은 곧 집의 발전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럽의 석조건축, 미국의 목조건축, 한국의 한옥과 아파트는 단순한 양식의 차이가 아니라, 각기 다른 지형과 기후, 그리고 세계관이 집을 통해 드러난 결과입니다.

이 글은 집을 통해 자연과 문명이 어떻게 대화하며 서로를 비추어 왔는지, 그 긴 여정을 살펴보려는 작은 시도입니다.

<집, 언어와 세계관의 거울>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일까요?
한글에는 그저 “집”이라는 단어 하나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에는 스무 가지가 넘는 글자가 쓰입니다.
우리가 가장 익숙한 家(가)는 단순한 건물을 넘어 가문과 혈통, 가계의 연속성을 뜻합니다.

屋(옥)은 지붕이 있는 실제적 거처를,
宅(택)은 사람이 머무는 땅과 삶의 터전을,
堂(당)은 모임이 이루어지고 권위가 서는 공간을 나타냅니다.
한문에서는 이처럼 각기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지닌 여러 글자가 쓰이지만, 한글에서는 모두 하나의 단어—집—으로 표현됩니다. 집가, 집옥, 집택, 그리고 집당은 모두 집을 표현합니다. 이는 곧, 한국어의 “집”이 물리적 공간을 넘어 관계, 기억, 공동체, 그리고 권위와 정체성까지 포괄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동양의 언어에서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관계와 질서, 공동체와 역사를 아우르는 풍경입니다. 한국어의 ‘집’에 대하여 아래에서 좀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어에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House와 Home.
우리는 Sweet Home이라 노래하지만, 결코 Sweet House라 부르지 않습니다.
House는 돌과 벽,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눈에 보이는 구조물입니다.
그러나 Home은 그 안에 깃든 사람들, 추억, 사랑, 그리고 소속감을 담은 내적 공간입니다. 그래서 “go home”은 가능하지만 “go house”는 불가능합니다.

언어마다 이 구별은 다르게 나타납니다. 히브리어 בית (Beit) 은 집일 뿐 아니라 성소, 민족 공동체, 심지어 하나님의 집(성전)까지 뜻합니다. 베들레헴(Bethlehem)은 “떡집” 또는 “빵집”, 벧엘(Bethel)은 “하나님의 집”이지요. 히브리어에서 집은 곧 거룩한 만남의 장소입니다.

라틴어 domus는 단순한 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사회에서 귀족과 상류층의 저택(villa urbana)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파생된 dominus는 “집의 주인, 지배자”를 의미하며, 나아가 “주, 주권자”라는 뜻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또 dominium은 지배·소유권을 뜻하며, 특정한 공간과 그 안의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권력적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오늘날 영어의 landlord와도 연결됩니다. landlord가 “땅과 집을 소유한 사람”을 뜻하듯, 라틴 사회에서 dominus는 단순히 집의 주인이 아니라, 집과 그에 속한 가족·노예·재산을 지배하는 권위자였습니다. 따라서 로마에서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권력과 질서, 사회적 위계의 상징이었습니다. Domus는 개인의 공간을 넘어 정치적·사회적 권력 구조를 드러내는 건축적 표현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로마적 건축과 언어가 가지는 깊은 함의입니다.

독일어는 영어와 마찬가지로 집을 가리키는 단어를 둘로 구분합니다. Haus는 지붕과 벽, 창과 문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건물을 뜻합니다. 반면 Heim은 “머무는 곳, 귀속의 자리”라는 정서적·내적 의미를 지닙니다. 더 나아가 Heimat는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고향, 조국, 정체성과 뿌리까지 품어냅니다. 그래서 독일어에서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곧 정체성과 기억의 근원이 됩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내적 좌표이자 정신적 고향인 것입니다.

영어 역시 게르만어족의 언어이기에, 중세 영어 시기에는 독일어와 마찬가지로 Haus와 Heim에 해당하는 단어가 함께 쓰였습니다. 실제로 고대 영어(Old English)에는 hūs가 건물(haus)로, hām이 고향·소속(home)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hūs는 오늘날의 house, hām은 home으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영어의 house와 home 구별은 독일어 Haus와 Heim/Heimat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며, 두 언어 모두 “집”을 물리적 공간과 정서적 귀속으로 이중화해 표현하는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각 언어 속의 “집”은 그 민족의 세계관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동양의 집은 공동체와 가문, 영어권의 집은 외형과 내면의 구별, 히브리어의 집은 거룩한 만남, 라틴어의 집은 권력, 독일어의 집은 귀속과 정체성— 모두가 다르면서도 하나의 진실을 말합니다. 집은 벽돌이나 기와로만 세워지지 않습니다. 집은 사랑과 기억으로 세워지고, 그 속에 역사와 신앙이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초상이며, 언어와 세계관이 빚어낸 삶의 시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을 나타내는 정서의 차이>

서양 문화권에서 House와 Home의 차이는 일상과 언어의 깊은 곳에서 자주 드러납니다. House는 벽과 기둥, 지붕으로 세워진 물리적 건물을 뜻합니다. 주소와 부동산 가치로 환산되는 대상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집을 샀다(buy a house)”라고 하지, “집을 샀다(buy a home)”라고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Home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감정적이고 영적인 귀속의 자리입니다. 안전과 휴식, 사랑과 가족의 관계가 깃드는 내적 공간입니다. “Sweet Home”이라는 말이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사랑과 정서가 깃든 삶의 공간을 가리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국어의 “집”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간다”라는 표현 속에는 House와 Home의 의미가 모두 녹아 있습니다. 물리적 거처이면서 동시에 가족과 정서의 공간이 함께 담기지요. 그러나 영어의 의식 구조 속에서는 House와 Home이 철저히 분리됩니다. 하나는 외형적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 문학적 사례
영국 시인 토머스 후드(Thomas Hood)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Mid pleasures and palaces though we may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궁궐과 즐거움 속을 헤매더라도, 아무리 초라해도 집만 한 곳은 없다.)
여기서 home은 결코 궁궐이나 화려한 건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 철학적 성찰
하이데거(M. Heidegger)는 “거주함(Wohnen)”을 인간 존재의 근본 방식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집이라는 건물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뿌리내려 사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House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주거지만, Home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과 의미를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 문화적 차이
영어권권에서는 House와 Home을 명확히 나누어, 물리적 소유와 정서적 귀속을 구분합니다. 이는 개인주의적 문화 속에서 소유와 정체성을 분리해 사고하는 구조와 닿아 있습니다.

한국어의 “집”이라는 단어 하나에 물리적·정서적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한국 문화가 전통적으로 관계적 공동체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어에서는 Haus(건물)와 Heim(귀속), Heimat(고향·정체성)까지 구분되어, 집이 곧 존재와 뿌리의 근원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집을 뜻하는 단어는 단순히 건축물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창문입니다. 영어에서 House와 Home의 분리는, 집을 물리적 구조와 정서적 귀속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의식 구조를 보여줍니다. 반면 한국어의 “집”은 이 두 차원을 아우르며, 유럽 대륙의 언어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를 분화시킵니다. 결국, 집은 단순히 우리가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지를 드러내는 존재의 초상입니다.

• 세계관적 차이
영어권 문화에서 house는 공간적·외형적 개념이고, home은 정체성과 소속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house는 ‘그곳’(place), home은 ‘나의 곳’(belonging)입니다. 그래서 “house”는 사람이 떠나도 남지만, “home”은 사람이 떠나면 사라집니다.

• 신학적·성경적 연관성
성경 히브리어 בית (Beit) 은 물리적 집을 뜻할 뿐 아니라, 가문·공동체·성전까지 포함합니다. 이는 영어의 home과 더 가까운 개념입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요 14:2)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집(house)”은 단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거처 (home) 를 의미합니다. 영어처럼 house / home을 구분하는 언어는 드뭅니다.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서는 “집”이라는 단어가 물리적 건물과 정서적 귀속·가정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다만, 언어마다 “가정(가족)”을 표현하는 별도의 단어를 두어 영어 home과 비슷한 의미를 보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요 언어들을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유럽 언어 속의 “집”>

언어마다 “집”을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언어는 물리적 건물과 정서적 귀속을 한 단어로 아우르지만, 어떤 언어는 이 둘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1. 프랑스어 (French)
프랑스어에서 maison은 집을 뜻하는 기본 단어로, house와 home의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 C’est ma maison. → “이것은 내 집이다.” (물리적 건물이면서 동시에 가정).
또 다른 단어 foyer는 본래 ‘벽난로’를 뜻하지만, 점차 ‘가정, 따뜻한 가정적 분위기’라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영어의 hearth와 비슷합니다. 따라서 maison은 건물과 가정을 모두 가리키고, foyer는 특히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귀속을 강조합니다.

2. 스페인어 (Spanish)
스페인어에서 casa는 기본적으로 집을 의미하며, house와 home을 모두 포함합니다.

• Voy a casa. → “집에 간다.” (물리적 집이 아니라 home의 뉘앙스).
또 다른 단어 hogar는 ‘벽난로’에서 유래하여, ‘가정, 따뜻한 집’을 의미합니다.

• Mi hogar es donde está mi familia. → “내 집은 가족이 있는 곳이다.”

3. 이탈리아어 (Italian)
이탈리아어에서도 casa가 집을 뜻하며, house와 home의 의미를 동시에 담습니다.

• Andare a casa → “집에 가다” (go home).
또한 focolare는 ‘벽난로, 난로’를 뜻하는데, 상징적으로는 ‘가정’을 의미합니다. 가톨릭 운동인 Movimento del Focolare(‘가정 공동체 운동’)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4. 독일어 (German)
독일어는 영어처럼 물리적 집과 정서적 귀속을 뚜렷하게 구분합니다.

• Haus = 건물 (house).
• Heim = 귀속, 고향 (home의 의미).
• Heimat = 고향, 뿌리, 정체성.
• Zuhause = 내가 속한 곳, 집 (home에 가장 가까운 표현).
따라서 독일어에서는 Haus / Heim(Zuhause)의 구분이 매우 명확합니다.

5. 러시아어 (Russian)
러시아어에서 дом (dom)은 집을 뜻하며, house와 home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집니다.

• Я иду домой (ya idu domoy). → “나는 집에 간다.” (go home).
그러나 home의 정서적 의미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다른 단어들이 함께 쓰입니다.
• семья (sem’ya) = 가족 → 가정 개념 보완.
• родина (rodina) = 고향, 조국 → 정체성과 소속을 강조.

정리하자면, 라틴계 언어(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는 한 단어(casa, maison)로 house와 home을 함께 표현하면서, ‘벽난로(foyer, hogar, focolare)’와 같은 단어를 통해 정서적 home을 강조합니다.

독일어와 영어는 두 단어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건물과 정체성을 나누어 표현합니다. 러시아어는 дом(dom) 하나로 대부분을 아우르지만, ‘가족(семья), 고향(родина)’ 같은 단어로 home의 깊이를 보완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집>

그렇다면 유대인은 집을 어떻게 부를까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Beit, Beth, Bayit이라고 부릅니다. 빵집이라고 불리는 베들레헴도,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부르는 Beth Isreal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בית (Beit, Beth, Bayit) 은 “집, 집안, 가문, 성소, 공동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유대인 전통과 지명, 기관 이름에 자주 붙습니다. 성경과 유대 전통,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예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을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 속 지명

Bethlehem (베들레헴, בית לחם)은 ‘떡집, 빵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유명합니다. (lehem = 빵)
Bethel (벧엘, בית אל)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꿈을 꾸었던 곳입니다 (창세기 28:19).
Bethany (베다니, בית עניה)는 ‘가난한 자의 집’ 혹은 ‘무화과의 집’으로 해석됩니다. 예루살렘 근처,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마을입니다.
Bethsaida (벳새다, בית צידה)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 갈릴리 근처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Bethphage (벳바게, בית פגי)는 ‘풋감나무 집’이라는 뜻. 예루살렘 근처,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언급됩니다.

2. 종교적 장소

Beth Israel (בית ישראל)은‘이스라엘의 집’. 전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회당, 병원, 기관의 이름입니다.
Beth Shalom (בית שלום)은 ‘평화의 집’. 교회나 유대인 회당 이름으로 많이 쓰입니다.
Beth Midrash (בית מדרש)는 ‘공부하는 집’을 뜻하며 동시에 학교를 의미합니다. 랍비들이 성경과 탈무드를 연구하는 곳입니다.
Beth Knesset (בית כנסת)는 ‘모임의 집’. 오늘날의 회당(시나고그, Synagogue)을 가리킵니다.
Beth Din (בית דין)으로 ‘법의 집’. 유대교 법정입니다.

3. 현대적 사용

유대인 병원 이름 가운데 Mount Sinai Beth Israel Hospital (뉴욕)이 있습니다.
교회와 회당 이름으로는 Beth Emmanuel, Beth El Synagogue, Beth Shalom Church 등이 있습니다.

교육기관으로는 Beth Rivkah (여학생 학교), Beth Jacob (남학생 학교)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Beth/Bei는 단순히 집을 뜻할 뿐 아니라, 하나님, 공동체, 법, 공부, 평화 등 다양한 신앙적·사회적 개념과 결합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집’을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는 집>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니라, 문화, 철학, 역사, 자연관이 고스란히 반영된 공간이기 때문에 유럽, 미국, 한국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곧 세계관의 차이를 탐구하는 일이 됩니다.

1. 유럽의 집 철학: 건축, 규격, 그리고 Home

• 로마 제국의 유산
로마 건축은 질서, 규격, 영속성을 중시했습니다. Domus (도무스: 귀족 저택), Villa (전원 주택), Insula (아파트) 모두 돌·벽돌·대리석으로 튼튼히 지어졌습니다.
철학적 배경을 살펴보면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질서를 부여하며, “영원한 제국”을 표현하려는 건축관이 서려 있습니다.

• 중세와 르네상스
중세에는 성곽과 교회가 중심: 집은 안전과 보호를 상징합니다. 르네상스 이후 “집=가문의 영속성”이 강조되어, 집은 곧 혈통과 신분의 상징이 됩니다.

• 정서적 Home
유럽의 stone house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familiaritas (가족 공동체)”와 “patria (조국, 뿌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집이 곧 뿌리, 정체성, 역사적 연속성을 담고 있습니다.

2. 미국의 집 철학: 이동성, 실용성, 자연과의 화해

미국 초기 유럽인들은 새로운 땅에 정착한 개척민들이었습니다. 북미 대륙에는 삼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지만, 유럽처럼 집을 짓기에 적합한 돌이나 벽돌은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집은 돌이 아니라 목재 중심의 건축으로 발달했고, 구조는 이동과 해체가 용이하게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집의 형태는 단순한 재료의 문제를 넘어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집이 영속성과 전통을 상징했다면, 미국의 집은 새로운 개척지에서의 개인적 자유, 이동성, 실용성을 담아냈습니다. 미국인의 눈에 집은 자연을 정복하는 요새라기보다, 넓은 자연 속에 세워져 그 일부가 되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 Home, 미국인의 심리적 풍경
영국에서 “집”은 혈통과 역사, 계급과 소유의 연속성을 의미했습니다. “My home is my castle”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집은 방어와 권위, 물리적 공간의 확장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달랐습니다. 이주민에게는 오래된 가문의 성도, 세습되는 대저택도 없었습니다. 대신 개인의 꿈, 자유, 가족의 행복이 새로운 세계에서의 집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Sweet Home”이라는 정서적이고 가정적인 개념이 발달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푸른 잔디 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유토피아적 공간이었습니다.

• 문학적 울림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월든(Walden)》에서 숲 속 오두막을 짓고 살며, 자연 속의 삶이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준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곧 미국적 Home의 상징이 되었고, 유럽의 성곽과 대저택과는 전혀 다른 미학을 보여줍니다.

• 심리학적 의미
심리학적으로 볼 때, 미국인의 home은 뿌리보다도 꿈과 가능성의 투영입니다. “집”은 과거의 연속성보다는 미래를 향한 자기실현의 무대로 이해됩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주거 문화는 “영속성”보다 “변화 가능성”을 중시하고, 언제든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이동성의 자유를 강조합니다. 영국의 집은 역사와 계급, 성곽과 권위를 품었지만, 미국의 집은 자유와 개척, 그리고 가족의 행복을 상징합니다. 하나는 과거의 연속성을 지키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공간입니다. 미국의 집은 결국, 나무로 지어진 임시성 속에 자유와 꿈을 담아낸 영혼의 거처라 할 수 있습니다.

유럽 vs 미국의 집 구조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유럽: 석조·벽돌 중심, 오랜 세월을 견딤, 집=정체성·역사·뿌리.
• 미국: 목조 중심, 재건축과 이동이 쉬움, 집=자유·실용·개인의 꿈.
• 비유: 유럽의 집은 나무의 뿌리, 미국의 집은 나무 위의 둥지에 가깝습니다.

한국의 집 철학에는 자연과의 조화, 관계 중심이 스며 있습니다. 집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풍수지리, 자연의 기운, 계절의 흐름 속에서 지어졌습니다. 마당 중심 구조는 집은 벽이 아니라 관계와 흐름으로 정의됩니다. 한옥은 땅과 하늘(천지)의 호흡 속에 앉혀진 건축물로서,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는 삶의 터전입니다. 유럽처럼 “영속성”보다, 미국처럼 “이동성”보다, 한국은 조화와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가족·이웃·자연과의 어울림 속에서 집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인식됩니다.

<유럽과 미국의 집>

저는 유럽에 존재하는 나라들 가운데 단 한 곳도 빠짐없이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그 여정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각 나라의 주택 구조와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남부 유럽의 집들은 햇빛과 바다를 담아내듯 밝은 색으로 단장되어 있었고, 창과 발코니는 활짝 열려 바람과 햇살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지녔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흰색 마을은 태양을 품으면서도 빛을 반사하는, 생명력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반대로 동부와 북부 유럽은 거센 추위와 비로부터 몸을 지켜야 했기에 두꺼운 벽과 좁은 창, 급경사의 지붕을 가진 집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독일의 집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흔적처럼 더욱 견고하고 엄정했습니다. 그 속에는 무너진 것을 새롭게 세워낸 회복의 정신과 근면함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차이를 넘어 유럽의 집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집들이 중세 도시 구조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교회와 광장을 중심으로 집들이 모여 있습니다. 좁은 골목과 자갈길, 그리고 마을을 지키는 성(城)은 유럽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입니다. 집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국가로 이어지는 확장 구조는 단순한 공간 배치가 아니라, 역사적 연속성과 공동체의 기억을 드러내는 표식이었습니다.

미국의 집은 유럽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주민들이 풍부한 나무로 지은 목조 단독 주택은 넓은 땅 위에 자유롭게 세워졌습니다. 중세 성곽도, 구불구불한 골목도 없고, 대신 자동차를 위한 넓은 도로가 도시를 관통합니다. 집은 공동체적 영속성보다 개인의 이동성과 자유를 상징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미국적인 삶의 방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결국 유럽의 집과 마을은 역사와 공동체의 연속성을, 미국의 집은 자유와 개척의 상징을, 그리고 한국의 집은 자연과 관계의 조화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삶의 철학이 담긴 차이입니다.

<유럽의 건축 발전>

유럽의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역마다 달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건축 언어를 공유합니다. 남유럽은 햇빛을 품어 개방적이고, 북유럽은 추위를 막아내려 두텁고, 동유럽은 전쟁의 흔적을 이겨내어 견고하지만, 그 모두는 로마 제국이 남긴 건축 기술과 철학 위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로마는 유럽 건축의 모체였습니다. 돌과 벽돌, 석회 기반의 콘크리트를 재료로 삼고, 아치와 볼트, 돔, 수도교, 원형극장과 같은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포럼과 바실리카, 목욕장 같은 대규모 공공 건축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권력과 질서를 상징했습니다. 로마의 건축 지식은 제국이 무너진 후에도 수도원과 길드, 장인들의 전승을 통해 중세 전역으로 이어졌습니다.

중세의 건축은 성벽과 좁은 골목, 광장을 중심으로 집들이 밀집한 도시 구조를 낳았습니다. 웅장한 대성당과 교회, 시청과 성곽, 분수대와 궁전, 그리고 정원은 모두 공동체의 중심이었고,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이어지는 양식의 변화는 신앙과 권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시대였습니다. 고대 로마의 비례와 대칭, 조화를 되살려 팔라초와 빌라를 세웠습니다. 이어진 바로크 시대에는 권력과 교회의 장엄함이 건축 속에 과시되었습니다. 곡선과 웅장한 규모, 역동적인 공간은 권력의 미학을 드러냈습니다.

18세기의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을 재해석하여 균형과 기둥, 삼각 박공을 강조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철과 유리, 콘크리트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며 도시 주택은 규격화되고 아파트 구조가 등장했습니다. 19세기 말의 아르누보는 자연주의와 곡선을 살린 장식미로 도시를 물들였고, 20세기의 현대 건축은 기능주의와 미니멀리즘으로 나아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새로운 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든 흐름 속에서 유럽의 건축적 통일성을 지탱한 보이지 않는 힘은 **석공 길드(Mason Guild)**였습니다. 로마 시대의 장인 조직은 중세에 프리메이슨으로 발전했고, 석재 가공과 아치·돔·대성당 건축의 지식을 독점적으로 보관했습니다. 이들은 글로 남기기보다 상징과 비밀 전승을 통해 지식을 이어갔고, 도제와 장인의 체계 속에서 건축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상징적 행위로 전해졌습니다.

유럽의 집과 도시가 지역마다 다르게 보이면서도 근본적으로 비슷한 이유는, 로마 건축의 공통된 유산과 길드를 통한 지식 전승, 그리고 중세 이후 공유된 도시 구조와 양식 때문입니다. 로마의 기술 이후, 중세의 성곽과 대성당에는 어김없이 , 로마네스크(두꺼운 벽, 반원 아치)양식이 주도적이었다가 이후에 고딕(첨두 아치, 스테인드글라스, 높은 첨탑) 양식으로 바뀝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는 건축은 인간과 권력의 미학으로 승화(?) 시켰습니다. 르네상스 (15–16세기)는 고대 로마의 비례, 대칭, 조화를 부활. 인간 중심, 인문주의의 건축 (팔라초, 빌라)을 추구했습니다. 바로크 (17세기) 시대는권력과 교회의 장엄함을 과시했습니다. 곡선, 웅장한 규모, 역동적 공간으로 표출했습니다. 바로크의 미학, 근대 이후의 새로운 재료와 기능주의적 건축, 그리고 길드의 지식 전승이 모두 어우러져 유럽의 건축을 만들었습니다.

바로크 이후 신고전주의와 근대 건축은 클래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클래식 / 신고전주의 (18세기)는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의 재해석 했습니다. 기둥, 삼각 박공, 균형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19세기 이후에는 산업혁명으로 철과 유리, 콘크리트 사용 확대하게 됩니다. 도시 주택이 규격화, 아파트 구조 등장합니다. 이후 19세기 말 등장한 아르누보 (Art Nouveau)는 새로운 예술(말 그대로)로서 곡선과 자연주의, 장식미을 강조하게 됩니다. 20세기와 21세기의 현대 건축 (20세기)은 기능주의, 미니멀리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럽의 집과 건축은 시대마다 정치적 권력, 철학적 사조, 기술적 혁신을 반영하며 변화했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집은 단순히 머무는 거처가 아니라, 지형과 기후, 역사와 제국, 교회와 철학, 예술과 장인의 비밀스러운 지식이 결합된 공간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건축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도시에서 반복되는 건축의 얼굴>

저는 유럽의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면서 한 가지 공통된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 기후와 풍경은 다르지만, 도시를 걸을 때 마주하는 건축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1. 유럽: 건물 하나가 작품이며, 도시 전체가 조화

유럽의 건축은 단순히 거주 공간이 아니라, 역사의 층위와 예술적 조화가 한눈에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 로마 시대: 아치, 돔, 원형극장, 콘크리트의 발명은 유럽 건축의 뼈대를 제공했습니다.
• 중세: 성곽도시, 고딕 성당, 시청사와 광장은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고, 길드(guild)와 석공 장인들의 축적된 기술은 건물마다 정교함을 더했습니다.
• 르네상스와 바로크: 비례·조화, 인간 중심의 미학, 권력과 교회의 장엄함이 도시 전경에 새겨졌습니다.
• 근대~현대: 신고전주의의 균형미, 아르누보의 장식미, 모더니즘의 기능주의가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면서도 도시의 맥락 안에서 조화롭게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 도시를 거닐면, “건물 하나하나가 작품”이고, 동시에 도시 전체가 하나의 교향곡처럼 어우러지는 장관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수백 년간 이어진 건축 규제, 미학적 전통, 길드와 아카데미의 지식 전승 덕분입니다.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신고전주의, 아르누보 등 시대마다 다른 건축 사조들이 서로 교차하거나, 특정 시대 양식이 특히 강조되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왜 유럽의 도시들은 서로 달라 보이면서도 결국 비슷한 미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배경에는 석공 길드(Mason Guild)라는 공통된 토대가 있습니다. 그 기원은 로마 제국의 장인 조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로마가 남긴 아치와 돔, 콘크리트와 석조 기술은 단순한 건축적 성취가 아니라, 지식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수한 장인 집단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조직은 중세에 들어서면서 프리메이슨(Free Masons)이라는 전문 길드로 발전했고, 길드는 석재 가공과 대성당 건축의 지식을 독점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전승 방식 또한 독특했습니다. 지식은 글로 남기기보다 도제–장인–석수장으로 이어지는 교육 체계를 통해, 비밀스럽게 상징과 의식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 훈련이 아니라, 건축을 하나의 성스러운 행위로 여겼던 당시의 철학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돌을 다듬고, 아치를 세우고, 돔을 완성하는 일은 곧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이 길드적 전승은 유럽 전역에 공통된 건축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로마네스크의 두터운 벽과 반원 아치, 고딕의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바로크의 웅장한 곡선과 장식, 신고전주의의 균형과 기둥, 아르누보의 화려한 곡선들이 도시마다 조금씩 다르게 강조되었을 뿐, 그 근간에 깔린 기술과 철학은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건축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2. 길드 정신과 근대 건축 교육의 계승

석공 길드가 남긴 정신은 단순히 중세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건축은 점차 예술과 과학의 학문으로 자리 잡았고, 길드의 비밀 전승은 학교와 아카데미의 공개 교육으로 변모했습니다.

프랑스의 보자르 학파(École des Beaux-Arts)는 19세기 파리에서 건축을 예술의 한 장르로 확립한 기관입니다. 비례, 대칭, 장식, 도시 맥락을 강조한 보자르 양식은 사실상 길드의 전통을 학문적 체계로 정리한 것이었습니다. 도제-장인의 관계가 교수-학생의 관계로 옮겨간 셈입니다.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는 20세기 초, 기술과 예술, 장인 정신을 융합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습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모토는 단순한 기능주의를 넘어서, 길드가 지녔던 장인성과 철학을 근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공방(workshop)’ 중심 수업 방식은 중세 길드의 교육 체계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길드에서 시작된 기술·철학·예술의 결합은 보자르 학파에서 예술로, 바우하우스에서 산업과 기능으로 이어지며, 현대 건축의 두 축을 형성했습니다.

유럽의 어느 도시를 가도 건축의 공통된 얼굴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의 모방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로부터 이어진 건축 기술과 철학, 중세 길드의 비밀스러운 전승, 그리고 근대 이후 학교와 학파를 통한 체계적 교육이 결합하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즉, 유럽의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지형·기후·역사뿐 아니라 제국과 교회, 철학과 예술, 장인의 비밀스러운 지식이 결합된 공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럽의 건축이 시대를 초월해도 공통적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유지하는 이유입니다.

유럽의 건축은 결국 지식과 기술, 철학과 예술, 그리고 장인 정신의 긴 역사적 연속성 위에 서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낯선 도시를 여행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아름다움과 질서, 그리고 신성한 울림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유럽 전통의 세계적 확산>

미국은 유럽의 전통을 새로운 환경 속에서 변형시켰습니다.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건축은 공동체와 역사, 영속성을 담았다면, 미국에서는 이동성과 자유, 실용성과 속도가 중요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느끼신 인상은 석조와 벽돌의 부재, 단조로운 콘크리트 구조물, 그리고 도심의 고층빌딩으로서 이런 모습들은 미국 건축의 본질을 반영합니다.

• 이주민의 건축
유럽의 길드적 지식이 사라진 대신, 풍부한 목재와 이동성을 반영한 log cabin, 목조주택이 보편적이었습니다.

• 도시 설계
중세적 성곽과 광장이 없는 대신, 격자(grid)형 도로망이 계획적으로 깔렸습니다. 이는 방어가 아닌 이동과 확장을 위한 설계입니다.

• 마천루와 콘크리트
19세기 말 시카고와 뉴욕에서 철골 구조와 엘리베이터 발명이 결합해, 고층건물이 도시 중심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 철학적 배경
미국 건축은 “영속성”보다 “개척과 진보”를 상징합니다. 건물은 오래 남는 문화재라기보다, 기술과 자본의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미국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장인적 완성보다는, 속도, 효율, 성장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념비라 할 수 있습니다.

1. 유럽과 달리 길드가 없는 미국

• 유럽
건축은 수세기 동안 석공 길드(Mason Guild)가 독점했습니다. 기술과 지식은 장인-도제 체계로 이어졌고, 대성당·성곽·궁전 등 복잡한 석조 건축이 가능했습니다. 이점이 유럽 어디를 가도 비슷비슷한 형태의 건물과 도시가 공통적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 미국
신대륙 개척자들은 이러한 전통 길드를 갖고 오지 못함. 대신 목재 중심의 간단한 기술로 집을 짓고, 건축가나 장인이 아닌 개척민 스스로 집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건축은 장인들의 비밀 지식에 기반한 장엄한 건축이 아니라, 실용적·간소한 건축으로 출발했습니다.

2. 미국의 주거지 발전

• 초기 식민지 시대
영국식 목조 주택. 풍부한 삼림 자원을 활용하여 timber house, log cabin이 등장합니다.

• 18~19세기
농업 중심 사회에서 farmhouse 발달. 대지 위에 넓게 자리 잡는 개방형 구조입니다.

• 도시화 시대
산업혁명 이후, 도시에는 brownstone (벽돌집), row house (연립주택) 같은 유럽식 모방 양식이 도입되었으나 단순화 되었습니다.

• 20세기 이후
교외(suburb) 확산. 자동차 도로와 연결된 단독 주택 + 마당 구조가 미국 주거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미국 주거지는 돌·길드 중심의 “영속성”보다, 목재·실용성·이동성을 바탕으로 발전했습니다.

3. 도시와 도로 구조

• 유럽
중세의 성곽 도시. 좁은 골목, 비포장 자갈길(cobblestone), 광장과 성당 중심입니다. 도시가 역사의 연속으로 쌓이게 됩니다.

• 미국
건국 자체가 근대 이후이므로 성곽이 불필요합니다. 도시 설계는 격자(grid) 도로망으로 직선적이고 합리적. 자동차의 등장은 곧 도로 중심 도시로 이어집니다. 뉴욕 맨해튼의 Commissioner’s Plan (1811)에 의해서 바둑판식 도시가 되었습니다. 워싱턴 D.C.: 프랑스인 렝팡이 설계한 계획도시, 광장·원형 교차로 + 직선도로 결합하였습니다. 미국의 도시는 유럽식 방어·전통보다, 이동·교통·확장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4. 중요한 건물 양식의 차이

• 유럽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신고전주의, 아르누보 등과 같은 전통 위에 시대정신이 층층이 쌓인 양식. 교회와 성당, 성곽과 궁전이 중심입니다.

• 미국
중세 양식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1. 식민지 유럽식 모방
초기에는 영국 조지안 양식, 네오클래식 (백악관, 국회의사당) 등이 있습니다.

2. 실용적 현대주의
고층 빌딩, 마천루 등입니다. (시카고 스쿨, 뉴욕 아트데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3. 상징적 기념 건축
자유의 여신상, 링컨 기념관과 같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징을 표현하는 기념 건축물등이 있습니다. 미국의 중요한 건물은 종교와 전통을 과시하기보다, 정치적 이상(자유, 민주), 기술적 진보(철강, 유리, 콘크리트), 상업적 힘(마천루)을 상징합니다.

19세기 후반, 시카고와 뉴욕은 유럽의 석조 전통을 철과 유리, 엘리베이터 기술과 결합해 마천루(skyscraper)를 탄생시켰습니다. 고층 빌딩은 곧 자본과 기술, 그리고 미래 지향적 정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보자르 학파를 공부한 건축가들이 뉴욕 공공도서관이나 연방 법원 같은 고전주의적 건물들을 세운 한편, 바우하우스적 기능주의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카고 건물들처럼 단순하고 직선적인 마천루로 이어졌습니다.

미국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유럽의 전통을 계승했으면서도,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개인과 자본의 힘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으로 변화했습니다. 미국 건축은 유럽의 “중세 길드와 전통적 양식의 연속성”을 계승하지 못했지만, 대신 풍부한 자원·넓은 땅·근대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실용적이고 이동 가능한 집, 격자식 도시, 자동차 중심 도로망, 마천루와 기념비적 건축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유럽의 집은 과거와 전통의 연속성을, 미국의 집은 미래와 자유의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아시아 – 전통과 현대의 혼합
아시아의 현대 도시들은 유럽 전통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적 변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유럽의 신고전주의와 근대 건축을 빠르게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목조 전통과 미니멀리즘 미학을 바탕으로 독자적 현대 건축을 발전시켰습니다.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건축은 바우하우스적 단순성과 일본 전통의 정신성을 동시에 담아냅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유럽과 미국 건축을 대규모로 수용했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스카이라인은 뉴욕과 런던의 영향을 짙게 반영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스케일과 상징성을 강조하여 “국가적 힘”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변형되었습니다.

한국 역시 유럽 건축의 전통과 미국식 모더니즘을 함께 수용했습니다. 서울의 아파트 숲은 미국식 기능주의의 극단적 사례이지만, 동시에 전통 한옥을 복원하고 현대적 건축 속에 ‘마당’과 ‘자연과의 조화’를 담으려는 시도가 병행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건축 변화의 역사>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신 “초라한 기와집과 초가집이 얽혀 있는 전쟁 후 한국”에서 “사각형 아파트 숲”으로의 변화는 한국 현대사의 건축적 압축판입니다.

1. 전통

한옥과 초가집이 있습니다. 한옥은 목재와 기와, 흙과 돌을 사용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집. 마당을 중심으로 한 관계적 구조인 반면, 초가집은 농경 사회의 서민 주거, 지역의 기후와 재료에 맞춘 실용적 건축입니다.

2. 한국전쟁(1950-53) 이후

전쟁 이후 도시가 파괴되고, 피난민들이 임시 가옥을 세웠습니다. 1960~70년도에는 군사 독재 시기, 국가 주도 개발 정책 속에 아파트 단지가 급격히 들어섭니다. 이는 서구적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표준화된 박스형 주택”이었습니다.

3. 현대 서울 (2025년 현재)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 비율을 가진 도시 중 하나. 주거의 획일성, 초고층 주상복합, 재개발에 따른 전통의 해체가 특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도시 재생과 한옥 보존의 흐름이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북촌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등). 한국의 건축은 자연과 조화(전통) → 전쟁과 파괴 → 압축적 근대화와 아파트 → 재생과 혼합이라는 궤적을 보여줍니다.

아시아의 건축은 유럽의 언어를 빌려 쓰되, 각국의 역사와 정체성 속에서 혼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 건축의 공통된 얼굴은 로마 제국에서 시작된 기술과 철학, 중세 길드의 전승, 근대 아카데미와 공방을 거쳐 이어진 긴 연속성의 산물입니다. 이 전통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의 스카이라인으로,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의 초고층 도시와 현대적 실험 건축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건축이 단순히 양식의 차용이 아니라, 각 문명이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의 도시에서 반복되는 공통된 얼굴이 역사와 공동체의 기억이라면, 미국의 집과 마천루는 자유와 개척의 상징이고, 아시아의 건축은 전통과 현대가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실험장입니다.

결국 건축은 벽과 지붕의 집합이 아니라, 문명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시대와 대륙을 넘어 이어지는 인간의 보편적 열망—안전, 아름다움, 자유, 정체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집과 건축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한 민족이 걸어온 역사와 세계관을 담는 그릇입니다.

• 유럽은 예술과 역사적 연속성의 미학을,
• 미국은 개척과 효율, 진보의 철학을,
• 한국은 생존, 개발, 그리고 조화에 대한 갈망을 건축 속에 새겨 넣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유럽에서 감탄하는 이유는 시간이 만든 작품성, 미국에서 단조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전통의 부재와 실용 중심성, 그리고 한국에서 혼합된 인상을 받는 이유는 압축된 근현대사의 흔적 때문입니다.

<환경, 지형 그리고 건축>

세계 176개국을 다니며 확인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 중 하나는 “산은 산이고 들은 들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웅장한 산맥이 자리한 곳에는 드넓은 평야가 드물고, 반대로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곳에는 큰 산맥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자연 현상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인류의 주거지와 도시 구조를 결정짓는 근본 조건입니다.

1. 유럽: 산맥과 평야가 나눈 삶

유럽의 지형은 산맥과 평야의 뚜렷한 대조 속에서 인간의 정착 양식을 형성했습니다.

• 산악 지대
알프스, 피레네, 아펜니노 산맥 같은 지역에서는 산악형 거주지가 발달했습니다. 마을은 경사진 지형에 밀집하여 성곽으로 보호되었고, 계단식 밭과 포도원은 경사면을 활용해 조성되었습니다.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방어와 공동체적 밀착성을 강화했습니다.

• 평야 지대
라인강 유역, 북유럽 평원, 이탈리아 포 계곡처럼 산맥이 없는 평야에는 대규모 도시와 농업 중심지가 발전했습니다. 로마, 파리, 베를린과 같은 도시는 광활한 평야에 자리 잡아 확장성을 가졌습니다.

👉 유럽에서 “산이 있으면 마을, 평야가 있으면 도시”라는 도식은 곧 역사와 건축의 지도이기도 합니다.

2. 미국: 산맥은 가장자리에, 문명은 평야에 미국의 지리 역시 동일한 패턴을 보입니다.

• 산악 지대
동부의 아팔라치아, 서부의 록키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거대한 산세를 자랑하지만, 그 속에 대도시는 거의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산은 국립공원이나 광산지대, 소규모 산악 마을의 배경으로 남았습니다.

• 평야 지대
미국의 대도시는 대부분 평야에 자리합니다. 뉴욕, 시카고, 댈러스, 휴스턴, 로스앤젤레스까지—거대한 평지와 해안선을 따라 도시가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도로망, 철도, 공항 등 근대적 교통 체계와 맞물리면서 도시의 급격한 성장을 가능케 했습니다. 미국 도시에서 산을 보기 힘든 이유는 단순히 풍경의 차이가 아니라, 산맥은 문명의 틀을 제한하고, 평야는 무한 확장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3. 한국: 산과 강이 빚어낸 분지형 삶

한국은 독특합니다.

• 지형
한반도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입니다. 그러나 그 산들은 알프스나 록키처럼 거대한 장벽이 되지 않고, 비교적 낮고 완만하여 강과 함께 어우러집니다.

• 분지형 주거지
산을 끼고 강이 흐르는 곳마다 작은 평지가 형성되어, 그 안에 마을이 들어섰습니다. 서울 역시 한강과 북한산·관악산이 만든 거대한 분지형 공간 안에 자리합니다.

👉 따라서 한국의 주거지는 “산과 강의 교차로”에서 형성된 독특한 분지형 정착 패턴을 가집니다. 이는 곧 자연을 정복하기보다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사는 삶을 보여줍니다.

4. 지형, 기후, 그리고 인간이 담아낸 세계관

• 유럽
산맥과 평야의 뚜렷한 분리 속에서, 사람들은 산에선 성곽 마을을, 평야에선 대도시를 세웠습니다. 도시의 중심은 성당과 광장이며, 이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질서로 재구성한 세계를 반영합니다.

• 미국
거대한 산맥을 국경선처럼 두고, 광활한 평야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교통망과 산업을 따라 확장된 도시는 자유와 개척, 무한한 확장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 한국
높은 산맥도, 끝없는 평야도 없는 땅에서, 산과 강이 어우러진 분지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계를 반영합니다.
“산은 산이고 들은 들이다”라는 깨달음은 곧 지리적 조건이 문명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 유럽은 산맥과 평야의 분리 속에서 역사와 건축을 발전시켰고,
• 미국은 산맥을 피하고 평야를 따라 무한히 확장했으며,
• 한국은 산과 강이 빚어낸 분지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집과 도시, 그리고 문명은 결국 땅과 기후 위에 세워진 인간의 응답입니다. 자연은 한계를 주었지만, 그 한계 속에서 각 지역은 자신만의 세계관과 미학, 건축적 삶의 방식을 창조해 왔습니다.

<집과 자연, 환경, 철학의 종합적 성찰>

집은 단순히 인간이 비바람을 피하고 잠을 자는 물리적 공간에 그치지 않습니다. 집은 곧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며,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보여주는 철학적 거울입니다.

1. 서양에서의 집: 인간의 중심과 자연의 극복

서양 건축 전통에서 집은 대체로 자연을 극복하고 통제하는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오이코스(oikos)*는 경제·가족·권위를 함께 담아내는 생활 단위였지만, 그것은 자연을 통제 가능한 범위로 들여온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 도시화
집은 도시의 한 블록 안에 편입되어, 자연보다는 사회 질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 건축학적 직선
돌과 벽돌, 기둥으로 세운 서양 건축은 직선과 직각을 강조하며, 집을 자연과 대비되는 인공적 질서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 철학적 배경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집은 폴리스와 연결된 기본 단위, 즉 인간 공동체의 질서 확립을 위한 최소 단위였습니다. 이는 자연의 곡선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 이성이 자연을 정복하고 구조화하는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2. 동양에서의 집: 자연을 포용하는 공간

동양, 특히 한국 전통 건축에서 집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였습니다.

• 한국
집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원리에 따라 앉혀지고, 처마의 곡선은 햇빛과 바람, 비와 눈을 받아내며 자연을 품습니다. 한옥의 마루와 마당은 집 안과 집 밖,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흐리게 하여, 자연 속에 살면서도 자연을 끌어들이는 공간을 창조했습니다.

• 중국
사합원(四合院)은 하늘(천)과 땅(지)을 닮아 사각의 질서를 구현했지만, 동시에 하늘을 향해 열린 마당을 통해 우주와 연결되고자 했습니다.

• 일본
집은 소박한 직선미 속에서 정원을 축소된 자연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는 자연 전체와의 일치를 추구하기보다, 정제된 일부 자연을 집 안으로 들여온 방식이었습니다.

3. 집과 환경: 보호, 조화, 정체성

집은 인간이 환경과 맺는 방식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서양의 집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요새와 같았습니다. 두꺼운 벽과 높은 창, 고딕 성당의 돌출된 첨탑은 인간이 자연을 넘어서는 존재임을 과시했습니다.
한국의 집은 자연을 동반자처럼 인정하는 쉼터였습니다. 온돌은 땅의 열을 끌어올려 겨울을 버티게 했고, 한지는 습기를 숨 쉬듯 조절했습니다. 이는 환경을 정복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과의 균형을 추구한 철학적 산물이었습니다.

4. 집과 철학: 세계를 바라보는 창

집은 철학적으로 **인간이 세상을 해석하는 창(window of worldview)**과 같습니다.

• 서양의 집
개인의 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권위를 드러내는 구조.

• 한국의 집
가족 공동체와 자연의 순환을 품으며, 집은 삶의 무대이자 작은 우주로 기능했습니다. 문학적으로도 “집”은 귀향(歸鄕)과 본향(本鄕), 그리고 영원한 안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정지용의 「향수」처럼, 집은 곧 자연과 공동체가 함께 엮인 인간 존재의 근원적 그리움을 상징합니다.

5. 집과 자연 인식의 구조

결국 집은 자연을 배척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문화적 응답입니다.

• 서양의 구조
직선, 벽, 기둥 → 자연을 잘라내고 인간의 질서를 심는 방식입니다.

• 한국의 구조
곡선, 마당, 처마 → 자연의 리듬을 받아들이며, 인간이 자연 속 일부임을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시각화한 철학적 구조물입니다. 서양이 직선을 통해 질서와 권위를 구현했다면, 한국은 곡선을 통해 조화와 생명을 품었습니다. 집은 우리 존재의 뿌리이며,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작은 우주입니다.

<한국 산하의 특별한 아름다움>

한국의 산하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겹고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결코 히말라야처럼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장엄한 높이도 아니고, 알프스처럼 신비의 영역에 다가가는 듯한 빙하와 절벽의 위용도 아닙니다. 남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안데스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장대한 능선도 아니며, 북미 대륙을 관통하는 록키 산맥처럼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웅대한 규모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의 산은 그 모든 극단의 장엄함 대신,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적당한 높이의 친근한 산’으로 존재합니다. 어느 도시나 마을을 둘러보아도 산이 배경이 되어 있고, 산허리를 감아 흐르는 개천과 강이 삶의 맥박처럼 이어집니다. 봄이면 산자락마다 진달래와 철쭉이 분홍빛 물결을 이루고, 여름이면 녹음이 짙어 바람과 새소리를 선물합니다. 가을에는 단풍이 산을 불태우듯 붉히고, 겨울에는 설경이 마을을 포근히 덮어 줍니다.

산자락에 올라 도시를 바라보면, 수양버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느티나무와 버드나무,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진 길가로 소달구지가 덜컹이며 지나갑니다. 구불구불 굽은 논과 밭은 허리 굽은 할머니의 모습처럼 소박하지만, 그 안에 담긴 땀과 시간은 어느 풍경보다 깊은 감흥을 줍니다. 한국의 산은 거창한 등산 장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집을 나서 몇 걸음만 옮기면 언덕을 타고 오를 수 있고, 산 위에 서면 언제나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170여 개국을 여행하며 깨달은 것은, 이러한 풍경이 결코 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북경과 상하이의 대도시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일본의 동경에서는 어느 방향에서도 산이 보이지 않아, 도시가 고립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 있는 테이블 마운틴은 이름처럼 평평한 위용을 자랑했지만, 제 눈에는 한국의 산하만큼 다정한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에콰도르에서 칠레까지 안데스 산맥을 따라 달려보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장대한 산맥 속에서 정작 한 폭의 그림처럼 아담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산마을의 정경’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알프스는 그야말로 눈부셨습니다.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스위스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에 이르기까지, 알프스의 봉우리들은 창세기의 장엄한 붓질처럼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웅대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멀리서 감탄해야 할 대상’이지,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산’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한국의 산하는 특별합니다. 한국의 산은 거대하지 않지만 늘 곁에 있고, 위압적이지 않지만 늘 품어 줍니다. 인간의 삶과 자연이 서로를 비추며 살아가는 공간—그것이 곧 한국 산하의 미학이며,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찾기 어려운 고유한 아름다움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도 저의 눈에는 한국의 산하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적당히 높고 산과 들과 강과 마을과 숲과 공기가 조화롭게 존재하는 우리나라 산하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알프스나 히말라야, 그리고 록키 마운틴의 장대함에 비교되어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던 한국의 산하를 이제는 알아보고, 그 섬세하고도 깊은 아름다움에 반해 한국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한국의 산하는 결코 단조롭지 않습니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네 번의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설악산(雪嶽山)은 네 개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자연적 설경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설악산, 역사적 비애와 민족적 기억을 뜻하는 혈망산(穴望山), 가을 단풍의 절경을 나타내는 풍악산(楓嶽山), 금강산과 연결된 미학적·영적 연속성을 말하는 금강산의 한 줄기로서의 외금강(外金剛)입니다. 봄에는 연초록 새싹과 벚꽃의 화사함, 여름에는 계곡의 시원한 물줄기, 가을에는 붉게 타는 단풍, 겨울에는 눈 덮인 기암괴석으로 사계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속리산(俗離山)은 깊고 아늑한 품을 가진 산으로, 법주사와 정이품송이 어우러져 천년의 불교 문화를 안고 있으며, 골짜기마다 고즈넉한 사색의 길을 품고 있습니다.

지리산(智異山)은 장대한 능선과 웅대한 산세로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이라 불리며,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인생의 시작과 희망을 상징하는 장엄한 장면을 선사합니다.

한라산(漢拏山)은 남국의 정취와 함께 백록담이라는 산정호수를 머금고 있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비로운 경관을 보여줍니다. 한라산의 품은 바다와 맞닿아 있어 한국의 산과 바다가 하나로 이어진 독특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북한산(北漢山)은 수도 서울을 품에 안고 있으며, 바위 봉우리마다 장엄한 기백을 드러내며, 도심 속에서 영적 쉼을 주는 산입니다.

태백산(太白山)은 민족의 제천 신앙과 깊이 연결된 산으로, 하늘과 소통하던 제사의 역사를 간직한 신령한 공간입니다.

내장산(內藏山)은 특히 가을의 단풍으로 유명합니다. 산 전체가 붉고 노란 불길처럼 타올라,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며, 가을의 진경산수화를 펼쳐 보입니다.

계룡산(鷄龍山)은 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닭이 용으로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습니다. 예로부터 도교와 불교의 성지로 여겨졌고, 지금도 국립공원 안에 여러 사찰과 도교적 전설이 어우러져 한국인의 종교적·영적 상상력이 깃든 산입니다.

오대산(五臺山)은 불교의 성산으로, 월정사와 상원사 같은 고찰이 자리하며,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은 불교의 청정한 수행 공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미학을 잘 보여줍니다.

가야산(伽倻山)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를 품고 있어, 단순한 산이 아니라 인류 정신사의 보고로 평가됩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의 산들은 지역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국의 산들은 단순히 경관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종교, 삶의 터전과 신앙을 함께 담아낸 공간입니다. 산은 마을의 울타리였고, 신앙의 제단이었으며,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고향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산하는 알프스의 장대함이나 히말라야의 웅장함과는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적당한 높이와 깊은 품, 그리고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온 친근한 산의 미학입니다. 세계인들이 이제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한국 산하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새로운 감동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경 속 산의 의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내산(출 19–20장)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계시의 산으로,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시온산(시편 48편)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상징하며, 구원의 중심이 되는 산이었습니다. 감람산(마 24:3; 행 1:12)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눈물 흘리셨으며, 또한 승천하신 산으로 기록됩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의 설교”(마 5–7장)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곳도 바로 산이었습니다. 산은 곧 하나님 말씀의 울림이 울려 퍼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성경 속 산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 계시와 구원, 그리고 새로운 언약의 무대였습니다. 이는 한국 산하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역사와 종교와 인간의 삶이 깃든 공간이라는 점과 놀랍게도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산을 거닐다 보면, 우리는 자연을 통해 성경 속 산의 영적 의미를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산은 높고 웅장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품는 따스한 곡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위엄과 자비, 심판과 은혜가 동시에 어우러진 신비와도 같습니다. 결국 한국 산하의 아름다움과 성경의 산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과 인간의 이야기가 만나는 자리다.”

<집, 동서양의 언어가 만나는 자리>

히브리어 성경에서 בית (Beit)은 단순한 거처를 뜻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집은 혈통과 언약의 이름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집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성막도, 성전도, 심지어 회당도 모두 Beit라 불리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상징을 품고 있습니다. 헬라어 οἶκος (oikos) 또한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생계와 경제를 아우르는 작은 우주였습니다. oikonomia(경제), oikologia(생태)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곧, 동양의 집은 늘 “사람과 하나님, 그리고 공동체를 엮는 자리”였습니다.

서구에서 house와 home은 구분되는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house가 물리적 구조, 곧 벽과 지붕과 기둥의 공간이라면, home은 관계와 기억, 따뜻한 화덕과 식탁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공간입니다. 고대 로마의 domus는 가문의 영광과 권위를 상징했고, 그리스의 oikos는 도시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작은 단위였습니다. 중세의 집은 하나의 공용 대청으로서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장이었고, 근세에 들어 방과 문이 분리되면서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집은 늘 시대와 함께 변모하며, “사는 방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건축학적으로도 이 차이는 뚜렷합니다. 서구의 집은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가 말한 그의 저서 De Architectura(건축에 관하여)dptj “견고함·유용함·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원칙 위에 서 있었습니다. 직선과 비례, 질서와 위계는 로마의 도로망과 성당의 기둥, 근대 도시의 바둑판형 구획 속에 드러났습니다. 반면 동양, 특히 한국의 집은 곡선과 여백으로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처마의 선은 햇빛을 가리면서 바람을 품었고, 온돌은 땅의 숨결을 따뜻한 열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집은 자연과 맞서는 성채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작은 세계였습니다.

문학적으로도 집은 늘 서정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다락방과 창틀, 문지방과 계단 같은 집의 자잘한 공간이 인간의 기억을 담아내는 서정적 그릇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두 세계의 긴장 속에 서 있습니다. 서구적 의미의 house—효율적이고 기능적인 구조—는 현대 도시의 직선 아파트 단지 속에 구현되었습니다. 반면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home—관계와 기억과 환대의 자리—는 종종 사라져 갑니다. 한국의 한옥과 서원의 곡선, 온돌의 따뜻함, 문풍지의 숨결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지혜의 상징입니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집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집은 몸을 덮는 지붕에서 출발했지만, 곧 기억을 저장하는 그릇이 되었고, 이제는 기술과 도시, 자연이 만나는 접점이 되었습니다. 동양의 Beit와 Oikos, 서구의 House와 Home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묻습니다. 효율과 기능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관계와 영혼을 품는 집을 회복해야 하는가?

집은 건축가가 설계하지만, 거주가 그 집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집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시는 작은 성전이자,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훈련의 자리입니다.

건축학적으로도 이 차이는 뚜렷합니다. 서구의 집은 고대 로마의 건축가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Marcus Vitruvius Pollio) 가 그의 저서 『De Architectura』(데 아르키텍투라, 건축에 관하여) 에서 정리한 세 가지 원칙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는 건축이 반드시 견고함(Firmitas)·유용함(Utilitas)·아름다움(Venustas) 이라는 세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자연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모방한 최초의 인간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숲 속에서 불을 발견하고, 불 주위에 모여 살며 공동체를 형성한 것을 주거의 기원으로 설명합니다. 초기의 집은 나무와 잎, 흙으로 지은 임시 피난처였으나, 점차 돌과 벽돌, 목재를 사용해 안정적이고 영속적인 집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그는 집이 놓이는 환경과 기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추운 지역에서는 방을 남쪽으로 두어 햇볕을 충분히 받아야 하고, 더운 지역에서는 북쪽으로 두어 그늘과 시원함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지속가능 건축(sustainable architecture) 과도 일맥상통하는 통찰이었습니다.

비트루비우스가 묘사한 서구의 집은 공용 공간과 사적 공간을 구분하며, 아트리움(atrium)과 안뜰(peristyle) 같은 사회적 공간, 그리고 가족 생활을 위한 사적 공간, 더 나아가 기능적 공간을 분명히 나누었습니다. 즉, 집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공동체적 성격과 가족적 성격을 동시에 담아내는 건축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건축은 기술을 넘어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모방하는 예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구 건축의 집은 효율과 질서, 그리고 미학적 조화를 동시에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전통 한옥이 곡선을 따라 자연과 어우러지고, 배산임수의 지형 속에 스며드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적·미학적 토대를 보여줍니다.

<집: 신구약을 관통하는 신학적 상징과 인간적 고찰>

1. 구약의 집: 언약과 정체성의 공간

구약에서 집은 단순히 물리적 건축물이 아니라, 언약과 정체성의 표지였습니다.

• 가정으로서의 집 (Beit)
“다윗의 집(벧 다윗)”은 단순한 왕조가 아니라 하나님 언약의 가문을 뜻합니다(삼하 7:16). 집은 혈통과 공동체, 그리고 언약의 계승을 의미했습니다.

• 성막과 성전
하나님의 집(벧 하엘로힘)은 하나님 임재의 처소였습니다. 성막은 광야에서 이동하는 집이었고, 성전은 예루살렘에 뿌리내린 영원한 집이었습니다. 집은 곧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방식의 상징이었습니다.

• 이스라엘 공동체
구약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집”으로 부르며(민 12:7; 호 8:1), 집은 공동체적 신앙과 정체성의 토대였습니다.

2. 신약의 집: 그리스도와 교회의 공동체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에서 집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 예수와 다윗의 집
메시아로 오신 예수는 다윗의 집에서 태어나셨으며(눅 1:27, 마 1:1), 다윗 언약의 성취로서 “영원한 집”을 세우셨습니다.

• 비유 속의 집
예수님은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마 7:24–27)으로 믿음의 기초를 말씀하셨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집(눅 15:8–10) 비유에서 집은 회복과 기쁨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 교회로서의 집
사도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딤전 3:15)이라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살아 있는 돌이라 칭하며,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세운 영적 집이라 했습니다(벧전 2:5).

• 우주적 집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엡 1:23)을 교회라 부르며, 교회를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적 집으로 제시했습니다.

3. 집의 이중적 의미: 쉼과 소명

집은 인간의 삶 속에서 늘 쉼의 공간이자 소명의 장소였습니다.

• 쉼
집은 피난처이자 안식의 자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 나의 산성”이라 고백하며 하나님을 궁극적 집으로 묘사합니다(시 91:9).

• 소명
집은 단순한 안락함에 머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창 12:1)는 부름을 받았듯, 집은 때로 떠나야 할 자리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4. 집과 우리의 삶: 신앙적·철학적 성찰

1. 영원한 집의 갈망
바울은 “땅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후 5:1)고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집은 유한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소망합니다.

2. 가족 공동체의 집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교제와도 닮아 있습니다.

3. 철학적·인문학적 차원
집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틀입니다. 하이데거는 집짓기를 존재론적 행위라 보았고, 집은 인간이 “세상 속에서 거주한다”는 사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4. 미학적 차원
집은 곡선과 직선, 자연과 인공이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집은 단순히 효율만을 따지는 기계적 구조물이 아니라,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담아내는 예술적 공간입니다.

5. 종합: 집은 작은 우주
성경 전체를 관통할 때, 집은 하나님과 인간, 언약과 공동체, 현재와 영원을 잇는 통합적 상징입니다.

• 구약: 언약과 정체성의 집
• 신약: 그리스도와 교회의 집
• 우리의 삶: 쉼과 소명의 집
•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영원한 집

이제 한국 한자 속 집 개념(家, 屋, 庭, 院, 址, 齋, 樓)과 성경 속 집 개념—히브리어 בַּיִת (Beit)와 헬라어 οἶκος (Oikos)—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겠습니다.

1. 히브리어 Beit (בַּיִת)

• Beit은 집, 가문, 성전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 다윗 왕조를 “다윗의 집(Beit David)”이라 부르며,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와 혈통,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의미했습니다.
• 또한 Beit YHWH(여호와의 집)는 성전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집이라는 신학적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 따라서 히브리적 집은 거주 + 공동체 + 신앙의 총합체입니다.

2. 헬라어 Oikos (οἶκος)

• Oikos는 가정, 경제, 공동체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오늘날 경제학(economy, oikonomia)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Oikos는 한 가문의 경제 단위이자 사회 조직의 기본 단위였습니다.
• 신약에서 교회는 종종 Oikos tou Theou (하나님의 집, 딤전 3:15)로 불리며, 신앙 공동체를 가정적·가족적 연대 속에서 이해했습니다.

<한국인의 집 고찰>

영어에는 House 와 Home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물리적 그리고 정서적 개념의 집을 설명해 준다고 전기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에게도 영어의 House 와 Home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있을까요? 한국어에는 house와 home을 모두 포함하는 가장 보편적인 표현은 “집”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집을 샀다”라고 하면 건물의 의미(house)이고, “집에 간다”라고 하면 가족과 정서적 귀속(home)까지 아우르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한국어의 “집”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영어의 두 개념을 모두 담아내는 단일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나타내는 한자를 차용할 때는 집가에 해당하는 “가(家)”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家(가)는 단순히 건물을 뜻하지 않고, 가문·가족·혈통·전통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가(家)”는 home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갖고, “옥(屋)”이나 “택(宅)”은 house에 가까운 의미를 가집니다. 이처럼 한국어에는 영어처럼 두 개의 단어로 분리된 표현은 없지만, 정서적으로는 차이를 두어 말합니다.

• 물리적 의미: 집, 건물, 주택, 옥(屋).
• 정서적 의미: 집안, 가정, 가(家).

예를 들어, “우리 집”은 건물일 수도 있지만, “우리 집안”이라고 하면 가족과 역사, 소속을 가리킵니다. 이는 영어의 house와 home의 차이를 한국어 내에서 맥락적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입니다. 한국어에는 영어처럼 “house/home”처럼 1:1 대응되는 두 단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집(物質적 거처)’과 ‘가정·집안(정서적 소속)’이라는 이중 구조가 존재하며, 이는 맥락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됩니다.

기본적으로 house를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屋 (옥)은 헬라어 Oikos가 가진 물리적 건물의 의미와 닮았습니다. 보호와 기능 중심의 개념입니다. 반면 家 (가)는 히브리어 Beit과 가장 가깝습니다. 집을 넘어 가문과 공동체를 뜻한다는 점에서, “다윗의 집”이나 “하나님의 집”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집’에 해당하는 단어가 ‘家’와 ‘屋’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면 히브리어 성전의 뜰(עֲזָרָה, azarah)에 해당하는 庭 (정)이 있습니다. 이럴 경우의 집정은 실내와 마당이 함께 구성된 생활·신앙의 공간이 됩니다. 이에 반해 집원에 해당하는 院 (원)은 Beit Midrash(율법 공부하는 집)나 Beit Knesset(회당)처럼 공동체적 기능을 강조하는 공간과 비슷합니다. 또한 址 (터)라는 단어는이스라엘에서 “성전 터”가 곧 하나님의 언약 장소로 신학적 의미를 갖듯이, 한국의 터 개념도 단순한 땅을 넘어 영적·역사적 정체성의 자리를 뜻합니다. 좀더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齋 (재)가 있습니다. 궁궐, 서원 그리고 문인들의 집으로 사용할 때 재를 씁니다.

세종이 국사와 학문을 즐기던 상춘재(賞春齋, 경복궁), 왕실 도서관인 집옥재(集玉齋, 창덕궁), 왕실 잔치를 배설하던 연경재(演慶齋, 창덕궁)에서 모두 齋 (재)를 사용합니다. 이는 성균관의 명륜재(明倫齋) 그리고 문인들이 모이던 송석원재(松石園齋)가 이에 해당합니다. 유대교의 회당이나 랍비 전통의 학문 공간과 닮았습니다. 집이 곧 학문과 신앙 수양의 장이 되는 전통입니다. 반면 樓 (루)는 한국적 독특함으로, 미학적·조망적 기능을 강조합니다. 이는 서구와 히브리 전통보다 한국 건축미가 자연 감상과 어우러진 특징을 보여줍니다.

한국인에게 있어 “집”은 단일한 개념이 아닙니다. 家는 공동체와 가문을, 屋은 물리적 보호 공간을, 庭은 생활의 마당을, 院은 제도적 공간을, 址는 터전을, 齋는 학문과 수양을, 樓는 조망과 미학을 상징합니다. 즉, 집은 생존의 공간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뿌리, 정신적 수양의 터, 자연을 바라보는 미학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서양의 house가 주로 물리적 구조와 개인적 거주의 의미에서 발전해 온 것과는 다른, 한국적·동양적 다층성을 보여 줍니다.

한국인이 사용하는 집에 해당하는 家, 屋, 庭, 院, 址, 齋, 樓 이외에도 한국어와 한자 문화권 속에서 “집”을 설명하는 용어는 다양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큰 집이나 집의 정당(正堂, 중심 건물)을 의미하는 당(堂)이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서당(書堂)은 사랑채(舍廊堂) 등에서처럼, 공부와 예절을 배우는 공간 또는 가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심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한옥이나 서원 그리고 정자에 붙이는 당호(堂號)와 재호(齋號)가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Empfield House 또는 Baker House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을 당호 또는 재호라고 합니다. 집 자체가 정신적 선언이자 가문의 철학을 담는 상징물이 됩니다. 누각에서 사용하는 각(閣)이 있습니다. 누각, 정자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규모가 있는 집 모양의 누각을 지칭합니다. 장서각(藏書閣)처럼 저장·보관·학문 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한국 전통 한옥의 구체적 공간 단위이며,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을 뜻하는 채(齋 / 舍 / 寢 / 房 / 廊)가 있습니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관계와 역할에 따라 구분된 집의 개념입니다. 한 집안의 전체 건물, 혹은 궁궐이나 절의 큰 건물에 해당하는 당우(堂宇)가 있습니다. 규모와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궁궐 또는 왕의 거처를 말하는 궁(宮)이 있습니다. 성경의 “다윗의 집(왕조)”과 비교하면, 정치적·왕권적 집의 개념가 상통합니다. 또한 처마가 높이 뻗은 집인 헌(軒)이 있습니다. 15세기 초기 신사임당의 외가였던 초당 이씨 가문의 오죽헌(烏竹軒)이 있습니다. 오죽헌은 이율곡(李栗谷) 선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 풍광을 감상하거나 학문을 즐기는 공간으로, 정자(亭子)와 유사합니다.

한자를 차용하는 것이 아닌 순수 한국어 속 집을 가리키는 표현들도 있습니다.

1. 집 – 가장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개념.
2. 댁 – 존칭의 의미. “남의 집”을 높여 부르는 표현.
3. 곳간, 사랑방, 안방 – 집을 세분화하여 관계와 기능으로 나눈 말.
4. 가(家) – 가문, 혈통, 대를 이어가는 단위.
5. 집터, 살림집 – 구체적 삶의 자리, 생존의 기반.

즉, 집은 생존의 공간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뿌리, 정신적 수양의 터, 자연을 바라보는 미학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서양의 house가 주로 물리적 구조와 개인적 거주의 의미에서 발전해 온 것과는 다른, 한국적·동양적 다층성을 보여 줍니다.

신학·철학적 비교의 맥락

• 히브리어 Beit과 Oikos가 공동체·가문·신앙의 집이라면,
• 한국의 집 개념은 자연, 관계, 기능, 역할의 집으로 풍부하게 분화되었습니다.
• 특히 “채(안채, 사랑채)”나 “정(亭), 각(閣)”은 집이 단일 건물 이상으로 관계와 미학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동서양 집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공통점으로는 집은 단순히 거주지가 아니라 공동체·가문·신앙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Beit, Oikos, 家). 그러나 차이점은 히브리 전통은 집을 언약적·신학적 중심지로 이해합니다. (다윗의 집, 하나님의 집). 헬라 전통은 집을 경제적·사회적 단위로 강조합니다. (Oikos → economy). 한국 전통은 집을 자연과 조화된 삶의 공간으로 이해하며, 곡선의 처마, 온돌, 마당 구조에서 자연과 하나됨을 추구합니다.

“집”은 단순히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공간이 아닙니다.

• 히브리어 Beit은 언약과 신앙의 집을,
• 헬라어 Oikos는 경제와 사회 조직의 집을,
• 한국의 家·屋·庭·院·址·齋·樓는 자연과 공동체와 영성이 어우러진 집을 보여줍니다.

결국, 집은 인간 존재를 담는 그릇이자, 하나님 앞에서 삶을 이어가는 성전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집>

집(בַּיִת, Beit)의 구약적 의미

히브리어 בַּיִת (Beit) 은 단순히 물리적 주거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 안에는 혈통, 공동체, 왕조, 신앙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집을 통해 인간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가 만나는 자리를 표현합니다.

1. 가정과 씨족의 집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의 집”(Beit Avraham)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집은 가족만의 공간이 아니라, 종들과 낯선 이방인까지 함께 머물 수 있는 언약적 환대의 자리였습니다. 히브리 사회에서 집은 곧 한 세대와 그 계보를 상징했고, 그래서 성경은 종종 “아버지의 집에서 나왔다”(창 12:1)라는 표현으로 정체성과 사명의 전환을 설명합니다.

2. 다윗의 집과 왕조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다윗의 집”(Beit David) 은 단순히 궁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운 언약 공동체, 즉 메시아적 왕조를 의미합니다. 이 집은 다윗 개인을 넘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언약의 집으로 확장됩니다. 따라서 집은 정치적 공간이자 신학적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머무는 장막을 가리킵니다.

3. 성막과 성전, 하나님의 집

출애굽기와 열왕기상에서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집”으로 불립니다. 성막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신 이동하는 집이었고,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영구적 집이었습니다. “집”은 곧 임마누엘의 상징—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성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교차점이며, 예배와 희생이 이루어지는 언약의 공간이었습니다.

4. 회당, 말씀의 집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성전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회당(Synagogue) 을 세워 말씀을 읽고 가르치며 기도했습니다. 이 회당도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집”(Beit Knesset, 모임의 집 / Beit Midrash, 말씀을 배우는 집)이라 불렸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집이었다면, 회당은 말씀과 공동체의 집으로 기능했습니다. 집은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모여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집”은 단순한 벽과 지붕이 아닙니다. 집은 혈통과 기억을 이어가는 자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세대를 이어가는 통로, 그리고 임재와 환대가 숨 쉬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집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거처를 잃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집을 세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언약이 시작됨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집도 단순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신앙이 전해지고 사랑이 자라는 자리여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Beit이 다윗의 집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확장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집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작은 성막이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구약에서 “집(Beit)”은

• 가정 공동체와 정체성의 근원
• 다윗 언약과 메시아 왕조의 상징
• 성막과 성전, 하나님의 임재의 집
• 회당, 말씀과 공동체의 집을 아우르는 신학적 개념이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역사 속에서 뿌리내리는 언약의 공간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집(οἶκος, oikos) – 구약의 Beit의 계승과 확장>

1. 다윗의 집과 메시아 예수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집”(Beit David)의 계승자로 선포합니다.
누가복음 1:32–33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전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족보를 다윗의 집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가 다윗 언약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마 1:1). 즉, “집”은 혈통적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구속사를 잇는 언약의 집이 됩니다.

2. 예수님의 집에 관한 가르침과 비유

예수님은 “집”을 자주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집 (마 7:24–27):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의 차이는, 곧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집은 신앙의 토대를 상징합니다.

강한 자의 집 (마 12:29):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그의 집을 어떻게 늑탈하겠느냐” 하시며,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설명하셨습니다.

종말의 집 잔치 (눅 14:15–24): 큰 잔치를 베풀고 손님들을 집으로 부르는 비유에서,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열린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아버지의 집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은 종말론적 집, 곧 영원한 처소를 약속합니다.

3. 교회와 성도의 집 – 성령의 전

신약에서는 집의 개념이 교회 공동체와 성도의 삶으로 확장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교회 공동체는 곧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됩니다.

성도는 성령의 전: 바울은 고린도전서 6:19에서 “너희 몸은 성령의 전(집)”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은 집을 더 이상 건축물로 국한하지 않고, 성령이 거하시는 살아 있는 집으로 확장합니다.

4. 사도행전과 가정교회

초대 교회는 성전을 잃은 유대교와 달리, 가정집을 예배와 교제의 공간으로 삼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행 1:13–14)은 기도의 집이 되었고,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행 16:15)은 복음이 머무는 교회가 되었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롬 16:5)은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집”은 곧 신앙 공동체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집은 다윗의 집과 성막,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공간이었고, 신약의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 공동체, 성도의 삶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지속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임재, 언약과 사랑이 거하는 자리입니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약: 집 = 다윗의 왕조, 성막·성전, 언약 공동체
2. 예수님: 집 비유를 통해 신앙의 토대, 종말의 잔치, 아버지의 집을 가르침
3. 신약 교회: 집 = 교회 공동체, 성도의 몸,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
4. 결론: 집은 곧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역사가 거하는 자리

<신약 성경의 집>

“집”이라는 개념이 신약 서신서에서 어떻게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우주적 집(cosmic house, 하나님의 거처) 으로 확장되는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교회와 집 – 공동체적 의미

사도 바울과 다른 서신서 저자들은 교회를 자주 “하나님의 집(oikos theou)” 으로 묘사합니다.

• 딤전 3:15: “이는 하나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 교회 공동체는 단순히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적 집입니다. 즉, “집”은 더 이상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모인 신앙 공동체 그 자체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몸 – 집의 토대와 중심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합니다(고전 12:27, 엡 1:23).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교회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즉,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세워진 영적 건축물이며, 성도는 그 안에 연결된 살아 있는 돌입니다(벧전 2:5).

3. 우주적 집 –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창조

서신서의 “집” 개념은 종종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골 1:16–17: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 함께 서 있습니다. 즉, 온 우주는 하나님의 집이며, 교회는 그 우주적 집의 중심적 모형입니다.
히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따라서 “집”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 공간을 넘어,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선언으로 연결됩니다.

4. 종말론적 집 – 영원한 처소

서신서에는 집의 개념이 종말론적 완성으로도 연결됩니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궁극적으로 성도와 교회는 “하늘의 집” 즉 영원한 처소에 참여하게 됩니다.

1. 교회: 집 = 공동체, 신앙의 실제 거처
2. 그리스도의 몸: 집 = 건축 은유, 그리스도는 머리이자 모퉁잇돌
3. 우주적 집: 창조 전체가 하나님의 집, 교회는 그 축소판
4. 종말론적 집: 영원한 하늘 처소, 완성된 하나님의 성전

신약 서신서에서 “집”은 지역 교회를 가리키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결되고,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거처라는 신학적 비전을 열어주며, 결국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영원한 집으로 귀결됩니다.

<House 와 Home 의 비교 연구>

서구 전통에서 “house(집)”가 품어 온 뜻을, 역사·철학·인류학·건축·미학에 비교를 해 보고자 합니다. House로서 집은 거주하는 물리적 장소, home은 보금자리는 정서적 그리고 정체서의 자리라고 앞서 누누이 언급했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라틴어는 라틴어 domus(가문·권위·주권을 내포), 그리스어 oikos(집·가구·생계)에서 economy(경제)와 ecology(생태)가 나왔습니다. 독일어 Haus–Heim,서구에선 “집/가정(οἶκος)의 질서(oikonomía)”가 곧 사회질서의 원형이라는 관념이 오래 남습니다.

1. 인류학·사회사: 생존의 그늘에서 사적 영역의 탄생까지

• 생존·의례:
불과 지붕, 곧 화덕과 지붕이 집의 원형. 벽은 위험과 혼돈을 거르고, 문지방(threshold)은 ‘속과 바깥’을 나누는 성역의 선이 됩니다. (Mary Douglas의 경계/순수 개념, Victor Turner의 liminality)

• ‘가문’으로서의 집:
라틴 domus는 재산·혈통·노동·예배가 한데 뭉친 작은 우주. Claude Lévi-Strauss가 부른 “house societies(가옥사회)”의 전형입니다.

• 프라이버시의 발명:
중세의 공용 대청(hall house)에서 근세에 방들이 세분화되고, 복도·문이 생기며 개인공간이 탄생(사교·위생·예절의 변화, Norbert Elias). 19세기 ‘가정의 이데올로기’(공적/사적 분리)가 굳어지고, 난로·응접실·식탁이 ‘가정성(domesticity)’의 무대가 됩니다.

• 법·경제:
로마법의 dominium(소유권), 영미법의 freehold/leasehold, 근대의 저당(mortgage) 제도는 집을 정체성+자산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주택 소유=시민의 완성(American Dream)” 신화, 전후 교외(suburbia)와 전용용도구획(zoning)이 그 사회적 지형입니다.

2. 건축 이론: firmitas–utilitas–venustas에서 ‘사는 기계’와 ‘장소의 혼’까지

비트루비우스의 3원칙인 견고함·유용함·아름다움이 있는데, 르네상스의 알베르티는 비례·조화로 가정의 위계를 도식화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루이스(Loos)의 “장식은 범죄”, 르 코르뷔지에의 machine à habiter(사는 기계), 미스의 “less is more”가 직선·합리를 밀고 나갔습니다.

직선에 대한 대안으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프레리 하우스, 폭포 위의 집), 알바 아알토·스칸디나비아의 인간미학, 영국 Arts & Crafts(윌리엄 모리스)는 집=삶의 공방으로 복권합니다.

현상학에서는 하이데거 「짓기-거주-사유」, 노르베르그-슐츠의 genius loci(장소의 혼),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은 다락·모퉁이·서랍 같은 내밀한 장소성을 집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먼저 거주하기에 짓는다.”

3. 미학: 난로에서 식탁까지, ‘일상의 전례’로서의 집

집의 미학은 중심(hearth), 동선, 빛과 그림자, 재료의 촉감(목재·벽돌·석재)로 구현됩니다. 르네상스의 비례미, 조지언 타운하우스의 파사드 리듬, 지중해 안뜰(patio)의 미기후 설계 등은 질서와 친밀을 함께 엮습니다. 바슐라르가 말하듯 집은 기억의 용기—계단참, 창틀, 손잡이까지 삶의 서정을 저장하는 매체입니다.

4. 도시형식과 가족형태: 로마 인슐라에서 교외 단독주택까지

로마 인슐라(아파트)·팔라초·타운하우스·테라스하우스, 19세기 호숙(tenement)과 공중위생, 오스만의 파리지앵 블록이 밀도·인프라·파사드를 표준화했습니다.
전후 자동차·고속도로가 만든 단독·잔디·차고의 교외는 핵가족과 분업성(주거/업무)을 강화했지만, 장기적으로 장거리 통근·토지소비·고립을 남겼습니다.

5. domus Dei, oikos의 확장

기독교 전통에서 집은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를 뜻합니다. 식탁은 친교·기억의 자리, 문지방은 환대/거부의 경계. “household codes(가정 규범)”는 oikos가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선생님이 연구해 오신 בית(베이트)·οἶκος의 층위를 서구 독자에게 잇는 접점이 생깁니다.)

6. 오늘의 쟁점: ‘자산’과 ‘안식처’ 사이, 그리고 다음 집

집은 투자자산(금융화)인 동시에 집은안식처라는 두 개념이 충돌합니다. 주거 불평등·홈리스, 원격근무로 무너진 공/사 경계, 스마트홈의 편리와 감시가 있습니다.
반대로 패시브하우스·생체친화(biophilic) 설계·재생건축, 코하우징·공유주거, 타이니 하우스는 소박함·공유·저탄소를 새 표준으로 제안합니다. 핵심은 다시 거주(dwell)의 품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7. 집 표현의 변천사

서구에서 house는 fortress(보루) → hearth(화덕) → home(보금자리) → asset(자산) → interface(삶과 도시·자연·기술이 만나는 접점)로 변해 왔습니다. 그 변천을 거치며 여전히 유효한 질문은 하나—“이 집이 우리를 더 잘 살게 하는가?”(Heidegger) 입니다.

<글을 맺으며: 본향을 향해 가는 우리의 집>

집은 결국 자연을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입니다. 유럽의 집이 공동체와 역사의 영속성을 담아내고, 미국의 집이 자유와 개척의 상징이 되었으며, 한국의 집이 자연과 관계의 조화를 품어왔듯이, 모든 집은 그 땅의 하늘과 바람, 산과 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집은 단순히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어떤 삶을 일구었는지를 보여주는 초상입니다. 그래서 집을 노래하는 글에는 자연의 정경과 인간의 감정이 함께 담기기 마련입니다.

정지용의 「향수」 속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라는 시귀 역시 집과 마을을 둘러싼 자연의 선율을 노래하며, 우리가 그리워하는 집은 곧 자연의 곡선과 이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집을 둘러싼 들판과 마을, 그리고 고향의 정서적 울림을 마주하게 됩니다.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고향의 언어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풍경이었던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고백은, 곧 인간이 하늘과 별, 바람이라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어떤 ‘내적 집’을 세워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여기서 집은 물리적 거처를 넘어, 양심과 영혼이 머무는 공간이 됩니다. 곧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 위에 세워진 정신적 집입니다.

박목월의 「나그네」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집과 자연을 이어 줍니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구절 속에서, 길 위에 선 인간은 집을 떠나 있지만, 오히려 산과 들, 강과 달빛 속에서 더 큰 집—우주적 집—을 경험합니다. 집은 떠나는 자에게도 여전히 배경이 되고, 돌아올 곳으로 기억되며, 자연 전체가 곧 하나의 집이 됩니다.

이렇듯 정지용, 윤동주, 박목월의 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집을 고향, 양심, 우주적 귀속의 이미지와 연결합니다. 이는 곧 한국적 세계관 속에서 집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 영혼과 문명을 잇는 초상임을 보여줍니다.

집은 이렇게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리고 영혼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살든, 어떤 모양의 집에 살든, 결국 그 집은 우리의 삶을 담는 초상이며, 우리의 기억과 꿈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지어갈 집은, 단순히 벽과 지붕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노래가 깃든 공간, 곧 우리가 꿈꾸는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는 집이어야 할 것입니다. 집을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고, 서로에게 귀속될 때, 우리는 비로소 문명의 참된 초상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집은 단순히 물리적 건축물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관을 담는 그릇입니다. 유럽의 집은 역사의 연속성과 공동체의 기억을, 미국의 집은 자유와 개척의 상징을, 한국의 집은 자연과 관계의 조화를 품어왔습니다.

산은 산이고 들은 들이듯, 각 땅이 준 조건 속에서 인간은 저마다 다른 집과 도시, 그리고 문명을 일구어 왔습니다. 결국 집은 인간이 자연과 맺은 응답이며, 문명의 얼굴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지어갈 집은, 곧 우리가 꿈꾸는 세계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살든, 어떤 집에 살든, 결국 그 집은 우리의 삶을 담는 초상이며, 우리의 기억과 꿈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가 지어갈 집은 단순히 벽과 지붕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노래가 깃든 공간, 곧 우리가 꿈꾸는 세계의 모습을 드러내는 집이어야 할 것입니다. 집을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고, 서로에게 귀속될 때, 우리는 비로소 문명의 참된 초상을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집은 모두 임시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한복음 14:2)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을 사모하니라.” (히브리서 11:16)

결국 우리가 세우고 그리워하는 모든 집은, 영원한 본향을 향한 그림자입니다. 산
은 산이고 들은 들이듯, 각 땅이 준 조건 속에서 인간은 저마다 다른 집과 도시, 그리고 문명을 일구어 왔지만, 우리의 마지막 집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 준비된 집일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참된 집은,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2025년 9월 6일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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