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저널]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리로다 » 하박국 3:16~19 »
오늘 본문 말씀을 잠시 설명해 드려야 말씀의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하박국서 1장 6절에는 애굽 군대를 물리치는 상황이 나옵니다. 하박국의 뜻은 ‘껴안다’, ‘품다’라는 말로, 하나님으로부터 환영과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좀 더 쉽게 풀이하면, 다른 이를 사랑으로 격려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BC 625년에서 605년경, 약 20년 동안 지속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때 신(新)바벨론이 갈대아 사람들을 격퇴시키고 왕성한 나라를 이루어갈 때, 이스라엘은 엄청난 위기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하박국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 1장 2절부터 4절까지의 당시 상황을 의미하며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님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노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굳게 행하여졌음이니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 하박국이 얼마나 애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은 매우 어렵고 위기에 처해 있으며, 백성들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시는 말씀을 하박국 3장 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기서 시기오놋(Shigionoth)은 음악적인 용어로, 감동적이며 승전가처럼 부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기도의 노래인데, 이 기도를 낙심한 자처럼, 쇠약해진 자처럼, 패잔병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시기오놋의 말씀처럼 감동적이며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개선군이 돌아와 승전가를 부르듯이 이 기도를 올리라는 말씀이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사를 넘어 기쁨과 춤으로
우리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미국은 11월 셋째 주일을 ‘땡스기빙 데이(Thanksgiving Day)’로 지키며 휴가를 가고, 여행을 가고, 교회들마다 대축제 분위기를 만듭니다. 우리나라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지만, 한국적인 풍속 신앙으로 정착하기 위해 추석 명절을 추수감사절로 지내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11월 셋째 주일에 드리던 추수감사절을 10월 마지막 주로 정했습니다. 곡식을 다 먹고 난 다음에 감사하는 것보다는, 첫 수확을 거두어 10월 셋째 주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10월 마지막 주에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 늘 감사에 대한 설교를 듣고, 설교를 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이 시사하는 내용은, 하박국 선지자가 감사를 넘어서 기뻐 뛰며 노래하고 춤추는 감사제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3장 1절은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도를 드릴 때에도 감동적이며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올려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1장 1절부터 4절까지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인 3장 17절에서 19절에 기록된 부분은 크게 대조를 이룹니다. 정반대입니다. 1장 1절에서 4절의 내용에서는 하박국이 주의 환경에 의해 국가적으로, 지역적으로 압도되는 상황에 있습니다. 하박국은 백성들에게 보이는 부정과 폭력을 보고 낙심합니다. 국가는 위기에 처해 있고, 백성들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데도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무심하신 것 같습니다. 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냐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올려 드린 기도는 1장 2절부터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이 기도는 낙심하고 무심하다고 생각하던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애절한 기도입니다.
환경에 개의치 않는 신앙의 결심
그러나 3장 17절에서 19절에 가서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더 이상 환경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깊이 매이지 않으며, 세속적인 사고에 지배받기보다는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기로 결심하고 각오하며 다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신앙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16절은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속이 썩고 내 뼈에 들어와 사무쳤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고통스럽고 떨리는 상황이지만, 그의 신앙의 결심은 대단합니다.
오늘 17절부터 19절에 기록된 하박국 선지자의 결심과 각오, 다짐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서 “사슴과 같게 한다”는 말은 사슴이 정결한 동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를 묘사할 때 사용된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정치 정세를 보십시오. 지금 이 나라는 비정상이며 국민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알면 알수록 불안하고, 하박국 선지자처럼 마음이 떨리고 입술이 떨리는 시국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감사하라’는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라는 말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깊이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타낼 수 있는 신앙적인 태도, 자세, 입술의 고백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진정한 감사가 가슴에 넘쳐나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박국 3장 18절에 나오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는 히브리어 원어로 신뢰와 소망하는 대상에 대하여 확신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국가가 위기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신뢰하고 소망을 갖는다고 고백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영어로 표기된 구절을 보면,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격한 몸짓으로 몸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쁨에 춤을 추고 뛰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환경에 개의치 않고 기뻐하며 춤을 출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쁠 때만, 즐거울 때만, 평안할 때만, 잘 나갈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먹을 것이 없고 소출이 없고 열매가 없고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은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물질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물질이 넘쳐날 때 기뻐하고, 건강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건강이 회복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관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가치관이며 추구해야 할 방향입니다.
하박국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고 불안에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사로 신앙의 결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세상 환경이 넉넉하지 못할지라도, 건강하지 못할지라도, 풍성하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감사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3장 13절에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돈이나 권세, 권력, 건강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며칠 전 조선현 집사님 친정 모친 권사님이 소천하셨다는 부고를 받았습니다. 칠남매와 며느리, 사위, 20명이나 되는 손주들이 모두 생존해 있는 것을 보며, 저는 조화에 ‘축 천국 입성’을 쓸까 고민하다가 혹시 불신자가 보고 마음에 부담을 가질까 봐 ‘천국 소망’이라고 썼습니다. 이 땅의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고,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같고, 이슬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눈물과 애통, 곡함이 없고 하나님이 친히 빛이 되어 주시는 영원한 천국, 하늘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 3장 13절에서 말하는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이며, 주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 함입니다.
하박국서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선지자, 제사장, 왕직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직접 나아갈 수 있고, 그분께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세상 풍습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와 비교해 보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으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입술로만 감사가 아닌,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를 이런 환경에 두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마땅한 일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지름길
우리는 건강해서가 아니라, 많은 재물을 취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출세해서가 아니라, 내 소원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 중에 살아가는 성도이기 때문에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감사가 넘쳐나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 땅에 존재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피조물인 나는 창조주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도리를 망각한 처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언제나 감사만 하면 모든 세상 명약보다도 위대한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뉴욕의 한 장로님은 “회춘하는 약을 날마다 복용합니다. 그 약은 신약과 구약이며, 그리고 감사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날마다 먹으면서 감사만 하면 인생이 늙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로마서 1장 18절에서 21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 미련한 마음이 막혀 어두워집니다. 우리는 진노를 막기 위해서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일반 은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인이나 의인이나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은 햇빛과 비와 공기를 주십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조건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한다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로 인해 구원받아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성도는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영원히 해방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특별 은총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감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감사를 노래하는 자를 넘어 춤을 추며 기뻐 감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도 감사를 실천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열 자녀를 잃고 몸에 병이 들었어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며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신실함을 보시고 갑절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고 목숨의 위협을 받는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감사는 은혜이고, 진정한 능력이며,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시편 50편 23절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50편 14절에서 15절에서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소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일이며,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네 가지를 돌아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날마다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상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며 사는가, 아니면 잊고 사는가? 우리만 바라보고 사신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에 감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잊고 살고 있는가? 부모의 은혜를 잊으면 불효자가 됩니다. 스승의 은혜를 잊으면 배은망덕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민족의 정체성을 갖게 해 준 나라와 민족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며 충성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단 사설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헌신하고 수고한 믿음의 선진들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삶의 찬양과 감사를 회복하는 추수감사절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의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기뻐 감사하며 고백했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된 제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동영상 말씀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Ocrcl8ymeo4
핵심 키워드:
초월적 감사, 하박국의 신앙, 구원의 하나님, 믿음으로 사는 의인, 은혜에 대한 보답
해시태그
#범사에감사하라 #환경을뛰어넘는기쁨 #하박국고백 #하나님의선하심 #감사는필수
필자 강헌식 목사/ 본지 목회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