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요아닌나

그리스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이제는 바울 사도와 성경적인 지역은 어느 정도 쓴 것 같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적인 도시 이야기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미션저널]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요아닌나 » 김수길 선교사 » 그리스 이야기(27회)  » 요아닌나는 그리스 북서부 서 마케도니아 지역 에피로스 주(州)의 주도(州都)이다. 주변 도시권의 인구는 약 10만 명에 이르는 제법 큰 도시이며, 평균 해발 고도 600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래전 우리 가족이 처음 그리스에 왔을 때 네아 에그나티아(Νέα Εγνατία) 고속도로가 없었다. 사람들의 통행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이곳은 정말 가끔가다가 한 번 정도 지나가는 길이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다가 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요아닌나는 보는 사람 모두가 감탄을 자아낸다. 핀도스 산맥에서 흘러내린 아름다운 호수인 팜보티다 (Pamvotida)를 둘러싸고 펼쳐진 도시와 호수 안에 있는 작은 섬, 저녁놀이 질 때 나 역시 한동안 바라만 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15여 년전부터 고속도로를 이용하기에 그림 같은 풍경은 보지 못한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요아닌나

도시의 공식 이름인 요아닌나(Ιωαννίνα)는 학자들은 아기오스 이오아니스 프로드로모스(Άγιος Ιωάννης Πρόδρομος) 수도원 주변에서 도시가 처음 시작되었기에 세례 요한에게 바쳐진 이 수도원의 설립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수도원의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설은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Ιουστινιανός)가 에우로이아의 주민들을 성안으로 옮겨 요새화하고 당시 그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Βελισάριος)의 딸 요안니나(Ιωάννιν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후자에 더 확신이 간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요아닌나의 역사

요아닌나가 정확히 언제 건설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년~565년)가 지은 “새롭고 요새화된 도시”가 요아닌나인 것으로 지금까지 여겨왔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의 연구로 이 도시는 훨씬 더 오래된 도시라는 것이다. 조사 결과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초기 성터에서 발견된 로마의 장례 기둥과 디오니소스 신상의 머리가 발견되면서 로마 시대에도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 비잔틴유물들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요아닌나

앞서 말했듯이 비잔티움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를 거치면서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슬라브족의 침입으로 슬라브인들이 수십 년 동안 점령했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879년에 이 도시는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1082년에 도시는 성벽을 수리한 타란토(Taranto)의 보에몽(Bohemund) 휘하의 노르만족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십자군이 영토를 분할 하면서 요안니나는 베네치아에 속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에피루스(Ήπειρος)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430년 10월 9일, 시난 파샤(Sinan Paşa) 휘하의 오스만 군대가 도시에 진입하여, 주민들에게 재산과 신앙 등을 지켜주기로 약속한 후 조약을 맺었다. 이 시기에 이곳에 여러 수도원이 세워지고 영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17세기에 오스만 총독은 도시를 재건하려고 했다. 많은 무슬림 기관이 설립되면서 무슬림 인구는 크게 불어났다. 1611년 라리사의 전 주교였던 철학자 디오니시오스(Διονύσιος)는 본명보다도 그의 정적들에 의해 개라는 단어 스카일로소포스(Σκυλόσοφος)로 불렸다.

그는 이 지역에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리스 출신의 예니체리였던 도시의 사령관 아슬란 파샤(Aslan Paşa)에 의해 진압되었고, 디오니시오스는 마지막 유언으로 아슬란 파샤에게 “내 백성을 너의 고문과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싸웠다”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를 당하게 된다. 투쟁의 결과는 기독교는 더욱 혹독한 탄압을 당하게 된다. 성 요한 교회가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살해당했다. 그 자리에 디오니시우스 저항운동을 진압한 아슬란 파샤를 기리는 모스크가 1618년에 세워졌다. 이때부터 터키인과 유대인 가족만이 도시의 성안에 정착했다. 추방된 기독교인들은 성 밖에 새로운 정착지를 세워야했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요아닌나

오스만 제국의 탐험가이자 작가인 에블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가 1670년에 이 도시를 방문하여 “18개의 무슬림 구역과 14개의 기독교인 구역 그리고 4개의 유대인 지역, 1개의 집시 거주지가 있다고” 그의 저서 세야하트나메(Seyahatnâme)에 기록했다. 또한 이 도시는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는 그리스 계몽운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869년의 대화재로 크게 파괴되었다. 1912년에 그리스 군대에 의해 오랜 세월 속에 그리스의 영토로 돌아온다. 대부분 그리스 북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1922년의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이곳에 살고 있던 무슬림 주민들은 떠나고, 대신 소아시아에서 온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그리스 계몽주의 시대와 요아닌나 그리고 알리 파사(Âli Paşa)

오스만 제국 말기에 그리스와 연관된 두 명의 알리 파샤가 등장한다, 먼저 한 사람은 그리스 까발라 출신 모하메드 알리 파샤(Mohammed Âli Paşa)이다. 이 사람은 이집트 총독으로 파견되었지만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여 이집트의 알리 왕국을 건설한다. 1952년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군주제 공화제 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연명 되었던 알리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또 다른 알리는 알바니아 남부 테펠레네(Tepelena) 출신 알리 파샤(Âli Paşa)이다. 일찍 남편을 잃은 알리의 어머니 함코(Hamco)는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산적들을 모았다. 알리 역시 악명 높은 산적이 되었다. 알리는 에우보에아(Εύβοια)(현재명 에비아섬)의 파샤 밑에서 일했다. 델비노(Δέλβινο)의 부유한 파샤와 손을 잡았고 1768년에는 그의 딸과 결혼했다. 부를 축적한 그는 이스탄불에 많은 선물을 보내는 등의 행동으로 중부 그리스 뜨리깔라 지역의 파샤가 된다. 이후 알리는 많은 음모를 꾸미면서 결국은 요아닌나의 파샤가 되었다. 그의 아들 벨리에게 트리칼라를 넘겨주었고, 다른 아들 무흐타르에게는 그리스 남부 레판토의 파샤가 되게 했다. 알리는 많은 정적들과 지배 민족으로부터 암살의 위협 속에서도 그늘 알바니아 엘바산 까지 그의 영역을 확장했다.

알리파샤의 잔혹함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자루 속에 넣어 익사시키는 등 그는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면 오스만의 권력자까지도 살해했다. 그는 루멜리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지만 계속해서 술탄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독립 군주와 같이 행동했고 영국과 프랑스도 그를 그렇게 대했다. 그는 요아닌나를 해상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영국·프랑스, 두 나라와 밀통까지 한다. 1819년 오스만 제국을 중앙 집권화하려던 술탄 마무드 2세(Sultan Mahmud II)는 알리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그에게 암살당했다. 또다시 살인과 음모로 자신을 보호하려던 알리는 아들들과 동맹자들에게 버림받고 결국 섬에서 저항하다 살해당하고 만다.

알리의 긍정적인 면은 그리스인들을 고용하여 그리스식 학교들과 많은 건축물을 세웠기에 알리 시대에 요아닌나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가 건축한 궁정과 많은 건물들은 지금까지도 역사적 가치와 당시의 건축미를 나타내고 있다.

당시 해외에서 비엔나와 부쿠레슈티에서 헬레니즘의 문화를 꽃피울 때 그리스 내부에서는 요아닌나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스 문화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일까 아테네와 데살로니키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대학이 요아닌나 대학이다. 도시는 자연스럽게 올드한 안정미와 젊은이들의 숨결로 활기를 뜨고 있다.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요아닌나

데살로니키에서 네아 에그네티아 도로를 이용하여 두 시간 달려오면 이곳에 도착한다. 아내와 나는 얼마 전에 이곳에 왔었다. 구시가지의 모습은 그리스의 감성이 아니라 터키의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았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들과 모스크 그리고 교회들, 전통 시장 모든 것이 좋았다. 일 인당 2유로만 내고 섬으로 데려다주는 배를 탔다. 10여 분의 항해를 끝에, 알리 파샤 혁명 박물관을 비롯하여 수도원들과 교회가 있는 섬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선착장에는 민물장어 구이집들이 있어, 아주 저렴하게 장어구이로 늦은 점심을 하였다. 잔물결도 없는 잔잔한 호수는 나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알리 파샤의 반란과 총성, 그리고 죽음 같은 역사적인 사건은 역사에 묻어두고 이날 나는 자연만 느꼈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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