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저널] 4인(人) 4색(色)의 2차 십자군 운동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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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크(Fulk d’Anjou)의 죽음, 그리고 그의 아내 멜리장드(Melisende)의 섭정
예루살렘 왕국 보두앵 2세의 사위인 예루살렘 왕국의 네 번째 군주 풀크는 1143년 11월 사냥 도중 낙마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풀크의 사망 이후 왕비 멜리장드는 아들 보두앵 3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왕국을 통치하게 된다.
자꾸 영화 이야기가 못마땅한 독자도 있을 줄 안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필자는 영화라는 장르가 그래도 기억에 남아있기에 다시금 인용하려고 한다. 영화 속의 보두앵 4세(Baldwin IV)의 여동생 시빌라(처Sibylla)처럼 그녀는 여성 군주로서 귀족 세력과 미묘한 균형을 맞추어 나갔다. 그리고 외부의 위협에도 강함으로 대응해 나가야만했다. 1144년,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Atabeg)였던(아베타그는 아버지 같은 영주, 또는 왕자의 스승인 섭정(tutor of princes)라고 불렸던 장기(Imad ad-Din Zengi)가 에데사 백국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에데사의 함락은 십자군이 세운 국가들 중 최초의 멸망 사례였다. 이는 예루살렘 왕국과 서방 기독교 세계 전체에 충격과 경각심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Eugenius III)는 에데사 함락은 기독교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이 도전에 대한 응답은 1147년 시작된 제2차 십자군의 운동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이어진 십자군운동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기독교 국가들을 세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제2차 십자군은 유럽의 군주들이 직접 참여한 최초의 대 원정이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3세(Conrad III)가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또 다른 한 인물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라(Bernard of Clairvaux)이다.
베르나르는 유명한 설교가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꿀처럼 달콤한 박사(Doctor Mellifl uus)였다. 그는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의 부탁으로 유럽을 돌며 제2차 십자군 참여를 호소한다. 특히 프랑스의 루이 7세(Louis VII), 신성로마 제국의 콘라트 3세(Conrad III)가 십자군에 나서도록 설득했다. 결과적이지만, 2차 십자군 운동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이번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말한 루이 7세 콘라드 3세 그리고 당시 최고의 설교가인 베르나르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마누일 1세(Μανουήλ Α΄)등이 어떻게 2차 십자군 전쟁을 진행했는지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첫 번째 사람, 왕관을 쓴 수도승, 루이 7세
어떤 이들은 루이 7세를 가리켜서 십자가를 짊어진 군주라고 부른다. 이유는 루이 7세는 본래 왕이 될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뚱보 왕이라고 부르는 루이 6세의 차남으로 1120년 루이 7세는 태어났다. 그의 형 필립이 이미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차남인 루이는 일찍이 종교의 길을 걸으려 했다고 한다. 세속의 권력보다 신앙에 마음을 두었다. 시간이 지난 뒤 그의 선택을 보면, 마치 세종대왕의 둘째 형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일찍이 불교에 귀화 한 것처럼 루이는 어린 시절부터 왕이 아닌 수도사로 살기를 원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형 필립이 1131년 죽었다. 혼자 남은 루이가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1137년 아버지가 죽은 후 겨우 17살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던 루이는 루이7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왕관을 쓴 왕이 되었다. 정치는 마음에 없었기에 그는 죽는 날까지 믿음과 왕이라는 정치 사이에 모순 속에 살았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남서부 광활한 지역인 아키텐(Aquitaine)의 엘레오노르(Eleanor)와 결혼한다. 당시 가장 자유분방한 그녀는 아키텐 지역을 지참금으로 가져왔기에 루이7세의 카페 왕조는 영토 확장과 국력을 강화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보다도 수도사에 마음을 두었던 루이7세의 부부사이에 많은 문제를 드려내었다고 한다. 엘레오노르는 나는 프랑스 국왕과 결혼했지 수도사와 결혼하지 많았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을 보면 부부사이에 정말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 상황이다. 엘레오노르는 남편과 함께 2차 십자군 운동에도 직접 참여한다.
그러나 그녀는 루이 7세와 정치적인 불화와 요즘 표현으로 이혼소송에 흔히 사용되는 성격차이와 그리고 루이7세가 주장한,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가 포함된 일들로 그들은 이혼을 하고 만다. 이 이혼에는 교황 인노첸티우스 2세 (Innocent II)가 직접 승인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은 그녀가 이혼 직후 2년 후 영국 왕이 된 헨리 2세(Henry II)재혼한다. 이 결혼으로 사자심왕 리처드 1세(Richard the Lionheart)와 존 왕(John Lackland)을 비롯해 8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오늘날 표현으로 핵폭탄 급 스켄달 이었다.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와 결혼으로, 아키텐과 노르망디, 앙주 등 헨리 2세의 영지가 합쳐져, 앙주 제국(Angevin Empire)이 형성되어, 루이 7세의 프랑스를 위협한다. 결국 루이7세의 종교적 기질은 그의 결혼관에서도 정치적인 중대한 실패를 한 것이다. 루이의 신앙심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다른 예는 그가 통치하던 1142년 샹파뉴 백작과의 전쟁 중에 비트리(Vitri)라는 마을에서 대참사가 벌어졌다.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서 성당으로 피신했다. 그 성당은 불길에 휩싸여 천명이 넘는 인원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지만 심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십자군 원정은 정치적 명분뿐만 아니라, 죄책감에 힘들어 하던 그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아이를 사산하고 자살한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 발리안이 수도원에 감금 되어 있던 중 한 무리의 십자군이 마을을 방문한다. 그 덕에 대장장이인 발리안은 풀려났다. 기사들의 장비들을 손봐주게 되고, 발리안의 어머니를 버리고 십자군에 참전한 아버지 고드프리를 만나게 된다.
고드프리는 발리안에게 용서를 구하고 같이 가길 원하나 삶의 의미를 잃은 발리안은 동행을 거부한다. 기사들이 떠난 밤 발리안의 형제이자 아내를 묻은 수도사가 찾아와 발리안에게 떠날 것을 종용하는 중 수도사의 목에 걸려 있는, 아내에게 걸어준 십자가를 보고 분노한다. 수도사는 자살은 죄악이고 발리안의 아내는 자살했기에 목을 자르고 묻었을 뿐이라 항변하지만 발리안은 그를 찌르고 화덕에 넣어 태워 버린다. 너무 비약된 표현일 까? 루이 7세의 가책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제 다시 역사 속으로, 에데사 함략 후 예루살렘 왕국의 사절 위그 드 자발라(Hugues de Zavala)가 서유럽에 도착해 십자군 국가들의 위기를 호소한다. 그리고 교황의 십자군모병을 호소하는 칙령(Quantum praedecessores)을 반포한다. 루이 7세가 1145년 크리스마스에 십자군 참전을 선언하게 된다. 루이는 십자군을 모병하기 위해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를 불러들였다. 베르나르도의 열정적 설교는 군중을 흔들었다. 루이7세와 엘레오노르, 그리고 많은 수의 귀족들이 십자군에 뛰어들었다.
같은 시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콘라트 3세도 참전을 약속하면서 1차 십자군과 다른 제2차 십자군은 거대한 규모의 원정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의 두 왕이 직접 이끄는 전쟁, 사람들은 제1차 십자군의 영광을 다시 기대했다. 루이7세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떠났다. 하지만 그 결과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였다. 완전한 패배, 그러나 그는 실패의 기록으로만 남지 않는다. 왕이었으나 수도승 같았던 사람, 정치보다 신앙을 앞세운 군주, 패배 속에서도 속죄와 믿음을 붙들었던 순례자 루이 7세는 그런 인물이었다. 왕관을 쓴 수도승 루이7세, 이 같은 점이 1차 십자군과 2차 십자군의 차이였다.

십자군 영화 장면과 루제로의 무덤, 루제로가 그리스도로부터 제관을 받는 모자이크. 팔레르모 소재, 로게리오스 왕(Rogerios Rex)이라고 묘사되어 있음.
두 번째 사람, 성급한 황제의 선택, 콘라트 3세 (Conrad III)
당시 유럽에서 강대한 나라인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왕들이 십자군에 직접 출전했다는 것은 놀랍고, 전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명의 왕들이 가진 각각 다른 성격과 그들의 리더십은 2차 십자군 전체의 승패를 가르는 결과였다.
특히 콘라트 3세의 성급한 선택은 2차 십자군 원정전체를 실패라는 결과를 남겼다. 콘라트 3세는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 최초로 제국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교황에게 황제 대관식을 받지 못했기 때4문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Holy Roman Emperor) 아닌 로마인의 왕(King of the Romans)으로 불렀다.
당시 신성로마 제국 내에서는 슈타우펜(House)가문과 벨프(Welf)가문과의 대립1이 치열했다. 콘라트 3세는 슈타우펜 가문 출신으로, 113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순탄하지 않았다. 제국 안에서는 가문간의 대립은 치열했다. 교황으로부터 황제권도 안정 받지 못한 상태였다.
더욱이 시칠리아의 루제로 2세(Ruggero II di Sicilia)의 세력 확장은 교황이 두려워할 정도로 급격했다. 노르만인 출신의 시칠리아의 왕으로 1105년 시칠리아 백작부터 시작하여 1127년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Duke of Apulia and Calabria), 1130년에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모두에게 큰 위협이었고, 교황은 콘라트 3세가 유럽 내 균형을 유지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같이 내외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콘라트 3세가 십자군 원정에 직접 나서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정치적으로 위험한 선택이었다.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도 불분명한 가운데 그는 수많은 제후와 귀족들을 이끌고 성지로 향했다. 이 같은 결정은 그가 얼마나 성급한 성격인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다급한 가운데서 신중함이 아닌 성급한 그의 성격이 나타나는 본보기가 되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2차 십자군 원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1146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군중들에게 설교를 할 때, 콘라드 3세는 큰 감동을 받았다.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무릎을 꿇었고, 베르나르도에게 직접 십자가를 받으며 원정 참가를 서약했다.
아마 그는 황제로서 신앙적, 정치적 권위를 나타낼 기회이자, 그리고 자신에게 황제의 관을 주지 않은 교황과의 관계를 개선할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일은 제국 내부에 불안의 불씨를 남겨두는 결과가 되었다.
1147년, 콘라트 3세는 약 2만 명의 신성로마제국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는 프랑스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1세는 1차 십자군의 약탈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2차 십자군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외교적으로 불필요한 충돌을 원치 않았기에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소아시아지역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콘라드 3세는 안전한 해안도로 보다 위험이 큰 내륙도로를 선택했다. 1차 십자군 경로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하지만 술탄국은 1차 십자군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미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신성로마 제국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릴라이움(Δορύλαιο)부근에서 제국군은 룸 술탄제국군의 기병대에 의해 포위되었다. 그리고 전투 후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2만의 군대 중 2천명만 남았다. 콘라드 3세도 겨우 니케아로 회군했다. 궤멸에 가까운 패배는 2차 십자군 전체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 신성로마제국군의 패배로 2차 십자군의 전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리고 루이 7세의 프랑스의 십자군은 단독에 가까운 원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콘라드 3세는 패배로 인해서 병을 얻었고,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동로마 제국의 마누엘 황제는 병에 걸린 그를 지극한 간호와 도움을 주었다. 콘라드 3세는 병에서 회복되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다.
프랑스군과 신성로마제국군의 십자군은 신성로마제국군의 패배가 너무도 충격적이었기에 콘라드 3세에 대해서도 그의 선택이 너무도 잘못되었다는 불만만이 가득했다. 그는 선박으로 예루살렘으로 이동한 후 루이 7세와 합류했다. 그러나 2차 십자군의 양대 지도자로서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고, 자신역시 실의에 빠진 상태였다.
루이 7세와 보두앵 3세(Baldwin III)그리고 함께 모인 십자군들은 에데사 수복을 포기한다. 에데사를 대신하여, 다마스커스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가장 잘못된 선택이었다. 왜냐면 다마스커스는 예루살렘왕국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슬람 군과 맞서는 중요한 완충지대였다. 그리고 공격역시 4일 만에 실패로 끝났으며, 신성로마제국 십자군은 아무 성과도 없이 콘스탄티노플로 철수를 해야만 했다.
콘라트 3세와 강화시키면서, 신성로마 제국의 골칫거리인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를 견제할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십자군 지도력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처음 콘라트 3세는 신앙적인 열정으로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상황을 무시한 성급한 선택으로 신성로마제국군을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제2차 십자군 전체의 패배와 실패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콘라드 3세의 행동은 중세 유럽의 군주적 지도력의 한계를 잘 보여주었다. 특히 콘라트 3세의 도릴라이움 패배는 한사람의 판단이 신성로마 제국군전체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리고 2차 십자군의 운명까지도 말이다.

독일, 프랑스, 예루살렘의 세 왕이 내린 결정. 마누엘 캄노니스 황제,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장 푸케-15세기).
세 번째 사람, 신앙의 열정과 역사적 한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제2차 십자군은 민중 십자군 등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1차 십자군과 달리 단순한 군사 원정이 아니었다. 엉터리 사이비가 아닌 정상적인 신앙과 당시 유럽의 강대국 두 나라의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었다.
중세 유럽은 종교와 정치가 긴밀히 얽혀 있던 시대였다.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적 기관을 넘어 문화, 교육, 정치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에서 탄생한 인물들이 교황과 군주들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12세기의 수도사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탁월한 영성과 신학적 통찰, 그리고 시대를 흔든 정치적 개입으로 인해 중세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단순히 한 수도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유럽 교회 전체를 이끌고 움직인 마지막 교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베르나르는 1090년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지방의 퐁텐레디종(Fontaine le Dijon)에서 태어났다. 1113년, 그는 자신을 따르는 31명의 귀족 청년들과 함께 시토(Shito)회 수도원에 입회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부르고뉴 지역 귀족 사회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베르나르는 이미 젊은 나이에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영적 지도자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었다.
1115년, 시토회의 총장 스티븐 하딩은 베르나르를 새로운 수도원의 지도자로 임명했다. 베르나르는 트루아 근처의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을 클레르보(Clairvaux)밝은 골짜기라고 불렀다. 그는 초대 수도원장으로서 공동체를 이끌었는데, 지나치게 혹독한 금욕 생활로 동료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점차 규율을 현실적으로 조정하면서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잡았고, 이를 통해 수도원의 내적 결속을 강화했다.
그의 지도력 아래 클레르보 수도원은 빠르게 성장했다. 수도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수도원들이 설립되었고, 시토회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시토회를 단순히 베네딕토회의 분파로 보기보다, 베르나르의 삶과 영성으로 대표되는 수도회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토회는 흔히 베르나르도회(Bernardines)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베르나르는 단순한 수도원의 행정가가 아니라, 탁월한 신학자이자 신비가였다. 그의 저서 ,신애론(De Diligendo Deo)과 아가서 강해(Sermones in Cantica Canticorum)는 오늘날에도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는 사랑과 은총을 중심으로 신앙을 이해했으며,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중세 유럽 전역에 확산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서방교회에서는 성인 반열에 올려 진 인물이다.
그의 문체는 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이었다. 신학을 학문적 논증을 넘어 감각적, 미학적 세계로 확장시켰다. 그 결과 그는 당대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비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베르나르는 수도원의 경계를 넘어 교회와 정치 전반에도 깊이 개입했다.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Honorius II)가 사망한 뒤 교황 직이 두 명으로 분열되었을 때, 그는 강력하게 인노첸티우스 2세(Innocent II)를 지지하며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 2세(Anacletus II)를 밀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권위는 교황의 정통성을 결정할 정도로 막강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와 수도원
1145년, 그의 제자였던 피사 출신의 성직자가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Eugène III)로 선출되었다. 교황은 베르나르에게 제2차 십자군 설교를 위임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을 돌며 열정적으로 설교했고,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 같은 군주들이 그의 호소에 응했다. 그러나 베르나르도의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었다. 그는 군대를 모집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략적 목표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십자군의 대의는 뜨거웠지만, 실제 목적은 모호했다.
베르나르도의 설교는 열정을 불러일으켰지만, 구체적인 방향성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는 훗날 원정이 혼란에 빠지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는 설교자로서 자신이 불러일으킨 열정이 실패로 귀결된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이 실패를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의 세계의 죄로 해석했다. 유럽이 하느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했기에 승리를 허락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해석은 신학적으로 일관성을 지녔지만, 현실적으로는 원정 실패의 책임을 회피한 셈이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제2차 십자군을 가능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그의 설교와 영적 권위는 유럽의 왕들을 움직였고, 대규모 십자군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십자군의 한계를 상징한다. 신앙의 열정은 있었지만, 전략적 현실 인식은 부족했다.
베르나르도의 이야기는 십자군 운동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십자군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신앙과 정치, 영혼의 구원과 현실적 이해관계가 얽힌 복합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 열정이 방향을 잃을 때, 십자군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구주를 생각할 때면‘ 찬송가 85장을 우리가 지금도 부른다. 그의 영성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제2차 십자군의 맥락에서 그는 불을 지폈으나 길을 제시하지 못한 지도자로 평가될 수 밖 에 없었다. 그의 열정은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의 힘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네 번째 사람, 냉정한 현실 정치가, 마누일 1세 콤니노스(Μανουήλ Α’ Κομνηνός)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광대한 영토와 문화적 유산과 역사를 자랑했다. 그 내부는 불안했고 외부의 위협은 끊임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위를 이은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는 신앙의 이상보다 제국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냉정한 현실 정치가로서 유럽의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그의 아버지 요아니스 2세 콤니노스(Ιωάννης Β΄ Κομνηνός)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그는 1차 십자군시절부터 십자군에 대한 이미지는 곱지 못했다.
1147년 제2차 십자군이 유럽에서 몰려왔다. 명분은 에데사 함락에 대한 보복과 성지 수복이였지만, 그러나 마누일 1세는 2차 십자군을 협력자로 보지 않았다. 서방 군주들의 속셈은 언제든지 동로마의 제국의 영토와 부를 탐낼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룸 술탄국과 정전 협정을 맺어 동부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는 십자군이 지나가는 동안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기 위한 치밀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선택은 곧 십자군 지도자들의 불신을 불러왔다. 동로마 제국의 이러한 행동은 무슬림과 손잡은 배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십자군 중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였다.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신성로마제국군은 제국 영토를 지나며 약간의 약탈과 무질서를 일삼았다. 제국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자 마누일1세는 신성로마제국군을 반강제로 소아시아로 안내했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준비가 되지 않은 신성로마제국군은 도릴라이움에서 룸 술탄국과의 전투에서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루이 7세의 프랑스군에게는 극진한 환대가 주어졌다.
마누일1세는 그들을 제국의 손님으로 맞아 안전하게 길을 열어주려 했다. 그러나 루이 7세는 곧 황제를 의심했다. 마누일1세가 술탄과 맺은 협정은 프랑스군의 눈에는 동로마제국의 배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협력의 기회는 끝내 불신으로 무너졌고, 동로마 제국과 십자군 사이에는 깊은 갈등의 골이 생겼다.
마누일1세의 선택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었다. 그는 제국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2차 십자군의 수만 명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그의 눈앞의 현실은 동로마제국을 지켜내는 것이었고, 그는 그 임무를 냉철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좀 더 멀리 보았을 때, 그의 냉정한 현실 안전정치는 심각한 대가를 낳았다. 십자군의 지도자들과 서방 세계는 비잔티움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이후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의 관계는 협력보다 갈등과 의심으로 점점 기울었고,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비극적 결과의 기초 돌을 놓은 것이다.
마누일 1세는 신앙의 이상을 좇는 수도자가 아니라, 제국을 지키는 냉정한 군주였다. 그의 외교술과 현실 감각은 단기적으로는 뛰어난 방패였으나, 장기적으로는 서방과의 다리를 무너뜨린 칼날이 되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십자군 세계와의 불화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도 평가된다.
마누일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국가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이상을 버려야 할 때, 그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마누일은 눈앞의 제국을 지켜냈지만, 미래의 제국은 지켜내지 못했다. 그의 냉정한 현실 정치 속에는 지도자가 지닌 선택의 무게와, 그 선택이 남기는 역사의 긴 그림자가 함께 담겨 있다.
네 인물의 교차로, 2차 십자군의 패배의 원인
이 네 명의 인물은 서로 다른 성격과 동기를 지녔지만,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2차 십자군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네 사람의 성격은 선택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구조적 실패였다. 루이 7세의 종교적 집착, 콘라트 3세의 무모한 판단, 베르나르도의 열정적 설교, 마누일 1세의 냉정한 현실 정치 이 네 요소가 서로를 보완하지 못하고, 오히려 충돌하며 참패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중세의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신앙 없는 현실은 힘을 잃고, 현실 없는 신앙은 파멸을 부른다.
지도자의 개인적 성격과 선택은 한 시대의 운명을 바꾼다.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네 인물이 각자의 강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협력과 조율로 연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리더십의 분열이 공동체의 몰락을 부른다. 역사적 경고로 읽힐 수 있었다.
표지사진: 클레르보 수도원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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