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탈환과 십자군 국가의 탄생

십자군 국가들이 자리를 잡을 때 대신 그 땅에서 많은 희생과 대가가 뒤 따랐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 하였듯이 그 거룩한 예루살렘 성안에 살던 유대인들은 성인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인들은 강간을 당했다.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안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작별을 고했다. 살아남은 여인들을 인정해야만 민족이 멸하지 않는 처절한 상황과 슬픔 역사를 말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 끝에 태어난 십자군 국가들이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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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사회, 부계에서 모계사회로 변환

구약 성경의 족보는 부계 중심의 족보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땅의 상속과 지파와, 왕위 계승도 모두 남성 중심적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철저히 부계 중심이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시대인 에즈라, 느헤미야에 따르면, 이스라엘 남성이 이방 여성과 결혼했을 때 자녀의 종교적 정체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에즈라, 느헤미야시대 유대 공동체에서는 이방인 아내와 그 자녀를 추방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혈통보다 종교적 순수성이 중시된 것이지, ‘모계 혈통 원칙’이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기원후 2세기 전후에 편찬된 미슈나 (Mishnah)와 그 이후의 탈무드 (Talmud)에서는 유대인 혈통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통해 전해진다는 규정이 확립되었다. 랍비들은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도 어머니가 이방인이라면 아이는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반대로,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면 아버지가 이방인이어도 아이는 유대인이다.

헬라 시대와 로마시대를 지나면서 아버지의 정체성이 불분명한 경우가 늘어났다. 아이의 소속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 기준을 택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왜 서두에 이런 좀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필자의 마음 역시 편치 못하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죽임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여자들은 강간에 의해서 임신을 당했다. 이제 혈통적 유대 공동체는 중동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탈무드 학파 시대에 어정쩡하게 모계 중심을 이야기 했지만 이제는 이 부분을 확실히 해야만 했다. 유대인 신분은 어머니가 유대인인지 아닌 지에 달려 있다는 원칙을 세워야만 유대인 존속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유대 사회는 부계 중심이 아닌 모계 혈통(matrilineal descent)사회가 되었다. 이 규법은 오늘도 정통 유대교(Orthodox)와 보수 유대교(Conser vative)가 오늘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현대화 된 개혁 유대교(Reform)에서는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도, 아이가 유대인의 삶을 살면 유대인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십자군과 파티마 왕조

1099년 7월 15일, 제1차 십자군은 오랜 공방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십자군 병사들은 성벽을 넘어 도시로 진입했고, 도시는 곧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들의 학살로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점령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도시는 아직 외부의 반격 위협에 둘러싸여 있었고, 십자군은 이제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며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8월 1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새로운 교회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아르눌프 드 로크(Arnulf of Chocques)가 예루살렘 주교로 임명되었고, 이는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교회적 권위와 성스러움이 이제 십자군 국가의 근간을 이룬다는 상징이었다. 불과 며칠 후인 8월 5일, 그는 ‘참 십자가 聖 유물’을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이 성 유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용된 진짜 십자가의 일부라고 전해졌다.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는 병사들과 성도들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은 다가오고 있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와지르 알 아프달 샤한샤(Al Afdal Shahanshah)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내에서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십자군의 승리를 좌시할 수 없었다.

 

이에 맞서, 예루살렘의 지도자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de Bouillon)은 기독교 사제들과 함께 성문을 나섰다. 단순히 무장을 갖춘 행진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를 동반한 행렬이었다. 십자군의 군사적 진군은 곧 신앙적 행위로 해석되었고, 이는 전투를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신적 사명으로 만드는 장치였다. 이어 레몽 드 생질(Raymond of Toulouse)과 로베르 드 노르망디(Robert of Normandy)의 군대도 합류했다. 이제 병사들은 행군 중 현지 가축을 약탈하지 않고 통과했는데, 이는 규율과 신앙적 정당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적 행위였다.

결전은 8월 12일 오늘날 지중해 연안,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아슈켈론(Ashkelon)에서 벌어졌다.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군대는 성 밖에서 숙영 중이었는데, 이를 간파한 십자군이 새벽 기습을 단행했다. 전투는 파티마군에게 치명적 패배로 끝났다.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기습을 허용한 파티마군은 대열을 정비하지 못한 채 무너졌고, 와지르 알 아프달은 이집트로 도망쳐야 했다. 예루살렘은 즉각적인 위기에서 벗어났고, 십자군 국가의 군대는 최초의 승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아슈켈론 도시 전경

그러나 전투의 승리가 십자군의 영구적 안정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아슈켈론 전투 직후, 다마스쿠스의 카디 이븐 사드 알 하라위(Qadi ibn Saad al-Harawi)는 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난민들을 이끌고 바그다드 칼리파 궁정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는 이슬람 세계가 십자군의 만행을 공동의 치욕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이후 반 십자군 운동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기가 되었다.

결국 1099년 8월의 사건들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십자군이 단순한 군사 집단이 아니라, 성 유물과 교회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를 신앙적 차원으로 정당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함락과 아슈켈론 전투의 충격이 이슬람 세계 전역에 파급되며, 이후 수세기 동안 이어질 십자군과 이슬람 지하드의 장기 대결의 불씨를 지폈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의 권력 재편

1099년 여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아슈켈론 전투에서 파티마 왕조의 반격을 물리친 이후, 예루살렘에는 새로운 권력 질서가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순히 기독교인들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세력들이 서로의 다툼과 권위를 위한 경쟁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 서 로마교회 간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예루살렘은 군주가 아니라 교황청 직속 교회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즉, 예루살렘의 최고 권력은 세속 군주가 아니라 총대주교인 자신을 통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임베르트(Daimbert)가 1099년 9월, 피사의 함대를 이끌고 는 성지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보에몽(Bohemond)의 안디옥지원에 나섰다. 라타키아 공방전에서 그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대리인으로서 권한을 행사했으며, 레몽 드 생질(Raymond of Toulouse) 역시 그와 손잡고 도시 통치를 주도했다. 이는 십자군 내부 권력 구도에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깊숙이 스며든 많이 헷갈리는 장면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예루살렘의 지도자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de Bouillon)과 레몽은 10월, 오늘날 이스라엘 중부 지중해 연안지역, 텔아비브에서 북쪽으로 약 15km인 로마 시대에는 아폴로니아(Apollonia) 그리고 아랍 시대에는 아르수프(Arsuf)를 포위했다. 2개월에 걸친 포위 끝에 아르수프 수비대는 레몽의 부대에게만 항복하겠다고 했다. 이는 곧 고드프루아와 레몽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포위는 실패로 끝났고, 두 세력은 예루살렘으로 회군했다. 이러한 사건은 십자군 지도자들 간의 내부 분열이 어떻게 생기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그 시기 셀주크 튀르크제국 역시 내부 내전에 휩싸여 있었고, 무함마드 타파르(Muhammad Tapar)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혼란은 잠시 십자군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여러 적을 상대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해 늦가을 안디옥 공작 보에몽과 에데사 백작 보두앵이 성지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12월 21일, 마침내 보에몽과 보두앵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성탄절에는 다임베르트(Daimbert)가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공식 등극했다. 이 자리에서 보에몽은 다임베르트에게 복종을 서약했고, 이는 곧 성지 내 교회 권위가 세속 군주들 위에 있음을 선언하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1099년 가을과 겨울의 사건들은 예루살렘 점령 직후 십자군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놓여 있었는 지를 보여준다. 외부적으로는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제국이라는 강적과 맞서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십자군 제후들 간의 권력 경쟁과 교회 권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임베르트의 총대주교 등극과 보에몽의 서약은 십자군 국가가 단순한 군사 집단을 넘어 종교적 권위와 세속 권력이 얽힌 복합적 정치 체제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1099년의 마지막은 단순한 승리의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긴장의 서막이었다. 예루살렘은 십자군의 손에 들어갔지만, 그 도시는 이제 동서 기독교, 군사와 종교, 제후와 성직자 사이에서 끊임없는 권력 투쟁의 무대가 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과 이탈리아 상인들의 레반트에 등장

1099년 예루살렘 점령과 아슈켈론 전투의 승리로 십자군은 성지에 발판을 마련했지만, 그들의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팔레스타인의 내륙은 셀주크와 다마스쿠스,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각각 힘을 겨루고 있었고, 해안 항구 도시들은 여전히 무슬림 세력의 손에 남아 있었다. 십자군 국가가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상 보급로와 항구 도시들의 장악이 필요했다.

1100년, 동로마 제국은 킬리키아 해안에서 십자군 수비대를 몰아내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서방 세력과 동로마 간의 갈등은 이미 불가피해 보였다. 동시에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해상 도시국가들은 십자군과 협력하며 레반트에서 무역 특권을 획득했다. 십자군은 이들의 해상 지원에 의존해야 했고, 그 대가로 경제적 이해를 허용했다. 이는 십자군 국가의 성립이 단순한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지중해 상업권력과 밀접히 연관되었음을 보여준다.

1100년 5월, 다마스쿠스의 두카크(Dukaq)는 골란 고원에서 고드프루아와 탕크레드를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십자군이 쉽게 확장하거나 안착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십자군은 약탈과 방어를 반복하며 그들의 존재를 유지했지만, 이는 곧 주변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불러왔다.

같은 해 6월, 북부 전선에서는 안디옥의 보에몽이 켈라 전투에서 알레포의 리드완을 물리쳤다. 동시에 탕크레드는 다마스쿠스 근처를 약탈하며 두카크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이는 십자군의 군사적 자신감과 종교적 열정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이슬람 군주들의 반감을 한층 더 자극했다.

이처럼 예루살렘 왕국의 초창기는 불안정한 군사적 충돌의 연속이었다. 십자군 국가들은 외부의 적대적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고, 이는 결국 십자군과 이슬람 세계가 장기간에 걸친 대립과 전쟁으로 빠져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의 지배는 정복과 봉헌이라는 성스러운 명분 속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은 끊임없는 방어전과 약탈전으로 점철된 불안정한 생존의 과정이었다.

고드프루아의 죽음

운명이 다가왔다. 트리폴리로 떠난 레몽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을 때, 고드프루아는 자파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말을 타고 아크레(Acre)의 성벽 앞에 섰을 때, 그의 눈빛은 여전히 굳세었으나 몸은 이미 쇠약했다. 7월 18일, 공성전의 한가운데서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왕관을 거부하고 성묘의 수호자라고 불리기를 원했던 사람. 십자가 앞에서 무릎 꿇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 지도자가, 이제는 차가운 돌 위에 누워 있었다. 기사들은 그의 시신 곁에서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고드프루아의 죽음은 단순한 한 영웅의 몰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국의 심장이 멎는 순간이었다. 이제 예루살렘 성묘를 수복한 기독교 왕국은 스스로 통치 체제를 세워야 했고, 내부의 권력 다툼과 외부의 거센 반격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1100년, 예루살렘의 수호자가 쓰러진 자리에서, 십자군 국가는 새로운 도전과 불확실한 운명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십자군 국가의 불안한 토대

예루살렘 함락과 아슈켈론 전투의 승리 이후, 십자군 국가들은 마치 승리자의 영광 속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드러난 현실은 달랐다. 외부의 적대 세력은 여전히 강력했고, 내부의 권력 구조는 미처 정비되지 못했다. 1100년 8월과 9월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십자군 국가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8월 초, 다니슈멘드 투르크 세력이 동부 아나톨리아의 요충지 멜리테네 (Melitene,오늘날 터키 말라티아)를 공격했다. 이곳을 다스리던 아르메니아 성주 가브리엘은 십자군 지도자 보에몽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8월 15일, 안디옥 군대를 이끌고 출전한 보에몽은 그러나 참패를 당했다. 멜리테네 전투에서 그는 다니슈멘드 왕조(Danishmendid dynasty)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이 사실은 단순한 패배를 넘어 안디옥공국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보에몽의 부재는 십자군 지휘부에 심각한 공백을 남겼고, 조카 탕크레드가 섭정으로 나서야 했다. 이 사건은 십자군 국가들이 지도자 의존도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주는 예시가 되었다.

그러나 위기를 완전히 방치하지는 않았다. 에데사 백작 보두앵(Baldwin of Edessa)은 빠르게 대응해 8월 18일 다니슈멘드 군을 격퇴하고 멜리테네를 복속시켰다. 이 승리는 북부 십자군 국가들의 붕괴를 막은 결정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동시에 각 영주들이 독자적인 이해관계와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십자군 국가들은 ‘하나의 왕국’이라기보다는 여러 소규모 봉건 영토들의 느슨한 연합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한편, 보에몽의 부재 속에서 탕크레드는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8월 20일, 그는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을 받아 하이파를 점령했다. 항구 도시 확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 전략의 핵심이었다. 유럽과의 연결은 해상 보급로 없이는 불가능했고, 해안선 장악은 필수적 과제였다. 하이파의 함락은 십자군 국가들이 점차 해안 도시 확보 전략을 실행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이후 탕크레드는 안디옥에서 섭정권을 행사하며,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을 메우려 했다.

멜리테네 전투와 그 후속 사건들은 십자군 국가들의 연약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보에몽의 포로가 된 사건은 한사람의 영웅적 지도자 의존 체제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보두앵과 탕크레드의 대응은 십자군 국가들이 제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실상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해안 도시 장악 전략은 장기적 생존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었다.

십자군 국가에 동로마 제국의 개입

보에몽이 포로가 된 사건과 안디옥 공국이 사실상 지도자 부재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 앞에 동로마 제국이 개입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이 시기, 유럽 내부에서도 십자군 관련 움직임이 이어졌다. 9월 8일,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가 사망하고, 반(反)교황 진영은 테오데리크(Theoderic, Dietrich, Thierry)를 선출했다. 이는 교황권 내부 분열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드러낸다. 한편 9월 13일, 롬바르디아 십자군이 밀라노 대주교 안셀무스 4세(Anselm IV)의 지휘 아래 집결해 새로운 원정을 준비했다. 이어 9월 25일에는 제노바 함대가 라타키아에 도달하여 십자군 국가들에 해상 지원을 제공했다.

동로마 제국역시 장군 모나스트라스(Μονάστρας)와 부투미타스(Μπουτουμίτας)가 이끄는 육군과 해군은 안티오크 공국을 압박하며 킬리키아 지역을 점령했다. 킬리키아는 동로마 제국에게 있어 아시아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안디옥 공국의 존립에 직결되는 지역이었다. 제국의 이 행동은 십자군 국가들이 동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언제든 군사적 압박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십자군은 단순히 이슬람 세계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동맹이었던 동방 기독교 제국과도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갈등은 십자군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십자군 지휘자들은 처음에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했지만, 예루살렘을 비롯한 주요 거점을 장악한 뒤에는 독자적인 지배를 시도했다. 보에몽 역시 안티오크를 동로마에 반환하기보다 자신의 영지로 삼았고, 이는 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100년의 동로마 개입은 이러한 긴장의 표면적 폭발이었다.

십자군 국가가 단순히 성지에서 이슬람과의 전쟁 만을 치른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동방 기독교 제국 동로마와도 끊임없는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 놓여 있었다. 멜리테네(Μελιτηνή) 전투와 보에몽의 포로는 동로마 제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고, 킬리키아 점령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는 십자군 국가가 태생적으로 복잡한 국제 질서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결국, 예루살렘 왕국과 안디옥 공국은 단순한 종교적 국가가 아니라, 서방과 동방, 기독교와 이슬람, 제국과 도시국가들이 얽힌 지중해 전체의 정치적 역학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 존재였다.

보두앵 1세의 즉위와 예루살렘 왕국의 탄생

1100년 7월, 고드프루아가 세상을 떠나자, 신생 십자군 국가는 더 이상 상징적 지도력만으로 존속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권력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지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1100년 성탄절,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에서 보두앵 드 불로뉴는 예루살렘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형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성묘의 수호자라는 칭호만을 받아들이며 성스러운 도시의 군주가 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보두앵은 달랐다. 그는 성지에서의 새로운 왕국을 세속적 통치 체제로 제도화하려 했고, 그 통치 18년은 예루살렘 왕국이 상징에서 제도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에데사 백작이었던 보두앵은,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에데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출정에 앞서 친척 보두앵 드 레텔(Baldwin de Letel)에게 에데사 백작위를 위임하면서, 자신은 성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의 군주 두카크는 나흐르 알 칼브(Nahr el Kalb,개의 협곡)에서 그를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트리폴리 카디의 밀고로 계획은 실패했고, 10월 25일 다마스쿠스 군은 패주했다. 보두앵은 무사히 협곡을 통과해 10월 말 하이파에 도착했다.

11월 9일, 그는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당시 총대주교 다임베르트는 교황의 대리자로 막강한 권위를 지녔으나, 보두앵의 부상을 경계하여 시온 산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이는 초기 십자군 국가가 교황권과 세속 권력 사이의 미묘한 긴장 속에서 성립했음을 잘 보여준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푸아티에 공의회가 국왕 필리프 1세의 파문을 논의했으나 아키텐 공 기욤 9세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성지와 멀리 떨어진 서유럽에서도 교회와 세속 권력의 갈등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보두앵은 즉위 전후로 왕국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적극적인 원정을 전개했다. 12월 그는 아슈켈론 인근을 약탈하여 파티마 왕조에 압박을 가했고, 요단강 일대를 정벌하며 국왕으로서의 군사적 지도력을 과시했다. 또한 예루살렘 인근 산악지대의 도적 집단을 소탕하여 내부 질서를 다졌다. 이러한 일련의 군사 활동은 그가 단순한 계승자가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창건자임을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보두앵은 총대주교 다임베르트와 타협을 이루었다. 다임베르트는 대관식을 주관하는 조건으로 왕권을 인정했고, 1100년 크리스마스,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교회에서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보두앵 1세의 즉위는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니라, 십자군 국가가 상징적으로 성묘의 수호자 단계에서 정치적 왕국(Kingdom of Jerusalem)으로 제도화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고드프루아의 시대가 신앙적 상징과 영웅적 리더십의 시대였다면, 보두앵의 즉위는 현실 정치와 군사적 질서를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제 성지는 더 이상 십자가의 기사들이 지키는 성소가 아니라, 성지의 국왕이 다스리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이는 십자군 운동이 종교적 열정을 넘어, 지중해 세계의 정치 질서 속으로 본격적으로 편입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십자군 국가들이 자리를 잡을 때 대신 그 땅에서 많은 희생과 대가가 뒤 따랐다. 앞에서 이미 이야기 하였듯이 그 거룩한 예루살렘 성안에 살던 유대인들은 성인 남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여인들은 강간을 당했다.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안에서 유대인 공동체는 이미 작별을 고했다. 살아남은 여인들을 인정해야만 민족이 멸하지 않는 처절한 상황과 슬픔 역사를 말이다. 그리고 이런 행위 끝에 태어난 십자군 국가들이 과연 옳은 것인가?

거룩한 십자가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상징 삼아 십자군들이 안디옥에서, 마라에서, 예루살렘에서 적이라 여긴 이들을 거리낌 없이 죽였다. 그들은 그 광기를 믿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믿음일까?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슬람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무심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필자 역시 때때로 분노와 미움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사람을 미워하고, 상황을 원망하고, 마음이 증오로 가득 차려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필자의 분노를 믿음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늘 돌아봐야 했다.

오늘날 선교 역시 같은 경고를 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동기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거나 강제하거나, 혹은 미워한다면 그것은 이미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십자군들이 꿈꾸었던 황금의 예루살렘은 결국 피의 예루살렘이 되었다. 믿음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겸손,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이 진정한 믿음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인 이야기가 설교가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쉬워하면서..

표지사진: 아폴로니아(Apollonia) 성벽 유적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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