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로마 분열의 역사

십자군 이야기를 하려다 초기 로마 제국의 분열을 이야기 하게 되었다. 이번 장에서도 분열의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썰은 썰이 되어야 ‘이야기’라는 주제어에 걸맞지 않은가? 하여 이번 썰의 주인공은 두 인물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것이다. 지난 호에는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의 플라비아누스 왕조(Flavian dynasty)의 태동을 이야기하면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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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야기의 주제는 플라비아누스 왕조를 실제적으로 정착시킨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를 이야기 하고 싶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생전에 콜로세움 건설을 시작했다. 자연재해도 그리 없었다. 전임자들과 다르게 암살과 반란 등 살해 위협도 없었다. 그리고 수명을 다한 후 그의 아들에게 황위를 처음으로 물러준 어찌 보면 운 좋은 황제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 제국의 열 번제 황제 티투스(Titus)

오늘날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를 대표하는 렌드마크는 아마도 콜로세움이 아닌가 한다. 그 건축물 옆에 유대를 멸망시키고 돌아온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이 2000년의 역사를 품고 멋들어지게 세워져있다. 개선문의 정중앙 상단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신격 베스파누스의 아들 신격 티투스 황제에게”(SENATVS POPULVSQUE ROMANVS DIVO TITO VESPASIANIF VESPASIANO AVGOSTO)라는 개선문의 설립 목적이 기록되어져 있다. 문맥상 이 개선문은 그의 사후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생전이 아닌 사후에 이런 건축물이 세워질 정도로 로마시민들이 티투스를 생각했다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티투스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 경우이다. 앞선 로마 왕조를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라는 이름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율리우스 즉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이름이다. 옥타비안은 아들이 없었다. 그의 아내가 결혼할 때 데리고 온 양아들 티베리우스(Tiberius)에게 양위한다. 이것은 그의 아내 드루실라의 가문인 클라우디스( Claudius)가문과 옥타비안의 율리우스(Julius)가문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래서 등장한 이름이 옥타비안의 율리우스와 드루실라의 클라우디스 왕조이다. 이들은 한 번도 자녀에게 황제의 양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플라비아누스 왕조의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티안 황제의 사후에 황제에 오른다. 공화정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티투스는 아버지와 동업자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아버지가 남겨준 유대진압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더불어 로마를 건설하는 ‘암피테아트룸 풀라비움(‘Anfiteatro Flavio’)을 완성했다. 그는 AD 70년에 반로마세력인 유대와 예루살렘 정벌에 나선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유대 진압의 기념품으로 남겨 놓은 성전 서쪽의 성벽을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이라고 오늘까지 부르고 있다.

110만 명을 학살한 후 10만 명의 유대인을 개선식 포로로 끌고 왔다. 그중 4만 명은 콜로세움과 로마를 건설하는데 혹사를 시켰다. 그러나 79년 베수비오(Vesuvius)화산의 대폭발이 일어난다. 폼페이시(市)를 비롯한 캄파니아 지방의 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등이 매몰되었다. 그 다음 해인 80년에는 로마에서 4일간 진행된 대화재, 그 뒤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태는 그의 의지와 달리 로마를 리모델링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는 재난의 현장에서 보내야만 했기에 개인적인 여가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이런 이유일까? 후일 로마인들은 그의 사후에도 그를 칭송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티투스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가 사랑한 베르니케(Wernicke)때문이다.

티투스와 베르니케

베스파시안과 티투스는 유대 항쟁을 해결하기 위해 아그립바 2세를 만나러 간다.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아그립바의 여동생 베르니케를 만났다. 베르니케는 헤롯 대왕의 증손녀이다. 헤롯은 미리암의 아름다운 외모에 그의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미리암과 결혼한다. 미를 숭상한 헤롯 가문가 자녀답게 40에 가까운 베르니케에게 사별과 이혼을 한 티투스는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베스파시안은 아들의 사랑이 일시적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이 로마에 근심거리로 자리 잡는다.

이유는 율리우스 시저가 그의 애인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데리고 왔을 때 로마는 혼란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역시 티투스가 베르니케를 데리고 왔을 때, 로마인들은 옛날 시이저와 클레오파트라를 생각하면서 극렬하게 반대를 하게 된다. 베르니케는 누구인가?

로마의 캐스팅 보드를 쥐고 두 명의 황제 선출에 앞장서서 살아있는 메시아로 칭함을 받았던 사람이 아그립바 1세(Agrippa I 행전 12:21-22)이다. 그의 자녀로는 아그립바 2세와 베르니케 그리고 드루실라(Drusilla)이다. 사도행전 25장 베스도를 방문한 아그립바 2세와 버니게 (13-22절)가 등장한다. 새로운 로마총독 베스도를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베스도 전임 벨릭스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는 이들의 막내 여동생이다.

베르니케가 오늘에 살았다면 인터넷의 각 포털 사이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두 번을 결혼했다. 첫 결혼은 그녀의 삼촌 할카스(Halkas)의 왕 헤롯과 결혼 후 사별을 했다. 두 번째는 그냥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와서는 그녀의 오빠 아그립바 2세와 동거하는 상태였다. 근친과 불륜, 당시에도 이런 생활은 대중의 심심풀이 땅콩과 같은 소재였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 드루실라 역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듭한 결과 로마총독 벨릭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아그립바 2세는 친 로마정책으로 유대 멸망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티투스는 유대를 정복한 후 개선식에서 베르니케와 결혼하려 했으나, 베스파시안의 반대로 포기하고 아버지가 죽고 난 후 황제가 되면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다. 기회를 노렸지만 로마시민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티투스는 베르니케와 결혼을 원했지만 원로원과 시민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티투스는 결국 로마시민들의 마음을 받아드렸다. 율리우스 시이저와 클레오파트라 스캔들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마크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정적인 옥타비아누스의 쪽으로 투항한 사건까지도. 결국 결혼을 하지 못한 베르니케의 말로(末路)는 말을 하지 않아도… .

갈레리우스 황제의 스켄들 ‘기독교 박해’

초대교회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는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면서 시작된 네로의 박해이다. 그 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 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이 박해를 당했다. 81년부터 96년까지이다. 112년 경 비시니아(Bisiniana)지방 총독으로 플리니(Plinio)가 부임했을 때 이교도들의 신전들은 텅텅 비었고, 제물로 쓰인 짐승들의 고기는 매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화 되었다. 교회를 증오하는 자의 고발로 총독은 기독교가 불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결과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고 트라야누스(Traiano) 황제에게 그는 서신을 보낸다. 신실한 제국의 시민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박해는 결국 비시니아 지방에만 속한 되었다.

그 뒤 249년 데키우스(Decius) 황제는 제국의 모든 시민들은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 후 증명서를 받는 법을 공포한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거부함으로서 251년까지 박해를 당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황제는 311년까지 가장 혹독한 박해를 단행한다. 칙령을 통해서 예배금지와 처형을 단행했다. 필자가 왜 십자군 이야기에 초대교회 박해를 이야기하는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사족을 단다면 갈레리우스 이야기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갈레리우스(Galerius)는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ziano)황제에 의해 제국의 동방지역 부 황제에 임명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Valeria)를 얻기 위해 본부인과 이혼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선동하여 기독교 대 박해를 진행한다. 장인이 305년 황제 퇴위 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클로루스(Chlorus)와 함께 정제(正帝)로서 동부(東部)를 통치, 309년 중병에 걸려 311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 중지령을 내렸다. 사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아니라 갈레리우스의 박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분열의 시작(사두정치체제)과 갈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광대한 제국을 한사람이 통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285년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은 후 이듬해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쪽을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쪽을 관활하였다. 293년에는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정치 체제를 이룬다. 네 명이 다스리는 정치상황을 즉 테트라키아 (사두정치 체제 Tetrarchia)라고 불렀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진행한 정치 개혁으로 인하여 로마는 그동안 지켜왔던 수도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서로마 황제들은 밀라노와 라벤나 등에서 거처를 만들고 통치를 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Galerius Maximianus)는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그의 수도로 정했다.

갈레리우스는 305년부터 장인의 뒤를 이어받아 311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불가리아 소피아 인근의 목동을 아버지로 둔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탁월한 군대 경력은 많은 이들로부터 인정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 정치 체제를 수립할 당시 293년 3월 1일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함께 부제(Caesar)로 임명되었다.

그는 사산 왕조(페르시아)의 나르세스 1세(Narses I)를 상대로 사탈라(Satala)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둔다. 305년 갈레리우스는 장인이자 동부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서부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의 동시 은퇴로 그는 장인을 이어 제국의 동부의 정제(Augustus)가 되었다. 동시에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도 서방 정제가 되었다. 이 사실은 새로운 2차 정치의 시작인 셈이다. 그러나 제국 안에 두 명의 정제는 새로운 분열을 가져온 계기가 충분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외 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를 동방지역 부제, 자신의 신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Valerius Severus)를 서방 부제로 임명한다. 306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1세(Constantine I)가 군대를 일으켜 브리튼 지역에서 황제로 추대된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서방 부제로 인정해준다. 기존의 부제였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 정제로 승격시킨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이었던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콘스탄티누스가 서방 부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이 서방 정제라고 칭한 후 이탈리아를 공격한다.

분열과 혼란이 이어지자 308년 갈레리우스는 장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외 조카 막시미아누스와 회담을 벌였다.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의견대로 은퇴를 약속했다. 서방 정제 는 갈레리우스의 친구였던 리키니우스(Licinius)가 되었다, 이 일은 콘스탄티누스 1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이 결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311년 갈레리우스는 중병에 걸려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관용을 허락하고 6일 후에 사망했다. 사두정치의 정점이었던 갈레리우스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이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수도 이전의 상황도 더욱 숙성해 간다.

사실 우리는 로마제국의 수도 이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이전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전임자이자 사두정치의 핵심이었던 갈레리우스는 이미 테살로니키에 그의 왕궁 그리고 그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나르세스 1세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으로 갈레리우스 아치(Arch of Galerius 개선문)를 세웠다. 그리고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한 그의 무덤인 로돈타(Rotonta)를 건설했다. 이 같은 상황은 콘스탄티누스 역시 새로운 수도의 이전을 실제적으로 계획하게 된 것이다.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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