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계발] 하나님이 심으신 꿈의 여정: 책의 숲에서 화산재 가득한 곳으로, 그리고 학문의 본고장으로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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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선, 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꿈 없이 자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는 씨앗처럼 꿈이 심겨 있고, 그 씨앗이 자라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묻지요.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떠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가?”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 역시
언제나 이 한 마디입니다.
“너의 꿈이 무엇이니?”
어떤 사람의 꿈은 어릴 때의 상상 속에서 머물고,
어떤 사람의 꿈은 헛된 욕망과 망상으로 흩어지며,
또 어떤 사람은 평생 꿈을 좇다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습니다.
반대로, 꿈을 이루었지만
그 꿈이 인류에게 상처와 어둠을 남긴 경우도 있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모택동과 같은 이들은
권력이라는 꿈을 성취했으나
그 결과는 한 세대를 뒤흔든 비극이었으며, 인류에게는 재앙이 되었습니다.
꿈의 크기는 곧 그 사람의 크기이며,
꿈의 방향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유대 전통에서는
꿈을 단순한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삭임이 스며드는 통로로 보았습니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석되지 않은 꿈은 펼쳐지지 않은 편지와 같다.”
— Talmud, Berakhot 55a
다시 말해,
꿈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진 편지이며,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이끄느냐가
삶의 내용과 무게를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랍비들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가장 깊이 느껴질 때,
그분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오신다.”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을 돌아보아도
그들의 위대함은 “현실”이 아니라 “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보았고,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 없는 나라”라는 꿈을 붙들었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외침으로
시대의 족쇄를 끊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빛 위에 올라 탄다면 무엇이 보일까?”라는 단 한 줄의 꿈에서
상대성 이론을 꽃피웠습니다.
그들이 위대했던 이유는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능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신발조차 잃어버린 채 맨발로 교회를 오가던 어린 시절,
저의 가슴속에도 설명할 수 없는 꿈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작은 불씨는 자라서
기차의 굉음 속에서 시작된 저의 꿈이 되었고,
나중에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세계를 누비는 복음의 여정으로 변해 갔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이 제 안에 넣어 주신 그 꿈의 흔적을 따라
제 삶을 다시 돌아보려 합니다.
그 꿈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펼쳐진 편지”였음을
세월을 지나 비로소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차와 하늘의 기억>
저의 어린 시절, 그 꿈은 단 하나 — 기차를 타보는 것이었습니다.
레일 위를 달리던 기차의 굉음이 마을을 가르고 지나가면
우리 삼형제는 그 뒤를 따라 달렸습니다.
바람에 흙먼지가 일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출 수 없던 그 시절의 동심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우리는 레일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간 뒤 납작하게 펴진 쇳조각을
보물처럼 주워 들고 놀았습니다.
그 쇳조각에는 어린 날의 꿈이,
작은 손의 열망이 눌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큰형이 숨을 고르며 말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저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갈 거야.”
작은형이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말도 안 돼. 형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때 저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타고
온 세상을 다니며 마음껏 주의 복음을 전할 거야.”
큰형은 교회 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막내인 저를 핍박하고, 교회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어느 날은 제 신발짝을 뒷간 더미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재래식 뒷간의 변비통에는 구더기가 가득했습니다.
신발을 건져 낼 수 없었던 저는 맨발로 교회를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흔한 검정 고무신 한 켤레조차 귀하던,
가난했지만 꿈만은 하늘처럼 넓었던 시절이 아련하기만 하지만
꿈이 있어서 배불렀고,
냉수를 훔치면서도 꿈을 키웠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합니다.
<책의 숲, 꿈의 집 — 사람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저에게는 꿈을 키우던 비밀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의 미움과 광야의 고독 속에서 꿨던 하나님의 꿈이 있었고,
다윗에게는 양떼를 지키며 하프를 타던 초장의 외로운 시간이
하나님 마음을 배우는 비밀의 학교였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세상이 금지한 기도를 멈추지 않던
골방의 창문 하나가
그의 꿈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통로였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말합니다.
꿈은 언제나 넓은 들판에서만 자라지 않는다고.
시력을 잃고도, 정치적 추방 속에서도
존 밀턴(John Milton)은 감옥 같은 어둠 속에서
『실낙원(Paradise Lost)』의 빛나는 우주를 써 내려갔습니다.
육체의 눈은 닫혔으나,
그의 영혼의 눈은 더 크게 열렸습니다.
고향에서 추방되고, 사랑하는 피렌체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방랑자로 떠돌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는
그 유배의 길 위에서 인류 정신의 봉우리라 불릴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써 올렸습니다.
그에게 추방은 끝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또 하나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꿈을 기르는 장소는 달랐지만,
꿈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방식은 하나였습니다.
고독 속에서, 침묵 속에서, 때로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꿈을 잉태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의 공간은
광야일 수도, 초장일 수도, 감옥일 수도,
추방의 길일 수도 있지만—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빚어
그의 꿈을 준비시키는 은밀한 작업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꿈을 키우는 비밀의 장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작은 우주,
책들이 벽처럼 둘러싸인 지식의 숲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KBS 사장을 지낸 박권상 사장이 저의 이모부의 친동생입니다.
저의 이모부 댁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인생이 쌓아 올린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장서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책들—
철학, 문학, 시, 역사, 사회과학, 인문학, 고고학까지—로 가득한 그 집은
저에게 꿈의 요람이자 사유의 성전이었습니다.
저는 그토록 많은 책을 읽기 위해 이모집을 내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보배와 같은 책을 다 읽어 버리는 저는 이모집에서 비싼 전기료를 소비하는 존재로 밖에 비추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모의 눈치를 피해 다락방으로 가서 이불 속에 백열 전구를 키고 밤새도록 책을 읽었습니다.
동녘이 떠오른 이른 아침, 밤새 붙잡고 있던 책장을 조심스레 덮을 때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마치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 주는 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빛은 하루를 비추는 빛이 아니라
한 해의 시간만큼이나 넓은 공간을 제 마음 안에 만들었고,
그 공간에서 꿈은 어김없이 한 뼘, 또 한 뼘 자라 났습니다.
어린 시절 한 권의 책은
현실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상상의 날개를 달아 주는 마법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한 페이지가 바뀔 때마다 나라와 민족과 언어의 경계는 사라졌고,
머나먼 시대와 나라, 다른 민족의 숨결 속으로
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가 앉았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며
도서관은 점점 더 넓어졌고
그 책의 숲은 저를 깊고도 먼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때의 독서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세계를 배우는, 그리고 나 자신을 발견하는
하나의 ‘비밀스러운 성장의 통로’였습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저를 지중해의 바람과 항해의 물결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트로이의 성벽을 넘나드는 영웅들의 숨결,
오디세우스가 파도와 바람, 신들의 변덕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려 몸부림치던 여정은
소년인 저에게 세계의 첫 지도를 그려 준 책이었습니다.
훗날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모든 지역을 다 돌아 보고, 밟아 보고, 고고학 유적지를 거의 다 탐방한 이후에 느낀 감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 동양의 고전들은
전혀 다른 결의 사유를 제게 심어 주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졌고,
몽환과 현실을 오가며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한 『구운몽』,
구조적 비극 속의 인간성을 보여 준 『사씨남정기』,
진한 감정의 숲으로 이끈 『홍루몽』은
동양의 미학과 비애, 지혜와 사유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역』과 『논어』, 『맹자』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질서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알려 준
가장 오래된 스승이며 동양적 사고가 주는 관조와 철학 그리고 사유와 도덕 정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다 제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우리 조선의 시와 문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은
조선의 산천을 따라 마음이 흐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시조 속에 담긴 짧고도 깊은 호흡은
단 세 줄만으로도 한 인간의 세계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동양의 고전이 사유를 가르쳐 주었다면,
조선의 문학은 ‘정서’라는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청소년기에 이르러 서양 사상의 물줄기는 더 굵어졌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신약성경의 배경을 이해하게 하는 또 하나의 창문이 되었고,
나중엔 서양 문명의 뿌리를 더 깊이 파고드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Utopia)』는
기독교적 이상국가,
‘저 너머의 세상’을 꿈꾸게 했습니다.
시대가 흐르며, 제 독서는 점점 더
사회학과 철학이라는 깊은 강으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제 마음속 가장 깊은 우물의 밑바닥을 건드렸습니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의 논리적 명료함은
사유의 구조를 잡아 주었고,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자유와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고독한 철학자의 목소리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청년기의 끝자락에 저는
까뮈(Albert Camus),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같은
실존주의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고독하고 모호하며,
얼마나 자유롭고 위험하며,
얼마나 무의미와 의미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실존주의는 제게 인간의 실체를 숨김없이 드러내 준
어느 섬뜩한 거울과 같았습니다.
그 모든 책들은
저를 삼키고, 빚어내고, 깨뜨리고, 다시 세웠습니다.
독서는 단지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나라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바다에서
인간을 배웠고,
동시에 하나님을 그리워했습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자 도서관이 제 놀이터가 되었고,
숲처럼 빽빽한 책의 길을 거닐며
저의 꿈은 자라나고, 사유는 자라나고, 영혼은 자라났습니다.
책은 제게 세상을 보는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학문의 영역은 끝없이 확장되었고,
지식의 바다는 저를 삼켜 그 속으로 끌고 갔습니다.
저는 그 바다에서 인간을 배우고,
동시에 하나님을 그리워했습니다.
<두 지식의 강 — 사람과 하나님>
열 여덟 살 무렵,
저는 인류가 쌓아온 모든 학문을 하나로 통합하고 싶다는
거대한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며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의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욜 2:28)고 말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이 약속은 교회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하나님 안에서 꾸는 꿈은 늙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고, 더 맑아집니다.
저의 어린 시절의 작은 꿈도, 청년기의 학문적 꿈도,
결국은 이 말씀 안에서 다시 해석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지 않는 꿈은 욕망이지만,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꿈은 소명(Calling)이 됩니다.
청소년의 시기를 마무리 할 때 가지게 된 학문 통합의 꿈 중심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아는 지식,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 두 개의 지식이 만나야
비로소 학문은 온전한 진리에 닿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 시절,
제 논문의 제목을 “학문 통합의 이론과 실제”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학문적 실험이 아니라,
지식의 궁극적 방향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장 칼빈(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참된 지혜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학문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으면
결국 미완의 파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빛처럼 찬란하지만,
그 빛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칼빈은 꿰뚫어 본 것입니다.
지식은 두 개의 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 자신을 향한 내면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초월의 문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자각할 때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신을 바로 보게 됩니다.
이 두 개의 문이 맞닿을 때,
비로소 지식은 진리가 됩니다.
17세기의 수학자이자 신앙인이었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비참하며, 하나님 없이는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에게 인간의 위대함은 지성의 높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데,
즉 자신의 비참함을 자각하는 데 있었습니다.
바로 그 깨달음이 하나님을 향한 지혜의 시작이었습니다.
모든 학문이 인간의 본성과 삶을 탐구하려는 시도라면,
그 끝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철학은 인간의 사유를,
과학은 인간의 세계를,
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탐색하지만,
이 모든 길의 종착지는 결국 하나님이십니다.
저에게는 칼빈과 파스칼 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그리고 피히테와 같이 부분적이지만 인류의 전반적 학문을 통합했던 거인들을 만나며 꿈을 키웠습니다.
20세기 초에는 도서관을 창시한 멜빌 듀이를 보며 학문 통합이 실현 가능한 꿈임을 보았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오직 학문만을 위해 살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스무 해 동안 학문에 정진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게 다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학문을 향한 열정을 결국 접어야 했으며 결국 목회의 부르심의 자리로 인도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중대형 교회의 부교역자로 섬기다가
성남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그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필리핀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 여정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아내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순종과 믿음이 제 발걸음을 이끌었고,
그 길 위에서 저는 다시금 배웠습니다 —
학문은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아내의 꿈을 따라, 그리고 저에게 주신 주님의 음성을 따라 “필리핀”으로 제 발걸음을 움직였고,
그 길 위에서 저는 또 다른 배움을, 또 다른 부르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꿈의 탄생>
그리고 비로소, 저는 필리핀에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학문을 향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의 세계에서 피어났던 사유의 꽃은 이제,
사랑과 순종의 땅에서 복음의 씨앗으로 바뀌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들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복음화라는 꿈일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선교지에 발을 내딛던 그날,
가슴은 불타오르고 눈은 하늘을 향했습니다.
‘내가 밟는 이 땅을 주의 복음으로 가득 채우리라.’
그것이 모든 선교사의 첫 번째 꿈입니다.
누군가는 신학교에서,
누군가는 교회 개척의 현장에서,
누군가는 의료나 교육, 기관 사역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꿈을 품지만,
모두의 중심에는 오직 하나의 불변한 고백이 있습니다.
“이 땅이 주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역의 해가 쌓이고 세월의 강이 깊어질수록
그 꿈은 조금씩 다른 빛깔로 변해 갑니다.
처음의 열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고요한 지속의 열매로 숙성되어 갑니다.
사역의 확장은 더 넓은 지역을 품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품는 일로 이어집니다.
이 사역이 나의 시대에서 끝나지 않고,
나를 넘어 이어질 영원한 흐름이 되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제 나는 깨닫습니다.
꿈이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여정임을.
그래서 오늘도 기도합니다.
처음의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내가 심은 씨앗이 세대 위에 이어져
계속해서 열매 맺는 꿈이 되도록.
선교의 길은 끝이 아니라 순환입니다.
씨를 뿌리고, 눈물로 기도하며,
다음 세대가 그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새로운 꿈의 의미입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저는 저의 뜻과 비전을 따라 필리핀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따라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필리핀으로 가라”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필리핀으로 왔습니다.
신혼 여행도 갈 수 없었던 가난한 목회의 삶을 살았던 제가 처음 비행기를 타고 간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당연히 낯설고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습니다.
마닐라에 여장을 풀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간 곳이 600년 만에 폭발한 피나투보 화산 현장이었습니다.
<1991년 피나투보 화산의 분출>
1991년 6월, 필리핀 중부 루손섬의 평화로운 아침 하늘이 갑자기 뒤집혔습니다.
수 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피나투보 화산(Mt. Pinatubo)이 600년의 침묵을 깨고 폭발했습니다.
그해 4월부터 미세한 지진과 유황 냄새가 감지되었고, 5월에는 화산재가 하늘을 덮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6월 15일, 인류가 20세기 들어 경험한 최대 규모의 화산 폭발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폭발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화산재와 암석이 수십 킬로미터 상공까지 치솟았고,
약 10억 톤이 넘는 화산재가 대기권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폭발 순간 화산 꼭대기는 300미터 이상 무너져 내렸으며,
산의 중심부는 거대한 칼데라(Caldera)로 변했습니다.
그날, 마닐라의 하늘은 낮에도 캄캄했습니다.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지고, 태양은 마치 죽은 별처럼 빛을 잃었습니다.
화산재가 공중을 뒤덮고, 비가 재와 섞여 회색 진흙비(lahar)로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했고,
수천 채의 집이 무너지고, 수십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그때 폭발에 더 큰 재앙을 더한 것은,
슈퍼 태풍 “유냐(Yunya)”가 동시에 필리핀을 강타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산에서는 화산재가 흘러내리며,
세상은 순식간에 진흙의 바다로 변했습니다.
<끝나지 않은 여진과 1992년의 지속적 분출>
피나투보는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2년까지도 여진과 간헐적 분화가 이어졌습니다.
화산 주변의 온천과 계곡에서는 여전히 유황 가스가 뿜어져 나왔고,
비가 내릴 때마다 라하르(lahar, 화산재 홍수)가 마을과 농지를 삼켰습니다.
1992년 7월과 8월에도 여러 차례 중규모 폭발이 이어졌습니다.
피나투보 인근의 아이타족 원주민들은 완전히 삶의 터전을 잃고 산을 떠나야 했습니다.
루손섬의 북서부 지역은 황폐해졌고,
그 충격은 단지 지역적 재앙이 아니라 국가적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하늘까지 흔든 폭발 — 전 세계로 번진 영향>
피나투보 화산의 폭발은 단지 필리핀만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위력은 지구의 대기 순환을 뒤흔들었습니다.
화산재와 이산화황(SO₂)이 대기 상층부까지 도달하면서
지구 전체의 기온이 약 0.5도 하락했습니다.
이로 인해 1992년과 1993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한랭 현상”이 보고되었습니다.
북반구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고,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하늘에도 피나투보의 재가 흩날렸습니다.
미국의 석양은 한동안 붉은 빛으로 타올랐고,
세계의 하늘은 마치 하나의 상처처럼 피나투보의 흔적을 품었습니다.
NASA의 관측에 따르면,
피나투보 화산에서 방출된 이산화황은 약 2천만 톤에 달했고,
이는 20세기 대기 기후에 영향을 준 가장 큰 자연 요인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재와 불 속에서도 새 생명을 보다>
그러나 그 재앙의 끝에서 저는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불과 재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새 생명의 씨앗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폭발 후 수년이 지나,
피나투보의 회색 들판 위에 풀잎 하나가 솟아나는 광경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그 작고 연약한 생명은
하나님이 인간의 폐허 속에서도 새 창조를 시작하신다는 묵시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모든 파괴는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의 문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티쿤 올람(Tikkun Olam)”—세상의 회복—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불과 재 속에서 깨어난 기도>
1992년 1월 필리핀에 와서 가게 된 피나투보 화산의 현장에서 사역하던 저는
마치 인류의 종말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앞의 산자락이 들썩이며 불기둥을 토해내고,
거대한 뭉게구름이 솟구쳐 오르더니
그 속에서 마치 원자폭탄이 터지는 듯한 섬광이 하늘을 찢어 내었습니다.
두렵고도 공포스러웠습니다.
순식간에 하늘은 어둠으로 뒤덮였고,
눈과 귀와 코와 입 속까지 미세한 화산재가 스며들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모래 가루가 이를 갈고,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그 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재가 아니었습니다 —
세상의 종말이 흩날리는 먼지였습니다.
대나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저는
갑작스러운 지진의 진동에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는 듯한 깊은 울림이 땅속에서 올라왔습니다.
천지는 흙빛으로 물들고,
앞을 겨우 한 걸음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는 마치 누군가가 수억 개의 밀가루 포대를 터뜨려
온 세상을 가루로 덮은 듯했습니다.
자동차의 경적도, 사람의 발자국 소리도,
심지어 나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침묵 속에 잠겼습니다.
세상에 어떤 소리도 이토록 진한 먼지에는 파묻혀서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소리 없는 절규만이 공중에 떠다녔습니다.
그날의 공포는,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상상하려 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님의 나팔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혹시 이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의 날인가?”
온몸이 떨리고, 심장은 폭발할 듯 뛰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눈물 속에서 하늘을 향해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나팔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침묵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가슴을 쓸어 내리며 살아남은 자의 숨을 쉬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
하늘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필리핀 복음화의 꿈과 교회 개척>
그때의 저의 꿈은 “필리핀 복음화”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전역을 돌며, 복음 전도, 목회자 세미나 그 중에서도 특히 지도자 세미나와 전도 세미나를 많이 인도했습니다. 전도에 목숨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전도에 목숨을 건 사람들은, 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어떤 장애와 핍박이 와도 전도를 하는지를 잘 압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내 영혼을 위해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할 때 얻는 기쁨, 한 영혼이 예수님께로 돌아 오는 감격을 맛 본 사람은 그 감격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전도는 내 영혼에 주는 가장 큰 행복이라는 선물을 안겨 줍니다.
돌이켜 보니 필리핀 복음화라는 것은 목표였다면, 전도는 구체적 사역 방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몇 명 안되는 양무리를 치고,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첫 해 신학교 재학생이 12명이었습니다.
사역의 방향은 분명했습니다.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사람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12명 전원 신학생들에게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빠도 떠나고, 엄마도 떠나서 친척집을 전전긍긍하다가 모든 친지들로부터 지속적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발전하여 톰보이 즉 레즈비언으로 발전했습니다. 또 한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는 남매지간인데 이 여자 아이는 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신학교를 다니는 이 친오빠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 저희 부부를 찾아 와 눈물로 고백하는 그 소리를 듣고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지옥으로부터 온 이야기를 듣는 줄 알았습니다. 그 남매의 아버지는 너무나 잘 아는 저희 교회 성도였습니다. 딸림 섬에 살고 있고 그 곳에도 교회를 지었기에 그 교회를 지키는 일종의 사찰 집사 역할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 사실을 그 부인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생긴 것은 순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늘 환한 미소를 짓는 분이지만 뻔뻔해도 너무 뻔뻔해서 그 안에 그런 악마가 자리잡고 있는 줄 차마 알지 못했습니다. 음란에 사로잡힌 사람이 자신의 친자식인 딸을 잡아 먹고, 그것을 보고 자라 아들이 자신의 누이를 겁탈하기를 주기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12명을 조사하니 단 한 명도 온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 표현으로 하면 멘탈이 나갈 지경이었습니다.
12명의 스토리를 따로 써도 책 한권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친절한 미소, 웃음기 어린 얼굴, 이방인을 환대하는 따뜻함, 밥 한끼 대접할 줄 아는 정서, 가난하지만 소소한 사람이라는 필리핀의 친절 속에 감추어진 깨어진 인간의 도덕, 욕망, 잔인함 그리고 지옥을 방불케 하는 밤의 세계를 보며, 저는 서서히 선교의 꿈을 향해 달려 가던 중 현실이라는 냉혹한 세계 앞에 저의 꿈을 다시금 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했는데 여전히 자신의 딸을 겁탈하고 있는 성도, 신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또 다시 집에 가면 겁탈당하기 싫어 집에 가기 싫다고 울부짖는 자매, 집에 가면 친오빠와 새언니를 보아야 하지만 어릴 적 오빠에게 당한 것이 평생 트라우마가 되어 차에 뛰어 들려 했던 신학생 자매,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온전한 가정, 온전한 구성원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변하지 않고, 여전히 천인공노할 죄악이 예전에 있었거나 또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음에도 성도를 더 늘려 교회를 성장시킨다면, 이것이 바람직한 교회 성장일까?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지도력 세미나를 개최하고, 셀 그룹으로 성도들을 양육하고, 새벽 기도 운동을 해도, 근친상간, 동성애, 유아 성폭행 등등(이보다 더 심각한 내용이 많지만 제가 차마 글로 옮길 수 없음)의 트라우마를 안고 가해자와 피해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 성장과 전도에 전력질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여동생을 성폭행한 아이는 뻔뻔하게 그 사실을 부인하기에, 결국에는 신학교를 중단시켰고, 동성애에 빠진 아이는 “한번만 봐 주세요. 절대로 하지 않을께요” 간청하기에 한시적 조건부를 신학교를 다니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 신학생은 철저히 저희 부부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종국에 그의 동성애 행각이 발각돼 눈물을 머금고 그를 내쫓아야 했습니다.
복음화 꿈 그리고 전도의 열정, 교회 성장과 제자 양육이라는 비전 앞에 우리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음란, 거짓, 도둑질, 동성애, 양성애, 성 중독, 마약, 도박 등등 인간성 마저 말살되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바꿀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저희 부부는 이런 질문 앞에서 사역의 큰 방향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신학생 양육이 아니라 단 몇 명이라도 참 신학생을 양육하자.
많은 제자가 아니라 단 몇명이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를 양육하자.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기 보다는 질적으로 즉 기도와 말씀 교육과 제자의 삶을 표방하는 것으로 전환시키자.
이러한 방향 전환에 따라, 매일 새벽 기도, 금식, 그리고 매일 저녁 기도 등으로 하루에도 두 번씩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전환했습니다.
성도들이 많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때론 20여명, 때론 40여명, 많으면 50-60명 인원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성령님의 임재 아래 자신의 죄를 끊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나는 점점 힘이 빠지고, 낙심 되고, 한없이 작아지고, 위축되었습니다.
선교사 “김종필”이라는 이름은 점점 세인들의 기억 속에 잊혀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목회에만 전념했지만 실제로 얻어지는 열매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세계의 부흥 운동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전세계에 기독교를 대응할 정도로 이슬람이 성장하고 있다. 너는 이슬람을 그 누구보다도 깊게 연구하게 될 것이고, 그 이슬람의 정체를 파악하고, 이슬람 선교를 하게 될 것이다.
영국과 서구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그 서구 교회의 몰락과 원인을 연구하고 세계 기독교를 살리는 방안을 연구하라”
초라한 선교지에서 주일 날 불과 60여명 성도, 매일 수십명의 성도를 모아 놓고 목회하는 선교사에게 대영제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며, 이토록 가난한 선교사가 어찌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지만 차마 주님 앞에 그런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매일 세번씩 기도했습니다.
하루 세번의 기도 중 7년이 가득 차 가던 해 저희 부부는 실제로 영국을 방문했습니다.
버밍엄 대학교(University of Birmingham, England) PhD에 입학 허가를 받고, 몇 개월 뒤 PhD를 하기 위해 실제로 영국에서 공부하러 유학을 떠났습니다.
여전히 불타는 선교사의 꿈이 있었건만 주님의 명령이 있었기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여전 일이며, 한국 목회 6년 그리고 선교사역 10년을 채우고 떠난 영국 행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나이 40대이니 공부하기에는 늦은 나이였으며, 이미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떠난 곳이 필리핀이었는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학문의 길을 포기하게 하신 후에 필리핀에서 저를 다시금 영국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
돌아보면, 제 인생의 거의 모든 장면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기차를 따라 달리던 흙 먼지 나는 어린 시절에도,
책의 숲 속에서 밤을 새워 활자를 삼키던 청소년기에도,
피나투보 화산의 재와 진흙 비 속에서 종말을 마주하듯 서 있던 그날에도,
성폭력과 깨어진 가정 사이에서 울부짖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회성장”의 꿈을 다시 내려놓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제 안의 꿈을 부수시기보다는 새롭게 빚어 가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처음에는 제가 꿈을 꾸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됩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꿈을 가지시고,
그 꿈을 제 안에 심어 놓으셨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 “비행기를 타고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는 말은
철없는 소년의 허풍처럼 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잊어버린 그 꿈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필리핀 선교지와 영국 유학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길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요셉의 꿈도 그랬습니다.
형제들에게는 거만한 소년의 허풍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 꿈 속에 한 민족을 살릴 계획을 숨겨 두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쓰러진 한 순간을 통해
자신의 모든 지식과 열심이 새로운 방향으로 재해석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의 이전까지의 꿈은 ‘율법의 의’를 완성하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의 꿈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빌 3:10)으로 바뀌었습니다.
저 역시 어느 순간부터
“필리핀 복음화”, “교회 성장”, “신학생 1,000명”과 같은
눈에 보이는 목표보다 더 깊은 곳으로
하나님의 손길이 저를 이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피나투보 화산의 재 속에서,
저는 세상의 끝을 보는 듯한 공포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성도들의 끔찍한 과거와 상처를 마주하며,
제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단순한 성공주의적 선교 꿈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 대신, 오직 몇 사람이라도
진짜 제자, 진짜 신학생, 진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남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 (마 5:13–14)
꿈은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썩어 가는 세상 속에서 소금으로 남는 소수의 삶일 수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골방과 눈물의 새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깨닫습니다.
꿈의 가치는 그것이 나를 얼마나 높이 올려 주느냐가 아니라,
그 꿈이 나를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까이 데려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제가 읽어 온 모든 책들,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신학의 모든 지식은
결국 두 가지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1. 나는 누구인가? – 사람을 아는 지식
2. 하나님은 누구신가?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이 두 지식이 함께 자라날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지혜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사람의 비참함을 깊이 알수록,
우리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은혜의 깊이를 알수록,
절망 속에서도 다시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필리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기도,
영국의 도서관에서 흐릿한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논문들,
그리고 지금 보스턴의 골방에서 다시 써 내려가는 이 글까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주신 꿈을
어떻게 빚어 가시는지 보여 주는 작은 발자국들일 뿐입니다.
앞으로의 나머지 생애 동안
저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더 큰 교회, 더 큰 이름을 위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꿈을 성취하는 꿈입니다.
다음 세대가 더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는 꿈,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칠 즈음 하나님께서는 다음 단계의 꿈을 주셨고, 꿈을 따라 건너 온 미국에 와서도 또 다시 꿈을 주셨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인생의 꿈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이 글의 끝에 조용히 적어 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하나님께서 제 안에 심으신 꿈은
결국 “나의 꿈”이 아니라,
“그분이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에 참여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도 조용히 권하고 싶습니다.
• 당신이 아직 어린 시절의 꿈을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 꿈을 하나님 앞에 다시 올려 드리십시오.
• 이미 꿈이 부서지고 무너진 경험이 있다면,
그 재 속에서 새 생명을 피워 내시는
하나님의 손을 기대해 보십시오.
• 지금의 꿈이 나를 높이는 꿈인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꿈인지
진지하게 질문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심으신 꿈은
언젠가 반드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식으로,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아직 저의 꿈 이야기는 끝이 아닙니다. 영국에서, 미국에서, 전세계에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꿈의 현장에서 어떻게 꿈이 이루어지는 지를 바라보며 아직도 저는 못 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그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꿈은 “부흥”이라는 꿈입니다.
2025년 11월 15일 저녁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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