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8월 8일, 역사적인 이승만의 결기있는 한 • 미상호방위조약의 성사는 한국 미래에 신의 한 수가 되어 제 2의 한국전쟁 예방과 평화와 번영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승만과 미국 정부와의 격한 논쟁과 대립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과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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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일에 발발된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만의 전쟁이 아닌 자유진영과 공산 진영과의 처절한 격전이 되어 양측 모두 상당한 인명 피해와 전쟁으로 인한 피로도가 극한에 이르렀다. 그런 잔혹한 전쟁이 약 1년 이상 진행되자 미국이나 중공, 소련도 전쟁을 종식시킬 필요가 피차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 그에 반해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분위기에서 ‘북진통일’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외침이였지 사실상 불가한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은 미국의 지원 없이는 하루도 전쟁 수행이 불가한 상태였다. 이 당시에 미국의 트르먼 대통령(Harry S. Truman,1945.4~1953.1)도 미국 내에 일기 시작한 반전 분위기로 한반도 전쟁에서 손 떼기를 원했고, 마침 대통령 선거가 있게 되자, 아이젠하워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한국 전쟁을 종식시키고 미국이 철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었다.
처음에 한국 전쟁 종식을 위한 회담은 종전회담이 아닌 휴전회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미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북한군 간의 결정적인 승부를 내지 못한 상태가 1년 이상 되면서 소모전화 되고 장기화가 되면서 더 이상 모두가 실익이 없다는 공통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전쟁을 아주 끝내는 대신, 전선을 고정하고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기를 원했다. 서로가 그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를 수 없는 전황이었다.
드디어 1951년 7월 10일에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가장 큰 난제는 포로 송환이었다. 국군 포로가 약 8만 명, 미군과 유엔군 약 8천 명이었고, 공산군 포로 중 북한군이 약 8만 2천 명, 중공군 2만 1천 명이었다. 그 포로들의 구성이 매우 복잡하였다. 북한과 중공의 포로들 중에는 상당수가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였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남한 출신들도 많았고 7천 8백 명은 한국에 남기를 원했고 약 70여 명은 제 3국을 원했다. 중공군 소속 군인들 중에는 절반 이상인 약 1만 4천여 명이 중공 공산국이 아닌 자유로운 대만으로 가기를 원하였기에 북한 측과 중공 측은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1952년 10월에 그 회담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갑자기 급변된 계기가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갑자기 사망하자 소련의 새 권력자들은 한국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상황 중에 유엔군과 공산군이 우선 부상 당한 포로들을 교환했고 드디어 1953년 6월 8일에 나머지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합의했다. 비무장지대 안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송환 거부 포로들을 90일간 설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이승만은 그 이전에 휴전에도 반대하며 포로 교환 협정에도 국군 대표의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승만도 자신이 이에 반대한다 해도 휴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진정 성취코자 하는 바는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미국과의 안전 장치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한국 정부는 독립된 지 5년의 신생국이고 미국과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비교 대상이 되질 않는 초강대국이기에 동등한 상호 방위 조약을 맺자는 것은 미국 측으로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미국이 공식적으로 보인 반응은 미국은 지금까지 개별 국가와 그런 방위조약을 맺은 일이 없다며 불가함을 표명하였다. 미국은 휴전 상태로 일단 묶어 놓고 속히 한국 전쟁에서 발을 빼는 것을 바랄 뿐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더 이상 많은 인적인 희생과 막대한 물자를 퍼붓는 가치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 당시 미정부는 한국 전쟁 비용으로 약 300억 달러로서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3천 5백억 달러를 소모하였다. 인적 희생자는 5만 4천여 명이나 되었다.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단 휴전을 성사시킨 뒤에 방위조약을 논의하자고 제의하였다. 미국도 2차세계대전으로 인적, 물적 손실이 막대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를 실현코자 비상한 묘안을 강구하였다. 포로 송환 문제가 진척되지 않은 상황 중에 이승만 대통령은 새로이 임명한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불러 포로 중에 본국으로 돌아가기는 원치 않는 반공 포로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포로수용소 운영과 결정권은 미군과 유엔사가 갖고 있었다. 그런 중에 포로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데에는 국군의 상당수가 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헌병사령관은 대통령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거사를 위한 은밀한 작전을 세우고 1953년 6월 19일 0시에 결행하기로 하였다.
그 시간에 갑자기 수용소의 발전기 스위치를 내려 버렸고 암흑 상태가 되자 행동에 돌입하였다. 이에 미군들이 이를 저지하려 하자, 미군을 묶거나 눈에 고춧가루를 뿌려 저항치 못하게 하였다. 포로수용소의 경비 국군은 사전에 반공 포로들과 탈출 준비를 시켜서 탈출 신호가 나면 미리 철조망을 끊어 놓은 곳으로 달려가 밖으로 벗어나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포로들의 탈출이 시작되자 미군 측은 조명탄을 쏘며 탈출하는 포로들을 향해 총을 쏘아 56명이 사망하였고 300여 명이 붙잡혔다. 이날 탈출에 성공한 포로들 3만 5천여 명 중에 최종적으로 2만 7천여 명이 자유를 얻었다.
이승만의 일방적이며 파괴적인 반공포로 탈출 소식을 들은 미국과 참전국 정상들은 격분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수면 중에 보고를 받았고, 델러스 국무장관은 “최악의 경우 전면전이 불가피하고 자칫하면 핵폭탄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대통령께 보고를 하였다. 처칠은 면도를 하다가 그 보고를 받고 얼굴을 베었다고 한다. 처질은 “이승만은 배신자”라고 비난하였다. 미대통령은 “이승만을 즉시 구속하거나 대통령직에서 쫓아내라”고 지시했다. 미국은 즉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아이젠하워는 “이런 위험을 종식시킬 유일하고 신속한 방법은 쿠테타를 일으키”라는 것이었다. 즉 이승만을 제거하는 지시였다. 이런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일명 ‘에버레디(Ever ready)’ 작전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며 반항하였기에 다루기 힘든 늙은 지도자(78세)였다.
이에 델러스 국무장관은 미대통령을 냉정하게 설득하였다. 그 이유는 이승만은 한국인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기에 쿠테타로 쫓아낼 명분이 없고 반발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고분고분한 파트너로 만들기 위해 그가 미국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바쁘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미정부로서는 포로 송환 문제가 파토가 난 상태이었고 미군 포로 송환에도 차질을 빗게 되었으며 중공과 북한과 소련은 격렬하게 미국을 비난하며 항의함으로 이 문제를 수습해야 할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특히 중공 측이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유엔군 측에서도 이승만을 없애든지 설득해서 속히 포로 교환 문제를 해결하라고 미국을 다그쳤다.
이에 결국 미국은 국무부 차관보인 로버트슨을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그의 의무는 휴전에 대해 이승만의 동의를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1910년(한일합방)과 1945년(신탁통치)에 한국을 배신한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 적에게 넘겨 주느니 차라리 전쟁을 계속하겠다”며 오히려 엄포를 놓았다. 이런 한미 협상은 보름이나 진행되었지만 이승만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결국 미국 특사는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전시장이 되도록 막대한 원조를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드디어 최종적으로 휴전 승인을 하는 데에 3가지를 합의하였다. 첫째, 정전 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둘째, 한국에 장기적 경제원조를 하는데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하고, 셋째, 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반해 미국 측이 이승만에게 요구한 조건은 한국이 휴전에 반대는 하되 방해하지 않는 다는 약속이었다. 이러한 합의는 참으로 이승만의 지혜롭고 담대한 결기있는 외교력을 발휘한 것이었으며 휴전 이후의 한국의 안보과 경제부흥의 토대를 놓은 위대한 한미 협정이었다.
곧 이어서 1953년 8월 8일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한국에 와서 역사적인 ‘한 • 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과거 1882년 5월에 미국과 조선이 맺은 조 • 미수호통상 조약은 그 당시에 조선으로서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었지만, 그 후 70여 년이 지난 한국은 그 반대로 일방적 실익을 챙긴 장쾌하고도 놀라운 결기의 결과물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한미 관계는 군사적 혈맹 관계를 발판으로 시작하여 산업화에도 크게 기여함으로 70여 년이 지난 2024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약 1천 8백억 달러의 수출을 하여 통상 대국이 되었다. 미국에게 한국은 세계에서 8위 통상 국가가 되었고, 한국에게 미국은 두 번째 통상 국가가 되어 상호 간에 경제적으로 크게 부응하는 산업 파트너국이 되었다. 이로서 한미 관계는 군사동맹에서 산업동맹으로 격상되었으며 더 나아가서 보편적 가치관을 공유하며 세계의 번영과 평화에도 기여하는 글로벌 파트너가 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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