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수니와 시아의 끝나지 않는 갈등과 증오

필자가 큰 형님처럼 여기는 장로님이 세우신 미국의 선교 단체가 있다. 장로님 역시 필자의 가족을 친 동기처럼 지금 까지 보살펴 준 고마운 분이자 귀한 사역 단체장이시다. 필자가 미국 서부 지역에 갈 때마다 강단에 세우고 말씀과 선교에 대한 강의를 부탁하시곤 했다. 10여 년 전 에 그곳에서 말씀과 선교에 관하여 강의를 할 때는 이슬람의 수니와 시아가 가장 극단적인 방법인 자살 폭탄 테러로 무슬림 회당 안에서 서로를 죽이는 참상이 일어났을 때이기도 하다.

[미션저널] 이슬람 수니와 시아의 끝나지 않는 갈등과 증오 » 김수길 선교사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9) »

그 날 필자는 우리 기독교는 감사하게도 이슬람처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서 감사하다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 뒤 집으로 돌아와서 문득 든 생각은 우리 기독교 역시 구교와 신교로 나뉘면서 더하면 더했지 하나도 덜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증오와 피로 얼룩진 구교와 신교가 싸운 역사가, 전쟁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굳이 성 바돌로메 축일에 일어난 학살 말고도, 30년 동안 싸운 종교전쟁 이야기가,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아이들 표현대로 이불 킥을 날리고 싶었다. 필자의 경솔함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의 선교 단체를 만나면 사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지금 까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의 증오로 시작된 수니와 시아의 갈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피로 얼룩진 기독교 종교전쟁 이야기를 언급하려고 한다. 왜냐면 우리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지 않고, 이야기의 본질을 좀 더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숨겨져 있는 죄악의 본질을 살폈으면 하는 마음에서…… . 

바돌로메 축일 학살(St. Bartholomew’s Day Massacre)사건은 로마 가톨릭 교회력 바돌로메 축일인 1572년 8월 24일부터 시작하여 그 해 10월까지 진행된,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들이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Huguenot)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최종 실행자라고 할 수 있는 메디치(Medici)가문의 카타리나(katarina)가 프랑스 왕 샤를 9세(Charles IX)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위한 후견 정치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프로테스탄트들의 지도자인 나바라(Navarra)의 앙리(Henri)와 샤를 9세의 누이와의 결혼으로 신구교의 화해의 장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카타리나와 기즈(Giz)가문의 사람들은 결혼식인 1572년 8월 23-24일 바돌로메 축일 밤에 참석한 위그노파들을 학살하는 사건을 벌인 것이다.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서 피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여자들은 몹쓸 짓을 당한 후 살해되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사건이었지만, 교황 그레고리 13세(Gregory XIII)는 이 학살의 날을 축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이란 뜻의 ‘떼 데움’(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라고 말한 후, 특별 감사의 미사를 집전하였다. 이 학살의 날을 기념하여 기념 동전을 주조하기도 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앙리 4세(Henry IV)가 1598년 4월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을 선포 하고 위그노의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겨우 내전이 끝났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학살 사건에 가톨릭교회가 개입되었음을 끝까지 부인해 왔다. 그러다 1997년 8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이 사건에 가톨릭교회가 개입되었음을 인정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오직 용서만이 결실 있는 대화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며 관용을 촉구했다. 십자군 이야기를 쓰면서 느낀 것은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는 자기의 치부를 들어내면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몇 분 안 되는 귀한 어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30년 전쟁(Thirty Years’ War of Religion)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다. 사망자 수는 800만 명이 넘었다.

바쁜 길을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를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선교는 증오로 깊이 파인 갈등의 생채기를 인간의 의지와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본질인 사랑의 성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닌가하는 주제 넘는 소리로 십자군 이야기를 이제 다시 시작하고자한다.

라시둔 칼리파 시대(the rightly guided Caliphs, the righteous Caliphs)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차기 지도자 선출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 문제는 당시 이슬람 사회의 큰 고민이자 이슈였다. 그들의 지도자 선출을 두고 많은 이견도 표출되었다. 메디나 원주민들은 메카에서 무함마드와 함께 온 사람들을 제외시킨 후 독자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아부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오랜 추종자들을 모은 후 메디나(Medina)인들의 회의 장소에 가서 지도자는 둘이 될 수 없고 한명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우마르와 다른 한 사람을 후보로 내세웠다. 무함마드의 사촌 알리는 아니었다. 당황한 우마르는 아부바크르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울면서 호소했다고 한다. 당시 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만장일치로 아부바크르를 칼리파로 선출했다.

무함마드의 사후, 당연히 자신이 칼리파 자리에 오를 것으로 생각한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이기도 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는 많이 힘들을 것이다.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바크르 압달라 빈 아비 쿠하파 알시디크’(Abu Bakr Abdallah bin Abi Kuhafa alSiddiq) 긴 이름의 아부 바크르가 그의 직위를 왕이 아닌 칼리파(Khalīfah)란 칭호를 택했다. 칼리파는 신의 사도의 대리인 이라는 뜻이다. 무함마드가 세상에 없는 동안 그를 대신한다는 당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겸손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를 양손에 가진 지도자였다. 오늘날 이란의 최고 지도자 하메이니(세예드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 Sayyid Ali Hosseini Khamenei)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행동적인 범위는 무함마드가 남긴 정책을 수행하는 선에서 그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시대를 가리켜서 아랍어로 정통 칼리파, 정당한 칼리파 정도의 뜻을 가진 라시둔 칼리파(the rightly guided Caliphs, the righteous Caliphs)시대라고 한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사망 후 나타난 부족들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했다. 그다음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그는 칼리파가 된 지 2년 만에 병사한다.

이번에도 알리는 기대했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언자의 유일한 혈통인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리파 계승자는 역시 예언자의 친구이자 장인이며 후에 이슬람의 바울이라고 불렸던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Umar ibn alKhattāb)가 634년 2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필자는 우마르가 왜 이슬람의 바울인지 그의 행적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칼리파에 오르는 즉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 지역을 정복했다. 이들 지역은 동방 정교회의 주교 교회지역이었다.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킨다.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렇게 넓은 지역을,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를 흡수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의 튼튼한 기초를 놓은 것이다.

그는 ‘꾸란(Quran)’을 처음으로 편집하였다. 또한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622년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메카에서 메디나로 추종자들을 이끌고 피신한 사건인 헤지라(Hejira)를 이슬람 세계의 기원이라고 공포한다. 그리고 피신 중에 뜬 초승달은 우상을 부정하는 이슬람의 유일한 상징으로 선포했다.

644년 우마르가 죽자 알리는 정말 기대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자신이 칼리파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앞선 두 사람의 칼리파는 무함마드의 절친들 이자 장인들이었다. 이제 자신이 칼리파에 오를 것이라고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그의 확신에 찬 기대와 다르게 이번에는 우스만 이븐 아판(Uthman Ibn Affan)이라는 메카의 대부호 우스만이 선출된 것이다.

이슬람 분열의 전조 상황

앞선 두 칼리파보다는 우스만은 사업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메카 최고의 재벌이었다. 거기에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다 가진 남자가 알리를 대신해서 3대 칼리파가 된 것이다. 그는 메카 최고의 귀족인 쿠라이시 부족이자 최고위 가문인 우마이야가인 당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오늘날 아이돌 급의 인기를 가진 남자였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을 주장한 알리(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는 이슬람의 순수성과 변혁을 주장했지만 움마 공동체는 조금 부족하지만 전형적인 부유층인 우스만을 칼리파로 선출했던 것이다.

많은 무슬림들이 환호하는 지도자들 앞에서 그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임 칼리파 우스만에게도 크나큰 약점이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온 사람이었다. 이슬람이 위기에 빠졌을 때 힘들게 싸운 선임 지도자들인 무함마드, 아부바크르, 우마르와 다르게 아내의 병간호를 핑계되고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나아가 이슬람 군대가 패하자 우스만은 무함마드를 버려두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우스만이 칼리파로 선출된 것에 알리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함마드 사망 후 아부 바크르가 혼란에 빠진 메디나 원주민들을 설득할 때 우스만은 아부 바크르에게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지 말라고 심하게 반대를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스만 자신도 무함마드의 다른 측근들보다도 너무도 나약하고 이슬람에 대한 충성과 공헌이 없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 같다. 사실 아부 바크르는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다. 그리고 우마르는 중동 지역의 대부분을 이슬람 화시킨 인물인데, 그는 가진 것 돈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그도 충분히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안타까울 정도로 자신의 재산을 통해서 자선행위와 노예들을 해방시켰다고 한다. 나아가 기도와 단식 등의 종교적인 행동을 강요함으로서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가 유일하게 우스만을 칭찬하는 것은 아부 바크르로부터 내려온 ‘꾸란’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질을 발휘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국가재정을 개혁했다. 국고에 재정이 쌓이자 당시 5000곳에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Mosque)를 설립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핸디캡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혈육들에게만 사적인 총애를 즐겼다고 한다. 그의 혈육들에게 하사금을 주는 것을 즐겼고, 부자 출신답게 혈육을 위한 궁궐 축조에도 열을 올렸다. 이 같은 행위는 우마이야 가문이 이슬람 세계의 공정성을 파괴할 정도로 팽창되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던 사람은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Muawiyah ibn Abi Sufian)이다. 그는 시리아의 영지와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우스만으로부터 하사를 받아 그의 세력은 마치 고려 말기의 정도전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우스만은 처음에 자신의 돈을 국가재정에 투입했지만, 국가적인 규모에 자신의 자산만으로 감당 할 수 없었다. 결국 부족한 부분을 세금으로 대체했다. 결국 부족한 국가재정은 세금인상으로 이어졌다. 세금이 오르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고, 근검한 생활을 하는 무함마드의 혈육이자 지도자인 알리와 우스만의 삶이 비교되었다. 특히 이집트 지역은 우스만에게 불만이 많았다. 이슬람이었던 이집트 병사가 우스만을 살해한다. 우스만은 칼리파로서 이슬람에게 살해당한 첫 번째 사람이 된다. 우스만의 죽음은 이슬람 내전인 제1차 피트나(Fitna)의 이유가 된다.

칼리파 알리와 분열의 서막 제1차 피트나

앞서서 1대 칼리파 아부바크르의 선출 등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알리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도 바른 이야기의 답이 나오지 않을까? 사실 무함마드와 알리의 나이는 사촌간이라고 하지만 30살 나이 차이로 사촌이라기보다, 부자간의 나이 차이였다. 알리가 10살 되던 해에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 카디자에 이어 남자로서는 첫 번째로 무슬림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역사가들은 전투에 앞서 각 진영의 용사 중 한 명이 일대일로 전투를 벌여서 이긴 진영의 전의를 살려주는 전투 풍습이 있었다. 이슬람 진영의 용사는 언제나 알리가 나서서 싸웠다고 한다. 이는 그의 용맹함을 강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때 무함마드가 전사했다는 소문과 함께 이슬람의 전사들이 도주할 때 알리는 끝까지 상황을 수습한 후 그의 사촌이자 지도자를 보호한 용맹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함마드역시 그의 사촌 알리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고 했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사이에 하산 이븐 알리(Hasan ibn Ali)와 후세인 이븐 알리(Hussein ibn Ali) 두 명 밖에 없기에 사후에 그의 후계자는 당연히 알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후계자 경쟁에서 아부바크르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알리가 사망한 무함마드의 유해를 수습할 때 회의를 통해서 칼리파가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슬람 내부에 분쟁이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아부 바크르의 지지 세력은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혈연 관계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무함마드의 혈연관계 및 개별적인 카리스마’는 알리가 세속 군주처럼 군림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지금은 사라져 가지만 한국처럼 나이든 사람을 우대하는 ‘어르신’ 계념의 ‘셰이크(sheikh)라는 단어는 당시 60대의 부족의 지도자들에게 붙는 호칭인데 60에 가까운 아부바크르보다. 30살을 갓 넘은 알리에게는 이 호칭이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후계자 선출로 인해 갈등이 깊어졌고, 아부바크르의 지지자와 알리의 지지자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무함마드 이후의 지도자는 알리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알리의 지지자들은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직위를 인정하지 않고 군사 활동에 돌입했다. 2년 후 아부 바크르가 죽자 알리는 칼리파 선출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우마르를 지지하며 스스로 칼라파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 알리가 칼리파 직위에 오를 경우 일어날지 모를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지지자들과 알리의 지지자들과 충돌과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했다는 의견이 가장 우세하다.

알리는 유력 후보자인 우마르를 지지함으로써 이슬람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우마르는 알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다. 그의 대단한 업적의 결과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알리는 3대 칼리파 우스만에게만큼은 칼리파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 부호 우스만에게 칼리파 선출에서 패하고 만다. (앞서 우스만의 이야기를 하였기에 더 이상 이야기는… .) 우스만을 살해한 폭도들의 추대로 알리가 칼리파에 오른다. 알리는 참으로 뜻밖의 방식으로 칼리파에 올랐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찜찜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알리는 칼리파 등극 후 많은 반대 세력들이 생긴다. 우스만 시대 각종 우대를 받던 쿠라이시 부족은 우스만이 알리에게 중재를 요청했을 때 거절한 이유는 우스만을 암살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주장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이고, 다른 이유는 그들이 기존에 누려오던 여러 특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세속 칼리파 시대의 등장

알리는 움마의 기강이 흐트러진 것을 탄식하며, 기강 회복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그러나 쿠라이시 부족은 알리를 적대시하며 우스만을 살해한사람들의 처형을 요구했다. 견디다 못한 칼리파 알리는 수도 이전이라는 수를 두게 된다. 당시의 메디나에서 메소포타미아 중부 구파(cuppa)로 천도를 명한다. 돌아온 답은 거부였다. 알리는 전임 우스만이 임명한 모든 총독들을 해임시켰다. 반동과 반발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중 에멘 총독은 무함마드의 아내인 아이사(Aisa)에게 접근하여 군사적 지원을 한다. 이로서 제1차 피트나 무슬림 내전이자 우스만 피살 내전(피타나트 무크탈 우쓰만)이 일어났다.

서로가 지하드(jihad 성전(聖戰))을 외치면서 전투에 나섰으나 두 사람은 개인적인 감정보다 이슬람의 공동의 적에게로 눈을 돌린다. 휴전에 들어갔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끝에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이 전투는 낙타전투(Camel Battle)라고 말을 한다. (이유는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전투 현장에 나타났기에)  알리는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알리는 전투의 승리보다는 같은 무슬림을 죽인 죄책감으로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의 큰어머니인 아이샤를 전쟁의 포로로 메디나에 보낸 것 등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다는 것이 이슬람 역사가들의 하나 같은 말들이다.

문제는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무아위야 빈 아비 수피얀Muawiya bin Abi Sufyan)였다. 3대 카리파 우스만의 6촌 동생이기도 무아위야는 공식적으로 알리의 권위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을 새로운 칼리파로 선언했다. 알리는 무아위야와 유프라테스강변의 시핀(Siffin)에서 전투를 벌인다. 양측의 군대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전개했다. 칼리파 알리에게 충성을 하던 급진적인 젊은 군인들은 반발하여 이탈한다. 이후 이들은 ‘무아위야와 같은 반군은 꾸란 명령에 따라 싸워서 극복해야’고 주장하며 ‘카와리지(al-Khawārij)’파를 만들어 알리와 대립한다. 그리고 이들은 알리에게 칼리파에서 하야 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리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카와리지파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알리의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Hassan ibn Ali)를 5대 칼리파로 취임시켰으나 무아위야 1세는 많은 돈으로 그를 매수 했다. (이 사건은 하산 이븐 알리를 5대 칼리파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된다.) 내전에 지친 그는 무아위야의 의견을 받음으로써 기나긴 내전 또는 권력 쟁탈전쟁은 막을 내렸다.

세속화에 깊이 맛 들어 있던 이슬람 제국은 종교라는 의식을 벗어버린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세습 제국인 우마이야 왕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또한 알리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시아(Shia)라고 불렸고, 기존 권위를 따르는 자들은 수니(Sunni)파라 불림으로써 무슬림 세계는 결정적인 분열의 길을 간다. 서로 깊은 증오심으로 복수를 꿈꾸면서… . (다음 호에는 세속적인 칼리파 시대인 무아위야 왕조의 이야기가 나와야 되지 않을까?)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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