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랍비 전통의 대화: 은혜와 공로의 경계에서-22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1세기 유대교의 언약 이해와 초기 랍비 문헌의 공덕 사상,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만나는 지점을 드러냅니다. 그 만남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과 공동체 윤리가 교차하고, 우리는 결국 은혜가 모든 공로 위에 우뚝 서 있는 하나님 나라의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영성계발]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랍비 전통의 대화: 은혜와 공로의 경계에서-22 » “The Parable of the Vineyard Workers and the Rabbinic Tradition: At the Boundary of Grace and Mer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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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면서: 포도원의 깊이를 향한 여정>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1–16)는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과 같습니다. 아무리 길게 두레박줄을 내려도 바닥은 닿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맑은 생수가 솟아오릅니다. 단순해 보이는 이 짧은 비유 안에는 포도원과 주인, 품꾼과 품삯, 고용 시간대, 시장의 풍경이 모두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스라엘과 열방, 언약과 회복, 하나님 나라와 종말의 완성, 공정성과 동일시의 긴장, 그리고 은혜와 공로가 충돌하는 심연이 펼쳐집니다.

이 비유는 시장 한 켠에서 서성이는 게으른 자의 그림자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려주고, 불평하는 자들의 목소리 위로 은혜의 선포를 울려 퍼지게 합니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보상의 원리와 주권적 은혜, 구약의 포도원 노래(사 5)에서부터 랍비 제라의 도전, 바울의 언약 공동체 신학과 종말론적 식탁에 이르기까지—이 이야기는 은혜의 경제학을 끝없이 확장 시킵니다.

이 글은 단순한 주해가 아니라, ‘계산보다 감사, 서열보다 연합, 공로보다 은혜’로 살아가는 제자도에의 초대입니다. 예루살렘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미드라쉬의 포도원 비유들, 그리고 마가복음의 악한 소작인 이야기와 함께 읽어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가 어떻게 ‘공로의 세계’를 넘어 ‘은혜의 세계’를 선포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나아가 대체신학적 해석의 기원을 추적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포용, 공동체 윤리, 종말론적 완결이라는 큰 그림 속에 이 비유를 배치하고자 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1세기 유대교의 언약 이해와 초기 랍비 문헌의 공덕 사상,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만나는 지점을 드러냅니다. 그 만남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관과 공동체 윤리가 교차하고, 우리는 결국 은혜가 모든 공로 위에 우뚝 서 있는 하나님 나라의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포도원 입구에서>

아침 햇살이 막 동쪽 언덕을 비집고 들어오던 시각, 주인은 포도원의 문을 열고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그 문은 단순히 농부의 울타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초대장이었습니다. 시장에 서 있는 사람들—어제의 실패와 오늘의 불확실함을 안고 서성이는 자들—그들을 향해 주인의 눈이 멈춥니다. 그는 일꾼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잊힌 이름들을 부르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고, 생의 무게로 굽은 어깨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부름 앞에 ‘적합한 사람’이나 ‘조건에 맞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부름 자체가 자격이 되었고, 응답이 그들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노동 계약의 시작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부름 받던 날처럼, 어부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버리고 따르던 순간처럼, 포도원의 부르심은 오늘도 사람들을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가다적 서두 – 포도원의 햇빛 아래>

아침 해가 아직 언덕 너머에서 얼굴을 다 내밀기 전, 마을 광장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람에 먼지가 일고, 각자 손에 든 곡괭이와 호미가 햇빛을 기다리듯 빛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하루의 품삯을 약속 받기 위해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품꾼들이었습니다.
그때, 포도원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아침의 부드러운 빛 속에서 그는 서슴없이 사람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오늘 내 포도원에 들어가라. 한 데나리온을 주겠노라.”
그들은 기꺼이 따라갔습니다.
햇빛이 중천에 오를 무렵, 주인은 다시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여전히 일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가라. 내가 적당한 품삯을 주겠노라.”
그들은 의아했지만, 마른 목을 축이며 포도원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세 시, 그리고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 다섯 시에도 주인은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한숨이 깊었고, 땅거미가 내릴 시간에 일을 시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말없이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기울어, 저녁노을이 포도밭 줄기 사이를 붉게 물들일 때, 품꾼들이 줄지어 임금 받으러 나왔습니다.
주인은 가장 늦게 온 이들에게부터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땀 흘린 이들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의 가슴 속에는 기대가 부풀었습니다.
‘우린 더 많이 받겠지. 저들이 한 데나리온이라면…’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내밀었습니다.
바람이 멈춘 듯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입술을 깨문 이들, 눈을 치켜 뜬 이들, 주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들…
마침내 몇몇이 입을 열었습니다.
“왜 우리를 저들과 같게 대합니까? 우리는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일했습니다.”
그때 주인은 잔잔한 목소리로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권위로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나는 네게 잘못한 것이 없지 않느냐? 너희가 나와 한 데나리온 약속하지 않았느냐? 나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권리가 있지 않느냐? 네 눈이 악해진 것은 내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냐?”
저녁노을 속에서 포도원의 주인은 서 있었고, 그의 눈은 단지 그날의 노동이 아니라 그날 품꾼들을 불러 함께 포도원에 있게 한 은혜를 보고 있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구성원>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아가다적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는 포도원의 추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포도원, 포도원 주인, 포도원지기, 그리고 일당을 받고 일하러 온 포도원 품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며 돌보시고 열매를 맺으시는지 보여줍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과 그분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일꾼들을 부르러 나가는 포도원 청지기는 종종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꾼들은 고대 유대와 이스라엘 왕국에서 유래한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또한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일찍부터 아는 특권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후반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꾼들을 종교 지도자들에 비유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비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믿게 된 다른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이 아가다적 비유는 “포도원(ἀμπελών, ampelōn)—주인/집주인
(οἰκοδεσπότης)—청지기/작업반장(ἐπίτροπος)—품꾼(ἐργάται)—시장(ἀγορά)—품삯(μισθός/δηνάριον)—시간(ὥρα)”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핵심은 계약적 공정(“약속한 대로 지불”)과 주권적 은혜(“나중 온 자에게도 동일하게”)가 동시에 드러난다는 점, 그리고 “먼저-나중” 역전(19:30; 20:16)이 보상 서열 전복과 시기(“악한 눈”, ὀφθαλμὸς πονηρός) 비판으로 수렴된다는 점입니다.

1. 포도원 (ἀμπελών / כֶּרֶם)
포도원은 구약과 제2성전기 유대문학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메타포입니다. 이사야 5:1–7에서 כֶּרֶם (kerem, 포도원)은 하나님의 심으신 이스라엘로, 하나님은 농부로 묘사됩니다. 예수의 헬라어 표현 ἀμπελών (ampelōn) 역시 동일한 상징 체계를 따르고 있습니다.

탈무드(ברכות Berakhot 35a)에서는 포도원과 그 열매가 하나님의 축복과 인간의 노동이 결합된 선물로 묘사되며, 이를 경작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수하는 영적 행위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포도원이 주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70인역(LXX/타나크)에서 포도원은 언약 백성/하나님 관계의 메타포로 사용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사 5:1–7에 나오는 여호와의 포도원이 바로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있는 점입니다. (시 80:8–16; 렘 12:10). 랍비 문헌도 동일한 상징을 즐겨 씁니다(“בעל הבית/포도원의 주인” 모티프).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의 현장이자 수확의 마감이 임박한 터전입니다(“저물매”, ὀψίας γενομένης, 20:8). 더불어 심판/정산의 이미지(신 24:15; 레 19:13, “그 날 해 지기 전에 품삯을 주라”)가 주 배경을 이룹니다.

2. 포도원 주인·집주인 (οἰκοδεσπότης / בעל הבית)

히브리어 בַּעַל הַכֶּרֶם (ba‘al ha-kerem, 포도원의 주인)은 ‘소유자’뿐 아니라 ‘언약의 주체’를 암시합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사용된 οἰκοδεσπότης (oikodespotēs)는 ‘집(οἶκος)의 주인’이라는 의미지만, 유대인의 청중에게는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된 언약적 이미지로 들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드라쉬(שיר השירים רבה Shir HaShirim Rabbah 2:15)에서는 포도원 주인이 포도송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돌봄과 동일시됩니다.
이처럼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의 행동 패턴을 통해 많은 교훈을 나타내 줍니다.

“나갔다”(ἐξῆλθεν)가 반복(20:1, 3, 5, 6)되어 주도적·탐색적 부르심을 강조합니다. 고용은 합의(συμφωνήσας)와 보장(ἐπί τῷ ἡμέρᾳ δηνάριον)이 동반됩니다. 이 비유를 통해 포도원 주인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특히 임금 지급 국면에서 주인은 “내가 원하노라”(Ἐγὼ θέλω, 20:14), “내가 선하다”(ἐγὼ ἀγαθός εἰμι, 20:15)고 말합니다. 이는 주권(θέλω)과 선하심(ἀγαθός)이 임금 분배의 근거임을 천명합니다. 전통적으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먼저-나중” 역전의 결정권도 주인에게 있습니다.

3. 포도원 청지기 (עֶבֶד / ἐπίτροπος)

청지기는 종종 하나님의 사자를 상징하며, 여기서는 예수 자신 또는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들과 겹쳐 읽을 수 있습니다. 헬라어 ἐπίτροπος (epitropos, 관리인)은 당시 로마-헬라 세계에서 주인의 권한을 위임 받아 노동자를 모집하고 품삯을 지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탈무드(בבא מציעא Bava Metzia 83a)에서는 주인의 권한을 위임 받은 관리인이 일꾼 들과의 계약과 품삯에 대해 공정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비유에서 이 청지기는 하나님의 뜻을 위임 받아 사람들을 부르시는 사역을 수행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청지기의 역할은 주인의 명을 받아 지급 순서를 집행(“마지막부터 시작해 첫째까지”, 20:8)하는 데 있습니다. 고대 지주-청지기 체계의 표준 언어(ἐπίτροπος; cf. 갈 4:2)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청지기는 단순 집행자(천사/사자적 기능), 혹은 그리스도/메시아의 대행으로 읽는 전통이 있으나(교부 주해), 본문은 인물의 ‘도구성’에 초점을 둡니다. 과도한 알레고리화는 경계해야 합니다.

4. 품꾼들 (ἐργάται / פועלים)

포도원의 품꾼들의 비유에서 품꾼들은 사회사적 실재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일용직(day-laborer)의 전형적인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생계가 하루 품삯(δηνάριον)에 달려 있습니다. 시장(ἀγορά)에 나가 고용되길 기다립니다(마 20:3).
이들은 이른 아침-3시-6시-9시-11시(오전 6시, 9시, 12,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로 다섯 물결 고용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선 이들은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았습니다”(οὐδεὶς ἡμᾶς ἐμισθώσατο, 20:7)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무조건적 게으름이 아니라 배제/기회 박탈의 상황도 반영합니다.

(1) 일찍 부름받은 일꾼들 (פועלים ראשונים / ἐργάται τῆς πρώτης ὥρας)

히브리어 פועלים (po‘alim, 일꾼들)과 헬라어 ἐργάται (ergatai)는 문자적으로 ‘노동자’를 뜻하지만, 언약 안에서 먼저 부름 받은 이스라엘, 특히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일찍부터 배운 자들을 지칭합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 21:33–46의 포도원 비유와 연결되는 종교 지도자층—특히 바리새파와 서기관들—도 포함됩니다. 랍비 문헌(אבות Avot 5:21)에서는 토라를 젊을 때부터 배운 자의 지혜를 ‘부드러운 종이에 새긴 먹물’에 비유하며, 초기에 부름 받아 율법에 익숙한 자들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2)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 (פועלים אחרונים / ἐργάται τῆς ἐσχάτης ὥρας)

헬라어 ἐσχάτης (eschatēs, 마지막)라는 단어는 종말론적 뉘앙스가 가능합니다. 나중에 부름받은 자들은 비유대인,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포함합니다. 탈무드(פסחים Pesachim 87b)에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종말에 의로움으로 받아들이신다는 주제가 다뤄집니다. 이 배경에서 예수의 비유는 민족적·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품꾼(일꾼)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전통적 읽기:먼저 온 자=오래된 제자/이스라엘, 나중 온 자=후기 제자/이방—대체가 아닌 포용적 연합(하나의 임금, 하나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 영성적 읽기: 생애 후반/임종 직전 회심자도 동일 생명(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 공동체적 읽기: 경험·기간 서열을 상쇄하는 은혜의 평준화입니다.

5. 시장 (ἀγορά)

포도원 품꾼들을 찾으러 간 인력 시장은 아고라입니다. 이곳은 고용주–노동자 매칭의 현장(20:3)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 도시경제의 일상적 풍경의 모습입니다. 일부 랍비 전승은 기도 시간에 시장에서 한가롭게 서 있는 자를 “게으른/무익한”(בָּטֵל) 자로 단죄(예: b. Berakhot 6b, 기도 경시 비판)합니다. 본문은 “고용되지 못함”을 말하므로 윤리적 단죄로 곧장 치환하지는 말아야 합니다(문맥 주의).

6. 품삯 (מַשְׂכֹּרֶת / μισθός): 데나리온(δηνάριον)과 임금(μισθός/שָׂכָר)

히브리어 מַשְׂכֹּרֶת (maskoret, 품삯)와 헬라어 μισθός (misthos)는 계약에 따른 정당한 보상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보상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미쉬나(בבא מציעא Bava Metzia 7:1)에서는 품삯 지급을 해가 지기 전에 마쳐야 한다는 신명기 24:15의 율법을 재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동일한 품삯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공로를 넘어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은혜 중심의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당시의 품삯은 하루의 경제 단위로 데나리온 (δηνάριον)은 당시 평균 일당(군인의 일급과 유사)입니다. 해 질 전에 품삯을 주라(“בְּיוֹמוֹ תִתֵּן שְׂכָרוֹ… וְלֹא תָבֹא עָלָיו הַשֶּׁמֶשׁ”, 신 24:15; 레 19:13)는 말씀은 당시의 임금 체계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비유의 “저물매 지급”(20:8)은 토라의 임금 정의 규정을 충실히 반영합니다.

랍비 법전(m. Bava Metzia 9, passim)도 이를 세부화해 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지급하는 품삯이 주는 것은 정의(약속한 δηνάριον 지급)와 은혜(나중 온 자에게도 동일 지급)의 동시 성립입니다. 주인은 먼저 합의(συμφωνήσας)를 지키고(정의), 그 위에 초과 은혜를 더합니다.

7. 시간(ὥρα)과 종교적 리듬

제 1, 3, 6, 9, 11시(오전 6, 9, 정오, 오후 3, 5시) 는 고대 시간대를 잘 나타내면 이러한 시간대 당시 유대인의 종교적 삶의 사이클을 잘 보여 줍니다. 일부 전승은 기도 시각 (샤하릿–민하–마아립 저녁 제사)과의 공명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본문은 종말론적 ‘마감’(evening)과 부르심의 반복성을 최우선 메시지로 삼습니다.

“제11시는 마지막 시각으로 최후의 부르심 즉 하나님 나라의 완결에 필요한 총동원을 시사합니다.

8. 지급의 순서: “마지막부터 먼저까지”

주인의 명령—“ἀπὸ τῶν ἐσχάτων ἕως τῶν πρώτων”(20:8)은 문화적 윤리 상황을 암시합니다. 당시 공동체 윤리를 보여 주는데 후발 주자를 공적 장면에서 먼저 세움으로써, 질투·서열의 시선을 해체합니다.

9. 불평(γογγύζω)과 “악한 눈”(ὀφθαλμὸς πονηρός / עַיִן רָעָה)

수군거리다/원망하다”(ἐγόγγυζον, 20:11는 출애굽 광야 서사의 ‘원망’을 소환합니다.
“악한 눈”(20:15)은 고대 유대·지중해권의 질시·시기 관용구(‘아인 라아’, עין רעה)와 직결—남의 번영을 배 아파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주인은 시기의 눈을 책망하고, 자신의 선하심을 재천명합니다.

10. 해석 프레임의 균형점

“먼저=유대인, 나중=이방인” 도식으로 나누는 것은 오랫동안 서구신학이 해 온 일입니다. 이는 원래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비유의 핵심(은혜/시기 금지/공동 완결)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대체가 아니라 포용과 한 임금 안의 연합을 가르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다층적 적용입니다.

• 구속사 시기(이스라엘→열방)
• 개인 생애(유년→말년 회심)
• 사역 연한(오래 섬김→늦게 합류)

이러한 여러 모습에서 성립에서 보여주는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여 줍니다. 공통분모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하심입니다.

<포도원이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심고, 잘 가꾸고, 완벽하게 손질한 포도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포도원은 나쁜 열매를 맺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버려 망가뜨렸습니다. 이사야는 그 포도원을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과 연관 지었습니다. 포도원을 버린 후, 여러 나라에서 여러 포도원 주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이 애가는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사 5장). 나중에 재앙을 맞은 포도원은 주님(YHVH)께서 친히 돌보시는 보호받는 포도원이 됩니다. 심판의 장소가 아니라, 그곳은 평화와 위로, 그리고 악한 것들로부터 보호받는 장소가 됩니다. 야곱의 죄는 용서받고 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열방에 흩어졌던 자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입니다(사 27장). 포도나무 이야기는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다양한 측면을 지닌 친숙한 이야기로 등장합니다.

1. 랍비 유대교에서의 포도원 이해

랍비 유대교 전통에서 포도원(כֶּרֶם, kerem)은 단순한 농업 경작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미드라쉬와 탈무드에서 하나님은 농부(בַּעַל הַכֶּרֶם)로 묘사되며, 포도원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율법(תּוֹרָה)과 언약 안에 심겨진 백성을 의미합니다.
미드라쉬 시편 (Midrash Tehillim 80:9)에서는 시편 80:8–11을 주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גֶּפֶן מִמִּצְרַיִם תַּסִּיעַ – זוֹ יִשְׂרָאֵל; תְּגָרֵשׁ גּוֹיִם וַתִּטָּעֵהָ – בְּאַרְצוֹ
(“You brought a vine out of Egypt – this is Israel; You drove out the nations and planted it – in His land.”)

이 구절은 출애굽 사건을 “포도나무를 이식하는” 행위로 해석하며,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심으셨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Avot de-Rabbi Natan(Version A, ch. 34)에서는 토라 학습 공동체를 “하나님의 포도원”에 비유하며, 하나님이 아침·정오·오후에 일꾼을 부르듯, 각 사람을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에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20장의 시간대별 품꾼 고용 장면과 병행구조를 형성합니다.

b. Berakhot 5a에서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은혜(חֶסֶד)가 행위의 비례성을 넘어설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균형 개념은 마태복음 20장의 주인의 은혜와 공의의 긴장과 맞닿아 있습니다.

2. 구약에서의 포도원 모티프

구약성경에서 포도원은 언약, 심판, 회복의 세 가지 차원에서 중요한 신학적 상징입니다.

1. 언약과 선택 – 이사야 5:1–7

כִּי כֶרֶם יְהוָה צְבָאוֹת בֵּית יִשְׂרָאֵל וְאִישׁ יְהוּדָה נְטַע שַׁעֲשׁוּעָיו
“For the vineyard of the LORD of hosts is the house of Israel, and the men of Judah are His pleasant planting.”

이사야는 하나님을 농부,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묘사하며, 기대한 것은 “justice” (מִשְׁפָּט)와 “righteousness” (צְדָקָה)였으나, 실제로는 “bloodshed”와 “cry of distress”가 나왔다고 탄식합니다.

2. 출애굽과 정착 – 시편 80:8–11

גֶּפֶן מִמִּצְרַיִם תַּסִּיעַ… וַתִּשְׁלַח קְצִירֶיהָ עַד-יָם
“You brought a vine out of Egypt… it sent out its branches to the sea.”

이 이미지는 하나님이 구속사 안에서 이스라엘을 심으시고 번성하게 하신 사건을 시적으로 형상화합니다.

3. 회복의 약속 – 아모스 9:14

וְנָטְעוּ כְרָמִים וְשָׁתוּ אֶת-יֵינָם
“They shall plant vineyards and drink their wine.”

심판 이후의 회복된 땅과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비전입니다.

3. 예수님의 관점 – 하나님 나라의 은혜 경제

마태복음 20:1–16에서 포도원은 헬라어로 ἀμπελών (ampelōn)으로, 70인역(LXX)에서 kerem을 번역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전통적 이스라엘 상징을 사용하되, 그것을 하나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의 은혜와 주권 원리에 따라 재해석하십니다.

• 은혜의 보상 구조 – 하루 품삯인 “1 δηνάριον”(denarius)은 구원의 완전한 몫을 상징하며, 일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 주인의 절대 주권 – “θέλω τοῦτο δοῦναι τῷ ἐσχάτῳ ὡς καὶ σοί” (“I choose to give to this last as I give to you”)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주권적 주인임을 드러냅니다.
• 역전 원리 – “οἱ ἔσχατοι ἔσονται πρῶτοι”는 언약 특권에 안주하는 자와 마지막에 부름받은 이방인·죄인 모두를 동일한 공동체로 묶는 급진적 선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포도원을 이스라엘만의 영역에서 모든 민족이 은혜로 참여하는 보편적 하나님 나라로 확장하십니다.

4. 청중의 인식

예수님의 청중은 포도원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즉시 회당에서 낭독되던 이사야 5장과 시편 80편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농업 현실
1세기 유대의 농민들은 품꾼 시장(ἀγορά)과 추수의 시급성을 잘 알았습니다. 포도 추수는 보통 딱 정해진 날에 완료해야 했기에, 마지막 한 시간에도 일꾼이 필요한 상황은 현실적인 설정입니다.

공정성 개념
랍비 전통에서는 “행위에 따른 보상”이 하나님의 공의로 여겨졌기에(참조: b. Sanhedrin 90a), 동일한 품삯 지급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메시지 충돌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의 공정성 개념을 뒤집고,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공로 계산을 초월한다는 점을 선포했습니다.

<포도원 주인>

1. 랍비 유대교 전통에서의 포도원 주인

포도원(כֶּרֶם kerem)은 이스라엘 공동체이며, 포도원 주인(בַּעַל הַכֶּרֶם)은 하나님(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포도나무”(이스라엘)를 옮겨 심고(시 80), 울타리를 치고 망대를 세우십니다(사 5). 하나님께서는 농부를 통해 의(צדקה)와 정의(משפט)의 열매를 기대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토라 학습 공동체는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보고, 하나님이 각기 다른 때에 일꾼(제자)을 부르신다는 가르침이 전승에 등장합니다. 랍비 유대교에서 포도원 주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며, 그분이 “소유·보호·기대·심판”의 권한을 가진 분으로 인식됩니다.

2. 구약성경의 포도원 주인

• 이사야 5장(‘포도원의 노래’):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집”이라는 명시적 등치입니다. 주인은 여호와이고, 요구하는 열매는 정의/공의입니다. 열매가 들포도일 경우 울타리 제거·방치·심판이 선포됩니다.
• 시편 80편: 하나님이 출애굽의 포도나무를 가나안에 심으셨고(주인은 하나님), 보호와 번성을 주셨으나 타격을 받자 다시 돌보아 달라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 아모스 9장 등 회복 본문: 심판 후 다시 포도원을 가꾸고 그 열매를 마시게 하시는 회복의 주체도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전체 흐름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여호와)—선택·보호·기대·심판·회복을 모두 주관하는 주권자입니다.

3. 예수님의 비유(마 20:1–16)에서의 포도원 주인

“천국이 마치 집주인(oikodespotēs) 과 같은데…”로 시작합니다. 비유의 인물과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운영 원리”를 가리키는 대표 비유입니다.

• 부르심의 주권: 이른 아침부터 종일 주인이 직접 나가 일꾼을 부릅니다(은혜의 선행성).
• 상여의 주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권리가 없느냐?”—출 33:19(“은혜·긍휼은 내가 주권적으로 베푼다”)와 상응합니다.
• 보상의 성격: 노동량 비례가 아니라 언약적 동일 몫(한 데나리온)—구원의 충만·왕국 참여분을 상징합니다.

마 20장의 “포도원 주인”은 군더더기 없이 하나님(특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가리킵니다. (마 21장의 ‘악한 소작인’ 비유에서는 주인=하나님, 아들=예수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마 20은 주권적 은혜 질서가 초점입니다.)

4. 1세기 청중(유대인)의 청취 맥락에서의 포도원 주인

당시 청중은 회당에서 익숙했던 이사야 5장/시편 80편 때문에 “포도원=이스라엘, 주인=하나님”이라는 등치가 자동으로 떠오릅니다. 품꾼 시장(광장)에서 그날 인력을 구해 추수를 마치는 현실은 극사실적—따라서 “마감 직전까지 일꾼을 부르는 주인”이라는 디테일은 하나님의 구원 스케줄(때가 차매)을 감각적으로 각인 시킵니다.

“늦게 온 자에게도 동일 임금”은 당시 랍비적 공정성(행위 대비 보상) 감각에 의도적 균열을 일으킵니다. 청중은 “주인은 누구인가?”를 넘어 “그런 보상 방식을 정당화할 수 있는 분은 누구인가?”를 묻게 되고, 답은 하나님(주권·은혜·선하심)으로 수렴됩니다.

5. 각 구성원에 대한 정의

랍비 유대교의 관점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과 토라 공동체를 가리키며,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관점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보호하시고, 열매를 요구하시며, 불순종 시에는 심판하시되 회복의 길도 여신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포도원이 하나님이 심으신 이스라엘로 묘사되며,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의와 정의의 열매를 요구하시고, 백성이 불순종하면 심판하시지만, 회복 또한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0장에서 말씀하신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 즉 그 운영 원리가 드러나는 무대를 의미합니다. 이때 주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주인이시며, 부르심의 선행성, 동일한 몫의 지급, 그리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역전의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1세기 청중은 포도원 이야기를 들을 때 즉각적으로 이스라엘을 연상하며, 동시에 자신들이 살던 현실 경제 상황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이들에게는 기존의 공정성 개념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가 신앙의 분기점이 됩니다.

6. “주인이 곧 하나님”일 때 생략되기 쉬운 두 가지

1. 동일시의 방식

비유는 1:1 알레고리가 아니라 왕국의 방식을 드러내는 대표 인물을 세웁니다. 주인이 하는 말/행동이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히 반영하는 지점(부르심·은혜·주권)은 그대로 읽되, 고대 지주 계급의 전부를 신격화하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2. 공정성의 해체가 아님

예수님은 ‘정의’를 폐한 게 아니라, 구원 배분의 층위에서 “노동-대가” 공식이 아니라 언약-은혜 공식을 우선시한다고 밝히신 겁니다(“약속한 것은 지키심” + “더 주실 자유”). 약속 이행(정의)과 은혜의 초과 지급(선하심)이 동시에 성립합니다.

7. 왜 “주인=하나님”이 이 비유에서 결정적인가?

시간 전역(아침~마감 직전)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초대—역사 전기간에 걸친 구원 초대의 은유입니다. 마지막부터 먼저 지급—해석의 초점을 ‘역전의 메시지’에 의도적으로 두려는 내러티브 장치(하늘의 가치질서)입니다.

권리 주장 vs. 은혜 찬양—불평(“공정성”)과 감사(“은혜”)를 가르는 기준은 주인/하나님의 선하심 인식입니다. “네 눈이 악하냐? 나는 선한데”(마 20:15–16)는 하나님의 성품 계시이자 청중의 심사(시험)입니다.

8. 포도원의 구성원이 주는 의미

랍비 유대교·구약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스라엘을 심고 가꾸며, 의/정의를 열매로 요구하고, 불의에는 심판·회복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의 비유(마 20)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언약의 약속은 확실히 지키되(먼저 온 자의 한 데나리온), 은혜를 주권적으로 더하시는 분(나중 온 자에게도 동일 몫). 이 은혜 질서를 “먼저/나중 역전”으로 천명합니다.

청중 인식
“주인=하나님”으로 곧장 연결되되, 그 하나님의 보상 방식이 은혜-주권-관계 중심임을 받아들이느냐가 신앙의 분기점입니다.

<품꾼 고용 시간과 기도 시간>

포도원 주인은 오전 6시,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일꾼들을 고용했습니다. 이 시간들은 오전 9시와 정오 그리고 오후3시 기도 시간에 해당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게으르다”라는 단어는 “게으르거나 쓸모없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의미는 엄청납니다. 실직한 사람들은 기도 시간에는 참여하기보다는 시장에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자리를 구하는 대신 쓸모없는 일꾼들을 찾아 포도원에서 일했습니다. 원래 일꾼이었던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쓸모없는 포도원과 수익성 있는 포도원에 대해 이사야가 전한 이야기와 어떻게 유사한지 알 수 있습니다.

1. 시간 구조의 신학적 함의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주인은 다섯 번(ἅμα τῇ ἑνδεκάτῃ ὥρᾳ, “제11시에”) 일꾼을 고용합니다. 이 시간 배치는 단순한 노동 계약의 구도가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의 기도 시간과 하루의 종교적 리듬을 반영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구약과 랍비 문헌에서의 시간 이해, 그리고 예수 시대 청중이 공유한 종교 일과를 고찰해야 합니다.

2. 시간 배치와 유대 기도 전통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장)에 등장하는 ‘제1시’부터 ‘제11시’까지의 시간 표현은, 1세기 유대인의 일상 시간 체계와 기도 전통, 그리고 성전 제사 시간과 긴밀히 맞물려 있습니다.

(1) 제 1시

제1시(ὥρα πρώτη, שָׁעָה רִאשׁוֹנָה)는 현대 시각으로 오전 6시에 해당하며, 유대인들에게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었습니다. 창조의 첫날을 회상하며 노동과 경건의 출발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 헬라어 원문: ὥρα πρώτη (Mat 20:1)
• 히브리어 대응: שָׁעָה רִאשׁוֹנָה – “첫 번째 시간”
• 배경: 하루 노동의 시작 시각이며, 창세기 1장의 창조 첫날을 기념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 주석: 미쉬나 Berakhot 1:1은 “아침에 쉐마를 드리는 첫 시각”을 논하며, 일의 시작과 경건의 출발이 연결됨을 보여줍니다.
• 의미: 하나님의 부르심이 하루의 첫 순간부터 임한다는 상징합니다.

(2) 제 3시

제3시(ὥρα τρίτη, שָׁעָה שְׁלִישִׁית)는 오전 9시로, 아침 기도인 שַׁחֲרִית(샤하릿)이 드려지는 시간입니다. 이때 시편 찬송과 쉐마(שְׁמַע יִשְׂרָאֵל, 신 6:4–9) 고백이 중심을 이루며, 하나님의 유일성과 언약적 사랑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 헬라어 원문: ὥρα τρίτη
• 히브리어 대응: שָׁעָה שְׁלִישִׁית – “세 번째 시간”
• 유대 기도 전통: 아침 기도 שַׁחֲרִית(Shacharit)의 절정 시각입니다. 이때 שְׁמַע יִשְׂרָאֵל(신 6:4–9) 고백과 시편 찬송이 낭송되었습니다.
• 탈무드 주석: Berakhot 26b에 따르면, 제3시는 성령 강림(행 2:15)과도 연결되며, 하나님 임재의 표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 의미: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 아침 경건의 시간과 맞물려 모든 민족에게 확장됩니다.

(3) 제 6시

제6시(ὥρα ἕκτη, שָׁעָה שִׁשִּׁית)는 정오를 가리키며, מִנְחָה גְדוֹלָה(민하 그돌라) 기도가 드려졌습니다. 이는 회개와 간구의 시간이며, 성전에서 드려지는 번제와 맞물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시 봉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헬라어 원문: ὥρα ἕκτη
• 히브리어 대응: שָׁעָה שִׁשִּׁית – “여섯 번째 시간”
• 유대 기도 전통: מִנְחָה גְדוֹלָה(Mincha Gedolah, ‘큰 민하’)의 시작입니다. 성전 번제가 드려지는 시각과도 겹쳐 집니다.
• 미쉬나 주석: Tamid 3:7은 번제의 시간과 기도의 연결을 기록하며, 회개와 간구가 하나님 나라 노동의 중심임을 강조합니다.
• 의미: 복음 사역과 회개의 부르심이 하루의 정점에서 주어집니다.

(4) 제9시

제9시(ὥρα ἐνάτη, שָׁעָה תְּשִׁיעִית)는 오후 3시로, מִנְחָה קְטַנָּה(민하 크타나) 기도의 시각입니다. 이때 성전 저녁 제사가 드려졌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하고 은혜를 구하는 절정의 시간이었습니다(참고: 행 3:1).

• 헬라어 원문: ὥρα ἐνάτη
• 히브리어 대응: שָׁעָה תְּשִׁיעִית – “아홉 번째 시간”
• 유대 기도 전통: מִנְחָה קְטַנָּה(Mincha Ketana, ‘작은 민하’)의 시각입니다. 성전 저녁 제사가 드려졌으며(출 29:39), 하나님의 임재를 기념하는 시간입니다.
• 탈무드 주석: Pesachim 58a는 오후 제사의 시간을 상세히 규정하며,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하루의 마무리와 종말론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 의미: 하나님 은혜의 완성 전 마지막 결실의 시간입니다.

(5) 제 11시

제11시(ὥρα ἑνδεκάτη, שָׁעָה אַחַת עֶשְׂרֵה)는 오후 5시 무렵으로, 노동이 끝나기 직전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이 시간은 종말론적 부르심, 즉 마지막 기회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시간과 조건을 초월하여 임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 헬라어 원문: ὥρα ἑνδεκάτη
• 히브리어 대응: שָׁעָה אַחַת עֶשְׂרֵה – “열한 번째 시간”
• 배경: 노동 종료 직전.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포도 수확의 마지막 부름을 의미하며, ‘마지막 회개’ 또는 ‘마지막 구원의 기회’라는 종말론적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 랍비 문헌: Avot de-Rabbi Natan 31b는 ‘마지막 순간의 회개도 받아들여진다’는 교훈을 전하며, 이것이 마태복음의 비유 메시지와 직결됩니다.
• 의미: 은혜의 시간은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은 끝까지 유효합니다.

이 시간 구조는 단순히 하루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기도·제사 전통, 종말론적 기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 결합된 신학적 틀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이 틀 안에서 읽을 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선언(마 20:16)이 시간과 계층, 민족을 초월한 은혜의 질서를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3. 랍비 유대교의 평가: “게으른 자들”(בָּטֵל)

예루살렘 탈무드(j. Berakhot 6b)와 바빌로니아 탈무드(b. Berakhot 6b)에서는, 공동체의 기도 시간에 참여하지 않고 시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자를 בָּטֵל (battel, 게으른 자 / 무익한 자)라 규정합니다.

이 용어는 단순한 직업적 무능이 아니라 영적 무책임을 지칭하며, 기도에 불참하는 것은 회중의 영적 유익에서 스스로를 제외하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이 맥락에서 오후 5시에야 고용된 자들은 신앙적 부르심에 늦게 응답한 자들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כָּל הַמְבַטֵּל מִן הַתְּפִלָּה – כְּאִלּוּ בִּטֵּל חַיָּיו” (b. Berakhot 6b)
“기도를 게을리 하는 자는 마치 자기 생명을 버린 자와 같다.”

4. 예수님의 의도와 은혜의 강조

마태복음 20장의 헬라어 원문은, 마지막에 고용된 자들에 대해 “οὐδὲν ἀργοί “(“아무 일도 없이”, 마 20:6)고 명시합니다. 이는 랍비 제라의 비유(예루살렘 탈무드 j. Berakhot 2:8(5c))에서 마지막 일꾼이 ‘더 많은 성취를 했다’고 칭찬받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공로(μισθός, ‘보상’)의 세계가 아니라 χάρις (‘은혜’)의 세계를 선언합니다. 이는 공로와 시간 투자에 따른 서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이 보상의 기준이 됨을 드러냅니다.

5. 이사야의 포도원과의 신학적 연속성

이사야 5:7(MT):
“כִּי כֶרֶם יְהוָה צְבָאוֹת בֵּית יִשְׂרָאֵל”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이사야는 결실 없는 포도원(이스라엘)을 심판의 대상으로 경고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마지막 순간의 참여로 포도원의 수확이 완성됩니다. 따라서 예수의 포도원은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포괄적 구원의 장으로 변모합니다.

6. 종말론적 의미: 마지막 부르심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제11시(오후 5시)의 고용은 종말론적 상징성을 가집니다. 고대 유대 문헌에서도 마지막 수확일은 “그 날”(הַיּוֹם הַהוּא, 사 27:13)로 불리며, 하나님의 최종 심판 혹은 구원의 날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때 일꾼이 없다면 수확은 완성되지 못하며,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미완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처음 일한 자와 마지막 일한 자 모두가 필요하며, 이는 공동체의 포괄성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성을 상징합니다.

7. 하루 시간 구조에 대한 종합적 평가

• 랍비 유대교: 기도에 불참하는 게으른 자를 경고하며, 부르심의 시간 엄수와 공동체 참여를 강조합니다.
• 예수님의 비유: 공로보다 은혜, 시간보다 관계, 서열보다 포괄성을 강조합니다.
• 구약적 배경: 포도원 =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 관계. 결실 없는 포도원은 심판, 완성된 수확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 종합: 마태복음 20장의 시간 구조는 유대인의 종교적 일과와 종말론적 부르심을 동시에 담아, 하나님의 은혜와 나라의 완성이라는 신학적 핵심을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20장의 비유와 1세기 유대·로마 사회 맥락>

1. 본문 개관과 위치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년 이야기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19:30)라는 말씀의 직접적인 적용이자 확장으로 주어집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부,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인 경제와 은혜의 질서를 가르치는 장면 속에 놓여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1. 초기 장면 설정 –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품꾼들을 불러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보내는 장면(1–2절)
2. 반복되는 채용 – 세 번 더 시장에 나가 남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장면(3–7절)
3. 임금 지급의 반전 – 늦게 온 사람부터 먼저 임금을 지급하고,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한 데나리온을 주는 장면(8–10절)
4. 불평과 주인의 응답 – 오래 일한 사람들의 항의와 주인의 해석(11–15절)
5. 결론적 격언 –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

이 구조는 반복(repetition)과 전환(turn), 그리고 마지막에 격언(apophthegm)으로 마무리되는 전형적인 유대 랍비적 이야기 형식(Aggadic mashal)의 틀을 따르고 있습니다.

2. 1세기 유대·로마의 경제와 품꾼 제도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와 로마의 경제 구조를 배경으로 봐야 합니다.

(1) 품꾼(μισθωτός, misthōtos)

• 하루하루 일거리를 찾아 시장에 나오는 계절 노동자.
•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 세금과 빚으로 땅을 잃은 사람, 이주민 등이 주를 이룸.
• 랍비 문헌(미쉬나, 바바 메치아 7:1)에서도 하루 품꾼은 해 질 때까지 품삯을 받아야 하며, 고용주는 정해진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기록함.

(2) 한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on)

• 로마 제국에서 하루 노동의 표준 임금.
• 군인의 하루 급여와도 동일한 금액(약 12 아사리온).
• 당시 빵 8~10개 값으로, 하루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 단위였음.

(3) 시장(ἀγορά, agora)

• 단순한 거래 장소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기다리는 집합소 역할.
• 랍비 전통에도, 새벽에 시장에 나와 일하지 못하면 가족이 굶주릴 수 있다는 사회적 긴박감이 언급됨(예: 탈무드 바바 메치아 83a).

3. 비유의 역사·문학적 특징

• 시간의 강조: “아침 일찍”, “제3시”, “제6시”, “제9시”, “제11시”라는 구체적인 시간 표기는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도 유효함을 상징합니다.
• 임금 지급의 역전: 율법적 기대와 사회적 관행을 뒤집는 장치. 일반적으로는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받지만, 주인은 나중 온 자부터 지급함으로써 듣는 자에게 불편함과 질문을 던집니다.
• 주인의 자율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라는 표현은 신명기 15:7–11의 자비로운 고용 원칙과 맞물리며, 동시에 로마법상 사유 재산권을 인정하는 문맥과도 연결됩니다.
• 격언적 결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구절은, 단순히 시간의 순서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가치 질서의 전환을 선언합니다.

4. 랍비 문헌과의 평행 구절

이 비유는 랍비 문학 속 하나님의 보상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1. 미쉬나 아보트 5:22 – “상은 일의 양이 아니라 마음과 헌신의 질에 따라 주어진다.”
2. 탈무드 브라코트 17a – “하나님은 짧은 시간에도 온 마음을 다한 이를, 긴 시간 봉사한 이와 같이 대하신다.”
3. 미드라쉬 라바(출애굽기 라바 25:2) – 하루 해질녘 부름받은 일꾼이 종일 일한 자와 같은 품삯을 받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는 예화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예수님의 비유가 단순히 경제 정의나 사회 비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을 선언하는 하가다적 메시지임을 보여줍니다.

5. 하나님 나라의 경제와 은혜의 질서

(1) “하나님의 경제”와 세상의 경제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태복음 20:1–16)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일한 시간과 보상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당시 세상의 경제 원칙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계약, 공정성, 비례성에 기초했습니다. 로마 제국 하에서 노동 시장은 철저히 계약과 시간당 임금 체계에 따라 운영되었고, 해 질 무렵 고용된 사람은 하루 임금의 일부만 받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경제는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합니다. 그 기초는 은혜, 주권, 그리고 관계입니다. 주인은 자격과 성과를 계산하지 않고,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이에게 동일한 품삯을 줍니다. 이는 경제 정의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과 인격적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경제 원칙은 대체로 계약, 공정성, 비례성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경제는 은혜, 주권, 그리고 관계를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 세상: 노력 → 대가 → 만족
• 하나님 나라: 부르심 → 은혜 → 감사

이 차이는 단순히 경제 시스템 즉 보스 체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의 가치와 위치가 행위의 양이 아니라 주인과의 관계로 결정된다는 선언입니다.

특히 포도원 추수의 시기는 매일 있는 일이 아니라, 가장 적정한 날에 집중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포도송이가 가장 알맞게 익었을 때 하루 안에 수확을 마치지 않으면, 다음날에는 과숙으로 썩거나 품질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뿐만 아니라 해가 지기 직전까지도 일꾼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완성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이 원리는 또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과 직결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먼저 온 사람은 특권과 우선권을 누리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늦게 온 자도 동일한 영광에 참여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가 성취와 노력의 누적이 아니라 은혜의 충만함으로 배분되기 때문입니다.

(2)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의미

비유 속 “한 데나리온”은 단순한 임금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신약의 다른 본문들과 연결됩니다.

• 마태 19:29 – “영생을 상속하리라”
• 로마서 6:23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
• 요한복음 10:10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한 데나리온은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참여”를 상징하며, 이는 오래 섬긴 자나 늦게 온 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Teshuvah(회개)의 시점이 인생의 어느 때든 상관없이, 돌아오는 자는 모두 동일한 생명과 기업에 참여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3) 불평하는 이들과 은혜받은 이들

먼저 온 품꾼들은 불평합니다. 그 불평은 “비교”에서 시작됩니다.

• 비교의 기준: 나와 다른 사람의 노력과 대가를 비교
• 하나님의 기준: 약속한 것을 지켰는가, 그리고 은혜를 주권적으로 베풀었는가

이 장면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 속 큰아들의 반응과도 평행합니다. 둘 다 “공정”이라는 인간적 기준과 “은혜”라는 하나님의 기준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랍비 문헌에도 유사한 장면이 있습니다. 탈무드 브라코트 28b에서는 늦게 회개한 자가 하나님의 자비로 짧은 시간 안에 의인의 자리와 동일한 영광을 받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것은 오래된 신앙생활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막 돌아온 자들에게는 소망을 줍니다.

(4)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의 하나님 나라 원리

예수님은 결론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시간상의 순서를 뒤집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평가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임을 선언합니다.

• 율법적 경건 중심의 유대 사회: 먼저 된 자 = 율법을 오래 지킨 자,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먼저 된 자 = 은혜에 먼저 응답한 자, 주인과의 관계 속에 사는 자

따라서 이 비유는 단순히 노동과 보상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입문과 보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는 복음의 핵심을 선포합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에 아래에서 따로 섹션에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6. Teshuvah 이후의 여정

이 비유는 회개(Teshuvah) 이후의 여정을 조명합니다.

• 아침 일찍 부름 받은 자는 평생을 섬기며 주인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 마지막 시간에 부름 받은 자도 동일한 생명을 누리지만, 그는 짧은 시간이지만 전심으로 응답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일했는가”가 아니라, “주인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는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도와 랍비 유대교의 전통이 만나는 지점이며, 동시에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랍비 유대교와의 비교 – 보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주권>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한 시간과 보상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일까요? 포도원 주인은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단 한 시간 일한 사람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δηνάριον)을 지급합니다. 이는 세상의 경제원칙—계약, 공정성, 비례성—과 현저히 대비됩니다.

1. 헬라어·히브리어 어원 분석

품삯: δηνάριον (dēnarion)
로마 은화로, 1일 노동의 통상 임금(마 20:2). 라틴어 denarius에서 기원합니다. 미슈나에 따르면 당시 유대 지역의 농부 일당은 한 데나리온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곡물량이었습니다(미쉬나 Baba Metzia 7:1)【^1】.

• 보상: μισθός (misthos)
‘삯, 보수, 상급’을 의미하며, 히브리어 שָׂכָר (sākār)에 해당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종종 의인에게 sākār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창 15:1; 사 40:10).

주인의 의지: θέλω (thelō)
마20:14에서 주인이 “나는 내 것을 가지고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기를 원하노라”라고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권리의 선언이며,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연상시킵니다.

2. 구약과 제2성전기 배경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상 개념은 행위-대가의 비례성에만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 만나 사건(출 16:16–18):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은혜에 기반한 공급의 예입니다.
• 레위기 희년법(레 25:8–55): 경제적 평준화를 통한 공동체 회복입니다.
제2성전기 유대 문헌에서도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로 보상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락서(Sirach) 35:18–19에서는 “주님은 상급을 지체치 않으시며, 공의로 갚으신다”고 말하지만, 그 ‘공의’에는 은혜적 요소가 내포됩니다.

3. 랍비 유대교 관점

미쉬나와 탈무드에는 보상과 은혜를 모두 언급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 미쉬나 아보트 2:16 — “너는 일을 다 마칠 의무는 없지만, 그 일을 피할 자유도 없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수확 완결성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 탈무드 바블리, 베라코트 5a —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상하시지만, 자비로 덮어주신다.” (לפי רוב המעשה — 그러나 בְּרַחֲמִים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랍비들의 ‘행위에 따른 보상’ 언어를 수용하면서도, 결론을 ‘전적인 은혜’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가 은혜(χάρις)와 주권, 그리고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으로 당시 랍비 유대교의 전통적 보상 이해와 대비됩니다.

4. 랍비 유대교의 전통적 보상 이해

랍비 유대교에서 보상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1. 이 세상에서의 보상 (Olam HaZeh, עולם הזה) – 장수, 번영, 평화, 자손의 번성
2. 오는 세상에서의 보상 (Olam HaBa, עולם הבא) – 의인들이 받는 영생과 하나님 임재 속의 안식

탈무드 Sanhedrin 90a는 “의인은 오는 세상에서 몫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몫”은 행위의 양과 질, 그리고 율법의 충실한 준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율법과 선행의 양이 곧 보상의 척도였습니다.

5. 랍비 문헌 속 ‘마지막 순간 회개자’

그러나 랍비 문헌에도 예외적인 자비의 사례가 있습니다. Pesikta Rabbati 44에서는 죽기 직전에 회개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경우 그의 행위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보상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예외적이고, 대부분의 랍비 가르침에서는 여전히 오랜 충성과 행위가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6. 예수님의 비유가 던지는 도전

마태복음 20장에서 주인은 단순히 “공정한” 고용주가 아니라, “선한”(ἀγαθός) 주인입니다(20:15). 여기서 ἀγαθός는 윤리적 선함뿐 아니라, 구약 히브리어 טוֹב (tov, 시 145: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에 선하시며…”)과 연결됩니다. 즉, 보상의 기준이 ‘얼마나 일했는가’가 아니라 ‘주인의 선함’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이처럼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바로 이 랍비적 보상 원리를 전복시킵니다.

• 랍비 전통: 오래된 순종과 많은 선행 → 더 큰 보상
•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진정성 → 동일한 보상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적 경건과 혈통적 우위를 자부하던 사람들에게 불편한 도전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그들이 사역과 제자도의 기간을 보상의 척도로 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7. 주권적 은혜의 강조

마태복음 20장 주인의 말,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마 20:15)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33:19, “내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과 평행합니다. 즉, 보상의 기준은 인간의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입니다.

8. 종말론적 재해석

랍비 유대교는 종말론에서 보상과 심판을 ‘계산된 결산’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종말의 보상을 은혜의 완성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누가복음 23:43에서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 하신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와 같은 은혜의 선언과도 일맥상통합니다.

9. 두 전통의 만남과 갈림길

랍비 유대교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 ‘회개한 자에게 보상이 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보상의 계산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 랍비 유대교: 보상은 대개 “행위의 양과 질”에 따라 결정
•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보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관계의 진정성”에 따라 결정

이 차이가 바로, 당시 예수님의 청중이 이 비유를 듣고 마음이 뒤집히는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보상의 원리는 단순한 노동경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먼저 부름 받은 이나 나중에 부름 받은 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간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랍비 문헌이 강조한 ‘행위의 무게’와 달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오직 주인의 선하심과 부르심에 달려 있음을 드러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은혜의 신학〉

마태복음 20:1–16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보상이 공로나 성취가 아닌 은혜(χάρις)에 기초함을 선포하십니다. 마지막 품꾼들이 받은 한 데나리온은, 그들이 일한 양과 무관하게 주어진 값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계약의 논리”를 넘어 “관계의 논리” 위에 서 있음을 드러냅니다.

1. 헬라어·히브리어 어원 분석

은혜: χάρις (charis)
헬라어로 ‘은혜, 호의, 무상 선물’을 의미. 히브리어 חֵן (ḥēn)과 대응하며, 구약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호의를 나타냅니다(창 6: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불평하다
γογγύζω (gongyzō)는 ‘투덜거리다, 원망하다’라는 뜻으로, 70인역(LXX)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두고 원망할 때 사용(출 16:7–8 LXX). 이는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 마음의 반응입니다.

선하다
ἀγαθός (agathos)는 마20:15에서 주인을 묘사하는 단어로, 구약 히브리어 טוֹב (tov)와 연결. 하나님의 본질적 선하심을 나타냅니다(시 145:9).

2. 구약의 은혜 신학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계약의 보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타납니다.

• 출애굽 사건 —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로 인도되었습니다(신 7:7–8).
• 신명기 9:5 — “네 의로 인하여서가 아니요,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이라.”
• 욜 2:13 —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חַנּוּן וְרַחוּם),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3. 제2성전기 유대 문헌의 은혜 이해

• 시편 솔로몬 9:7–8 —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은혜로 구원하시며, 행위보다 마음을 보십니다.
• 쿰란 문서 1QH 4:37–38 — “내 의로움은 주께로부터 오며, 나의 모든 행위는 주의 은혜로 세워졌다.”
• 벤 시락(시락서) 18:22 — “회개를 지체하지 말고, 여호와의 은혜를 잊지 말라.”

이는 당시 유대교가 단순한 ‘공로주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개념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4. 랍비 유대교의 은혜 개념

탈무드와 미드라쉬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전승이 다수 존재합니다.

• 미드라쉬 테힐림 130:3–4 —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신다면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주께 용서가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함이라.”
• 바블리 베라코트 17a — “하나님은 자비로 세상을 다스리시되, 율법의 엄격함을 은혜로 덮으신다.”
• 아보트 데-라비 나탄 4 — “의인의 상급은 행위의 양이 아니라, 그 마음의 정성(כַּוָּנָה)에 달려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 중심 비유는 당시 랍비 문맥 안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었으나, 그 급진성은 ‘전적인 무상성’에 있었습니다.

5. 예수님의 급진적 전환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유대교 경향과 뚜렷한 전환을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교는 보상의 기준을 행위와 마음, 즉 둘 다를 고려하는 방식으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오직 주인의 선함에 근거한 보상을 강조합니다. 은혜의 범위 역시 차이가 있었는데, 당시 유대교는 이를 계약 공동체 안으로 제한했으나, 예수님의 비유는 부름 받은 모든 자에게까지 확장합니다. 또한 불평하는 자에 대한 해석에서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당시 유대교는 이를 공정성을 추구하는 태도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은혜를 알지 못하는 마음의 표징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20:16)는 결론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공로의 서열이 아닌 은혜의 역전 원리로 운영됨을 선언합니다.

6. 신학적 함의

1. 구원론적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는 응답에 불과합니다(엡 2:8–9).

2. 교회론적
먼저 믿은 자와 나중 믿은 자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이는 공동체 내 분열과 우월감을 해체합니다.

3. 종말론적
마지막 때의 보상은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으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전적으로 주인의 주권적 부르심에 의존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은혜’는 단순히 관대한 보상 이상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언약의 신실성, 그리고 종말론적 나라의 운영 원리를 드러내는 핵심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청중—특히 행위와 율법에 기초한 의를 강조하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메시지는 급진적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의 계산이 아니라 주인의 선함에 의해 결정됨을 선포했습니다.

<공로와 은혜의 신학: S’char와 하나님의 χάρις>

1. 인간의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

포도원 품꾼 비유(마 20:1–16)는 인간의 보상 개념과 하나님의 은혜 개념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빛을 발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보상(שָׂכָר, S’char)은 율법 준수와 행위의 결과로 주어집니다(신명기 28장).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상이 공로가 아닌 χάρις (charis,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고 선포합니다.

2. 랍비 유대교의 S’char 개념

(1) 성경적 기원

히브리어 S’char는 “임금, 보상”을 의미하며(창 15:1; 룻 2:12), 언약의 충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 개념과 결합합니다. 예를 들어 미슈나 아보트(אבות 2:21)는 “너는 모든 일을 다 끝마칠 의무는 없으나,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각자의 수고에 따라 보상하신다고 봅니다.

(2) 랍비 문헌의 강조점

탈무드(קידושין Kiddushin 39b)는 “계명은 현세와 내세 모두에서 보상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상은 단순히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Olam Haba(올람 하바, 내세)에서의 지위와 직결됩니다. 따라서 랍비적 사고에서 S’char는 행위와 직접 연동됩니다.

3. 예수님의 은혜 신학: Charis의 전복적 의미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마지막 한 시간 일한 자도 동일한 품삯을 받는다고 선언함으로써, 공로주의의 틀을 깨뜨리십니다. 헬라어 χάρις (charis)는 ‘값없이 주어지는 호의’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계약상의 의무가 아닌 주권자의 자유로운 결정을 강조합니다.
바울 역시 로마서 4:4–5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겨지거니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하여, 은혜와 공로의 본질적 차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4. 공로와 은혜의 대조: 종말론적 보상 이해

(1) 랍비 유대교의 종말론적 보상

랍비 문헌에서는 의인의 보상과 악인의 심판이 마지막 심판 때에 완전하게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סנהדרין Sanhedrin 91b). 이때 보상은 철저히 행위에 기초합니다.

(2) 예수님의 종말론적 은혜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부름받은 자라도 동일한 보상(하나님의 나라 참여권)을 받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23:43에서 십자가 위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5. 윤리적 함의: 시기심과 공동체 파괴의 경고

마태복음 20:15의 헬라어 문구 ὁ ὀφθαλμός σου πονηρός ἐστιν(네 눈이 악하냐)는 히브리어 עַיִן רָעָה(ayin ra’ah, ‘악한 눈’, 질투·시기)의 번역으로, 시기심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요소임을 경고합니다. 랍비 아보트(אבות 2:11)도 “악한 눈은 사람을 세상에서 내쫓는다”고 말합니다.

6. 신학적 결론

1. 랍비 유대교는 S’char를 통해 행위와 보상의 직접적 연계를 강조합니다.
2. 예수님의 가르침은 은혜(charis)를 통해 모든 인류를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합니다.
3. 종말론적 관점에서, 공로와 은혜의 차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접근 방식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4. 질투와 비교의 시선은 은혜 공동체의 파괴를 초래하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종말론적 역전: 나중된 자가 처음되고, 처음된 자가 나중 되는 날>

마태복음 20:16의 “οὕτως ἔσονται οἱ ἔσχατοι πρῶτοι καὶ οἱ πρῶτοι ἔσχατοι”(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단순한 도덕 격언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말론 비전의 핵심 진술입니다. 이 말씀은 공로·지위·출신 순서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질서를 재편성하는 선언입니다.

1. 랍비 유대교의 종말론적 순서 개념

종말에 있을 역전의 모티프
탈무드(פסחים Pesachim 50a)에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순서가 바뀔 것이다(יש סדר שונה לעולם הבא)”라고 말합니다. 특히 의인이지만 낮은 자리에서 살았던 자들이 Olam Haba에서 존귀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미드라쉬(ויקרא רבה Leviticus Rabbah 13:3)도 “이 세상에서 높은 자가 오는 세상에서 낮아지고, 이 세상에서 낮은 자가 오는 세상에서 높아진다”고 합니다.

사회·종교적 함의
이러한 사상은 유대 사회 내부의 계층·지위 전복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랍비 전통에서는 ‘역전’이 주로 의인의 보상 확대와 악인의 몰락이라는 도덕적 정의 구현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2. 예수님의 역전 선언의 특징

예수님의 선언은 단순히 도덕적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자체의 초청 구조를 전복합니다. 즉,

• 종교적·민족적 선발대(유대인,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라
• 마지막 순간에 초대받은 자(세리, 죄인, 이방인)도 동일한 상속자가 됩니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7–29에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라고 말한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3. 종말론적 ‘시간’과 고용 시점의 의미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고용 시간(아침, 3시, 6시, 9시, 11시)은 하루의 시간표일 뿐 아니라 구속사적 시간표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 아침 일꾼: 아브라함 언약부터 율법 시대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 낮과 오후 일꾼: 선지자 시대와 메시아 전야에 부름받은 세대
• 마지막 한 시간 일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세대(이방인 포함)

이 시간 구조는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도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4. 랍비 문헌과의 비교: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
• 두 전통 모두 마지막 순간의 ‘역전’을 인정합니다.
• 하나님(혹은 하늘의 왕)이 정의를 완성하는 주권자로 묘사됩니다.

차이점
• 랍비 유대교: 역전은 주로 행위·의로움에 기초한 보상의 재배치
• 예수님의 가르침: 역전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동일한 보상의 부여를 말합니다.

5. 신학적 함의

1.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 순서나 세대 순서로 서열화되지 않습니다.
2. 마지막 순간의 회심과 순종도 구원의 완전한 참여를 가능하게 합니다.
3. 공동체 내부의 시기와 배타성을 배제하고, 은혜를 기초로 한 포용성을 확립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주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의미>

1.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유대인·이방인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일꾼들(ἔργαται, ergatai)의 품삯(μισθός, misthos) 이야기를 통해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처음 부름받은 자들은 유대인을, 나중에 부름받은 자들은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어 구약 배경에서 “품꾼”은 שָׂכִיר (sakhir)라 하여, 계약에 따라 하루 품삯(שָׂכָר, sachar)을 받는 사람을 의미합니다(레 19:13). 유대인은 창세기 때부터 하나님의 토라를 맡아 포도원을 경작해왔고, 말세에 이방인들이 동일한 구원의 초청을 받게 됩니다(사 56:6–8).

마태복음 20:1–16의 핵심 용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 ἔργαται (ergatai) — ‘일꾼, 노동자’. ἔργον(일, 행위)에서 파생된 남성 명사 복수 주격형입니다. 노동 행위 자체보다 고용 관계와 경제적 계약의 맥락이 강하게 반영됩니다.
• μισθός (misthos) — ‘품삯, 보수’. 단순 보상이 아니라 계약에 따른 법적 정당성을 내포합니다. LXX(70인역)에서는 신 24:15에서 “해가 지기 전에 품삯을 주라”는 규정에 사용됩니다.
•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hē basileia tōn ouranōn) — ‘하늘 나라’. 마태복음의 특유 표현으로, 유대인의 경건한 간접 화법(‘하나님’ 대신 ‘하늘’)을 반영합니다.
히브리어 구약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 שָׂכִיר (sakhir) — 고용인, 품꾼(레 19:13, 신 24:15). 완료형 동사 שָׂכַר (sakhar) ‘고용하다, 보수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계약적 의무가 강하며, 주인의 신실함(אֱמוּנָה, emunah)과 직결됩니다.
• כֶּרֶם (kerem) — 포도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비유하는 고전적 상징(사 5:1–7)입니다. 선택과 심판의 주제와 직결됩니다.

2.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과 새 언약

포도원 주인(ὁ κύριος τοῦ ἀμπελῶνος, ho kyrios tou ampelōnos)은 늦게 온 일꾼들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31:31–32의 “새 언약”(בְּרִית חֲדָשָׁה, berit chadashah)이 이 비유의 신학적 기초입니다. 첫 언약은 돌판에 새겨졌지만, 새 언약은 마음(לֵב, lev)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 “οἱ ἔσχατοι ἔσονται πρῶτοι καὶ οἱ πρῶτοι ἔσχατοι”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는 구원의 질서가 인간의 공로나 시간 순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결정됨을 드러냅니다.

3. 구원의 본질과 메시아의 사역

이 비유 직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넘겨져(παραδοθήσεται, paradothēsetai) 십자가에 못 박히고(σταυρωθήσεται, staurōthēsetai),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ἐγερθήσεται, egerthēsetai)을 예고하셨습니다(마 20:17–19). 이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 예언과 연결됩니다.

구원(σωτηρία, sōtēria)의 자격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αἷμα, haima)로 말미암습니다. 히브리서 9:14은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αἷμα τοῦ Χριστοῦ καθαριεῖ τὴν συνείδησιν)고 말합니다.

4. 부름 받은 자의 사명과 책임

일꾼들은 부름받아 일했습니다. “부르다”는 동사 καλέω (kaleō)는 단순 초청이 아니라, 사명 부여를 내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20에서 우리를 “Χριστοῦ οὖν πρεσβεύομεν” (“그리스도의 대사”)라 칭하며,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σῶμα Χριστοῦ, sōma Christou)이며, 각 지체(μέλος, melos)가 맡은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고전 12:14–31). 이는 유대 전통의 קהילה (qahal, 회중)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사용된 부르심과 갚음에 해당하는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καλέω (kaleō, ‘부르다’) — 본문에서 주로 아오리스트 능동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결정적 사건으로서의 부르심을 강조합니다.
• ἀποδίδωμι (apodidōmi, ‘돌려주다, 갚다’) — 미래형 사용 시, 종말론적 상급의 확실성을 나타냅니다.
• ἔσχατος / πρῶτος — 형용사 최상급, 순서의 역전. 구원사에서 유대인-이방인의 순서 변화와도 연결됩니다.

5. 행함과 믿음의 관계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חֵן, chen / χάρις, charis)로 받지만, 행함(עֲשִׂיָּה, asiyyah / ἔργον, ergon)은 그 은혜의 증거입니다. 야고보서 2:18–26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하며, 믿음(πίστις, pistis)과 행위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마지막 한 시간에 부름 받은 자라도 부지런히 일하는 것처럼, 신자는 부름 받은 순간부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6. 은혜의 품삯과 부르심의 사명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신약 모두에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편적 구원을 선포합니다. 품삯은 동일하지만, 일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포도원에서 각자의 시간을 따라 부름 받았으며, 부르신 분의 뜻대로 일해야 합니다. 이 부르심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메시아적 섬김: 마태복음 20:1–16 주해 연구>

1. 비유의 구조와 헬라어 문법 분석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문에서 ‘포도원’(ἀμπελών, ampelōn)은 LXX(칠십인역)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특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 메타포(사 5:1–7)입니다. 헬라어 명사 ἀμπελών은 3변화 남성명사로 헬라어 문법상 -ων 종결을 가지며, 구약의 히브리어 כֶּרֶם (kerem, 포도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품꾼’(ἐργάτης, ergatēs)는 단순 노동자를 의미하며, LXX에서는 히브리어 פֹּעֵל (po‘el, 일꾼)로 번역됩니다. 흥미롭게도 po‘el은 동사형 פעל (“행하다, 일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랍비 문헌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자’라는 윤리적 함의를 지닙니다.

‘품삯’(δηνάριον, dēnarion)은 로마 화폐 단위로, 하루 노동의 표준 임금이었습니다. 히브리어 דינר (dinar) 역시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동일 개념으로 사용되며, 공정한 임금과 고용인의 의무를 논하는 Bava Metzia 76b와 연결됩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 구원의 비유적 적용

본문의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οἱ ἔσχατοι … οἱ πρῶτοι)는 유대인(언약 백성)과 이방인(후에 부름받은 자)의 구원 동등성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마지막’ אַחֲרוֹן (acharon)과 ‘첫째’ רִאשׁוֹן (rishon)의 대조는 종말론적 전복을 나타내며(사 41:4, 욜 2:28), 랍비 문헌에서도 메시아 시대에 이방인의 회심과 유대인의 회복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가르칩니다(미드라쉬 Tanchuma, Parashat Noach 3).

3. 1세기 유대 역사·문화 배경

당시 갈릴리와 유대 지역의 포도원 노동 구조는 지주(οἰκοδεσπότης, oikodespotēs, “집의 주인”)가 시장(ἀγορά, agora)에서 일꾼을 고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루의 노동은 유대 시간표로 해 뜰 무렵(제1시, 오전 6시경)에 시작해 해 질 때(제12시, 오후 6시경)에 끝났습니다.

여기서 오후 5시(제11시)에 고용된 사람도 동일한 품삯을 받는 것은 레위기 19:13의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는 토라 규정과 연결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행위의 양’이 아니라 ‘언약적 자비’에 기초함을 강조합니다.

4. 새 언약과 마음에 새겨진 율법

예레미야 31:31–33의 ‘새 언약’(בְּרִית חֲדָשָׁה, berit chadashah)는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율법을 약속합니다. LXX는 ‘새’(καινὴ kainē, 질적으로 새로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단순한 갱신(νέα)이 아니라 본질적 변화를 나타냅니다.

랍비 문헌(Yerushalmi Berakhot 1:1)에서도 ‘마음에 새겨진 토라’ 개념이 등장하지만, 신약은 이를 예슈아의 피를 통한 구속 사건과 직결시킵니다(히 9:14, 1요 1:7).

5. 구속(ἀπολύτρωσις)과 피의 신학

헬라어 ἀπολύτρωσις(apolutrōsis, “해방, 구속”)는 노예 해방이나 포로 속량에서 쓰이는 법률 용어이며, LXX에서 히브리어 גְּאֻלָּה (ge’ulah, 구속, 친족의 속량권)와 연결됩니다(룻기 4:6).

탈무드 Pesachim 118a는 메시아가 오실 때 하나님의 구속이 전 인류에게 확장될 것을 말하며, 이는 마 20장의 품꾼 비유의 포괄적 구원관과 맞닿아 있습니다.

6. 부름받은 자의 ‘일’과 제자도

본문에서 모든 품꾼은 ‘일’을 했습니다. 헬라어 ἐργάζομαι (ergazomai, “일하다”)는 단순히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적 책임을 수행하는 뉘앙스를 지니며, 야고보서 2:18–26의 행함과 믿음의 긴장과도 연결됩니다.

랍비 문헌(Pirkei Avot 1:3)은 “보상을 바라지 말고 주인을 위해 일하라”고 권면하는데, 이는 예슈아의 제자도 가르침과 평행합니다.

7. 메시아적 섬김과 하늘나라 리더십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 구조(κατακυριεύουσιν, katakurieuousin, ‘군림하다’)와 하늘나라의 섬김(διακονέω, diakoneō, ‘섬기다’)을 대조하셨습니다. 이 개념은 랍비 가르침 중에서도 Hillel 학파의 겸손·섬김 강조와 가까우며, 예수님은 이를 자기 희생(δοῦναι τὴν ψυχὴν λύτρον ἀντὶ πολλῶν,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속전으로 주다”)의 방식으로 완성하셨습니다.

<포도원 품군에서 주는 은혜의 의미>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말하는 “은혜”를 중심으로,
① 랍비 유대교, ② 타나크(히브리 성경), ③ 예수님의 비유(마 20:1–16) 관점에서 비교·분석한 종합 정리하고자 합니다.

1. 랍비 유대교의 관점: 공의(דִּין) 위에 서는 자비(רַחֲמִים), “한 시간”의 은혜

핵심 틀
랍비 전통은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י״ג מִדוֹת, 출 34:6–7의 13가지 자비 속성)으로 이해합니다:

רַחוּם וְחַנּוּן, אֶרֶךְ אַפַּיִם וְרַב־חֶסֶד וֶאֱמֶת
“긍휼하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이”(출 34:6).

동시에 랍비 전통은 두 속성(מידות)—미닷 하디인(공의의 척도)과 미닷 하라하밈(자비의 척도)—이 자비 쪽으로 기울어 역사한다고 가르칩니다. 전형적 표어: “미다 토바 메루바 미미닷 포누트”(מִדָּה טוֹבָה מְרוּבָּה מִמִדַּת פּוּרְעָנוּת, “선의 분량이 징벌의 분량보다 크다,” 예: b. Rosh HaShanah 17b).

테슈바(תשובה, 회개)는 창조 이전부터 예비된 구원의 통로로 강조됩니다(“세상이 지어지기 전에 창조된 일곱 가지” 중 하나로 테슈바를 꼽는 전승; b. Pesachim 54a).

“한 시간에 얻는 세계”의 테마
• 랍비 문헌에는 “어떤 이는 많은 해에 걸쳐 자기 세상을 얻고(세계-내세의 기업), 어떤 이는 단 한 시간에 얻는다”는 말이 나옵니다(יש שקונה עולמו בשעה אחת; b. Avodah Zarah 17a, 엘아자르 벤 두르다야 이야기).
→ 이는 오랜 ‘봉사 기간’이 아니라 결정적 은혜의 순간과 돌이킴이 영원한 몫을 가져올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 포도원 비유의 “나중 온 자도 같은 품삯(ἕν δηνάριον)을 받음”과 정조(정신)가 맞닿습니다.
균형
• 물론 랍비 전통은 행위의 책임(미슈나 아보트 3:15 “모든 것이 담보로 맡겨졌고…”)도 강하게 말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자비/은혜가 공의를 넘어서는 구조를 다층적으로 유지합니다(테슈바, 자비의 속성, ‘선의 분량이 크다’ 등).
• 요점: 랍비 유대교는 공로의 누적만으로 구원을 환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비가 시간·분량을 초과하여 역사할 수 있음을 일관되게 인정합니다.

2. 타나크(히브리 성경)의 관점: 언약적 은혜(חֶסֶד)와 무상성(חֵן)

언약적 뿌리
•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이스라엘의 공로나 규모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수가 많음이 아니라… 다만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심으로”(신 7:7–8).
→ 선행적 사랑(electing love).

하나님의 성품과 은혜
• 출 34:6–7: “רַחוּם וְחַנּוּן(긍휼·은혜), רַב־חֶסֶד(풍성한 인애)”—히브리 성경의 은혜/인애 신학의 헌장입니다.
• 시 103:10–12: “그가 우리의 죄를 따라 처리하지 아니하시며… 인애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 대응 보응의 규칙을 완화하는 은혜입니다.
• 요나 4:2: “주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다(חַנּוּן וְרַחוּם… רַב־חֶסֶד).”
• 사 55:1–3: “오라, 값 없이(בְּלוֹא־כֶסֶף)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언약의 인애(חַסְדֵי דָוִד)로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라.”
→ 값 없이 주어지는 언약적 은혜의 정점입니다.
• 호 14:4: “내가 그들의 배역함을 고치고 기쁘게 사랑하리니”—회개 후 회복을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타나크는 하나님의 구원은 ‘선하심’(טוֹב), 인애(חֶסֶד), 은혜(חֵן/חַנּוּן)에 뿌리를 둔다고 증언합니다.
“일한 만큼만 주는 경제”가 아니라, 언약적 관계에 기초한 초과적 호의가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값 없이…”, “죄에 따라 갚지 않으심…”).

3. 예수님의 비유(마 20:1–16)의 은혜: 주권·관계·역전의 경제

본문 핵심 구절(헬라어)
• “θέλω τοῦτο δοῦναι τῷ ἐσχάτῳ ὡς καὶ σοί”
“내가 원하여 이 마지막 온 자에게도 너와 같이 주노니”(20:14)
→ 의지의 주권: 보상의 기원은 주인의 뜻(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입니다.
• “ἢ ὁ ὀφθαλμός σου πονηρός ἐστιν ὅτι ἐγὼ ἀγαθός εἰμι;”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하냐?”(20:15)
→ 아인 라아(‘악한 눈’) vs 토브/아가토스(‘선함’): 시기·질투로 은혜를 재단하지 말라는 경책(신 15:9의 ‘눈이 악해져 가난한 형제에게 줌을 그치지 말라’와 울림).

은혜의 구조
• 동일한 품삯(ἕν δηνάριον): 구원·왕국 참여의 정수는 근무 시간(봉사 기간)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 관계 기반: “부르심 → 은혜 → 감사”의 흐름.
• 역전(먼저/나중): “οἱ ἔσχατοι πρῶτοι”는 언약 특권에 안주하는 심리를 부수고, 오전·오후·막판에 부름받은 이들을 동일 은혜 안에 묶습니다(유대인/이방인, ‘의인’/‘죄인’의 구분을 은혜로 재구성).
• 정의 폐기가 아님: 주인은 약속한 품삯(먼저 온 자의 한 데나리온)은 정확히 지키고(정의의 준수), 나중 온 자에게 동일 품삯을 더해 줍니다(은혜의 초과).
→ “정의(약속 이행)와 은혜(초과 지급)”가 동시에 성립됩니다.

4. 세 관점의 비교·종합

1. 은혜의 기원

랍비 유대교에서는 은혜의 근원이 하나님의 자비 속성(י״ג מידות, 열세 가지 자비의 속성)과 테슈바(회개)의 선행성에 있다고 봅니다. 이는 인간이 먼저 회개로 돌아설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의 자비가 열어준다는 의미입니다.

타나크에서는 은혜의 기원을 언약적 인애(חֶסֶד)와 무상성(חֵן)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을 사랑으로 택하시며(신명기 7장), “값 없이”(이사야 55장)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의 비유에서는 은혜의 출발점이 포도원 주인의 주권적 선하심(ἀγαθός)에 있다. 즉, 주인의 선하심이 모든 부름받은 자에게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랍비 유대교
• 은혜의 근원은 하나님의 자비 속성 י״ג מידות הרחמים (“열세 가지 자비의 속성”, 출 34:6–7)과 테슈바(תשובה, ‘돌아옴’)의 선행성에 있습니다. 랍비 전통에서 תשובה는 단순한 회개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이전부터 준비된 구원의 길로 이해됩니다(Bereshit Rabbah 1:4).
• 문법적으로 תשובה는 동사 שוב (“돌아가다”)의 여성형 명사로, 능동적 회귀와 수동적 회복의 의미를 동시에 지닙니다.
타나크
• 은혜는 언약적 인애 חֶסֶד와 무상성 חֵן에서 기원합니다. חֶסֶד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언약에 기초한 충실한 사랑”을 뜻하며, חֵן은 전혀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호의를 의미합니다.
• 신 7:7–8은 이스라엘의 선택이 그들의 수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맹세(언약)에 따른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사야 55:1의 “값 없이”(בְּלוֹא כֶסֶף)는 상거래적 조건을 배제한 은혜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비유 (마 20:1–16)
• 은혜의 기원은 포도원 주인의 “선하심” ἀγαθός에 있다. ἀγαθός는 고전 헬라어에서 ‘도덕적, 본질적으로 선한’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주인의 품삯 배분의 기초가 됩니다.
• 이 용어는 LXX에서 하나님의 성품(시 34:8, “여호와의 선하심”)을 번역할 때 사용되며, 예수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직접 연결됩니다.

2. 배분의 기준

랍비 유대교에서는 자비가 공의 위에 선다는 원리(מידת הרחמים)에 따라 은혜가 배분됩니다. 즉, 엄격한 공의보다 회복과 자비가 우선합니다. 타나크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이 기준이 됩니다. 이는 은혜가 자격이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기초함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비유에서는 품삯이 ‘관계’, 즉 부르심 자체에 따라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랍비 유대교
• 자비 מידת הרחמים는 공의 מידת הדין보다 우선합니다(메길라 29a). ‘속성’(מידה)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의인화한 랍비 신학의 용어입니다.
타나크
• 은혜의 배분은 “선택의 사랑”과 “값 없는 초청”에 따릅니다. 시편 103:10은 “그가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아니하시며”라는 언약적 관용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 배분은 노동량이 아니라 ‘부르심’이라는 관계적 사건에 근거합니다. 헬라어 καλέω (“부르다”)의 단순과거형 사용은 사건의 단회성과 결정성을 나타내며, 은혜가 후발자에게도 동일하게 임함을 강조합니다.

3. 시간과 분량과의 관계

랍비 유대교에서는 긴 세월의 헌신이나 한 시간의 헌신 모두 가능하다고 봅니다(Avodah Zarah 17a). 중요한 것은 회개와 전심의 헌신이지, 절대적 시간의 양이 아닙니다. 타나크에서는 죄에 대해 ‘정확히’ 갚지 않으심(시편 103편)이 강조되며, 시간과 양이 은혜의 절대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의 비유에서는 근무시간이나 기간이 품삯의 크기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랍비 유대교
• Avodah Zarah 17a는 “많은 해 혹은 한 시간”의 봉사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 동일하게 인정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 이는 미슈나적 시간 개념과 종말론적 ‘마지막 순간 회개’ 수용 사상을 보여줍니다(예: 미나핫 29b).
타나크
• 시편 103:14–16은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이 ‘정확한 계산’보다 은혜를 중시하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 헬라어 원문에서 1시(ὥρα πρώτη)와 11시(ὥρα ἑνδεκάτη) 모두 동일한 ‘품삯’(δηνάριον)을 받습니다. δηνάριον은 로마 제국에서 하루 품삯을 의미하는 화폐 단위로, 시간 대비 임금의 불균형을 드러내어 은혜의 역설을 강조합니다.

4. 인간의 응답

랍비 유대교에서의 응답은 테슈바(회개), 겸손, 그리고 자비의 실천(גמילות חסדים)입니다. 타나크에서는 감사와 신뢰, 그리고 공의와 의의 열매(이사야 5장)가 응답의 형태를 이룹니다. 예수의 비유에서는 시기 없이 기쁨으로 참여하며 감사의 제자도로 응답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랍비 유대교
• 응답은 테슈바, 겸손(ענוה), 자비의 실천(גמילות חסדים)입니다. גמילות חסדים는 ‘은혜를 갚는 선행’이 아니라 ‘조건 없는 선행’을 의미합니다(Avot 1:2).

타나크
• 감사(תודה), 신뢰(בטחון), 그리고 공의와 의의 열매(이사야 5:7)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 헬라어 χαρά (“기쁨”)와 εὐχαριστία (“감사”)의 태도가 응답의 본질입니다. 시기(φθόνος) 없이 부르심을 기쁨으로 수용하는 제자도의 자세가 핵심입니다.

위에서 본 핵심을 살펴본다면, 세 전통 모두 하나님을 “은혜·자비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를 급진적·서사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정의(먼저 온 자에게 1 데나리온)와,
• 그 정의를 넘어서는 선하심(나중 온 자에게도 1 데나리온)이 동시에 진리임을 선언합니다.
→ 구원의 기준은 공로 누적이 아니라 주인의 선하심과 부르심에 응답한 관계입니다.

5. 목회적·실천적 함의

1. 질투(“악한 눈”)를 경계: 하나님의 은혜 분배를 평가·비교하는 태도는 은혜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2. 늦게 온 자를 환대: “한 시간”의 돌이킴이라도 하나님은 온 몫을 주십니다. 공동체는 동일 기쁨으로 맞아야 합니다.
3. 은혜는 무책임이 아님: 은혜가 관계를 낳고, 관계는 제자도의 충성(열매)로 이어져야 합니다(사 5: ‘정의·의’의 열매 요청과 조화).

<포도원 품꾼과 소작농의 비교: 이사야 5장과 마가복음 12장의 상호본문성 연구>

이사야 5:1–7의 “포도원의 노래”와 마가복음 12:1–12의 “악한 소작인 비유”는 구약–신약의 경계에서 뚜렷한 상호본문성(intertextuality)을 보여줍니다. 두 본문은 동일한 주요 어휘와 장면을 공유하면서도, 수사적·신학적 목표에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본 글은 히브리어(MT)와 헬라어(LXX/NT) 원문, 제2성전기 유대 해석 전통, 사회경제사 자료를 토대로 양 본문을 비교 분석하고자 합니다.

1. 공통 어휘와 마가복음의 “역인용”

• 이사야 5:2 (MT): וַיִּטָּעֵהוּ שֹׂרֵק wayyiṭṭā‘ēhû śōrēq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
• LXX: καὶ ἐφύτευσεν ἄμπελον σωρηχ
• 마가복음 12:1: ἐφύτευσεν ἀμπελῶνα (“포도원을 심고”)

양 본문은 포도원(Heb. כֶּרֶם kerem / Gk. ἀμπελών), 울타리(Heb. גָּדֵר gāder / Gk. φραγμός), 포도즙 틀(Heb. יֶקֶב yeqev / Gk. ληνός·ὑπολήνιον), 망대(Heb. מִגְדָּל migdal / Gk. πύργος)라는 4대 건축·농업 요소를 공유합니다. 마가는 이사야의 순서를 변경하여(포도즙 틀 → 망대 순으로 역전) 일부 학자들(Wim Weren 등)이 의도적 역인용(reverse citation)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청중에게 이사야 5장의 심판 노래를 즉각 상기시키는 장치입니다.

2. 포도원과 주인의 상징

이사야 5장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יְהוָה צְבָאוֹת의 소유)을 말하며,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기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mišpāṭ (정의)은 결과를 의미하는 miśpāḥ (피흘림), ṣədāqāh (공의)와 연결됩니다. 이에 대조적인 단어가ṣe‘āqāh (부르짖음)이며 예언적 언어유희(5:7)이기도 합니다. 심판의 대상은 포도원 자체입니다.

마가복음 12장: 포도원은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지시하지만, 심판의 대상은 포도원이 아니라 소작인(οἱ γεωργοί). 포도원은 “다른 사람들”(ἄλλοις)에게 위탁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지속성과 지도자 교체를 강조합니다.

3. 종들과 아들: 예언사와 메시아론

마가복음의 종들은 선지자들을, “사랑하는 아들”(υἱὸς ἀγαπητός)은 마가복음 1:11; 9:7의 세례·변모 사건과 직결됩니다. “이는 상속자니, 그를 죽이자”는 구절은 예언자 거부의 역사에서 메시아 살해로 신학적 초점을 확장합니다. 절정에서 예수는 시편 118:22–23(“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인용하여 자신의 배척과 하나님의 선택을 해석합니다.

4. 제2성전기와 랍비 전통의 배경

쿰란 문서 4Q500과 타르굼 이사야는 포도원을 성전과 연결시킵니다(탑=성소, 포도즙 틀=제단). 이는 마가복음이 본 비유를 성전 논쟁(막 11–12장) 안에 배치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랍비 전통 역시 이사야 5:7을 “포도원 = 이스라엘 공동체”로 동일시하여 복음서의 해석 틀과 맞닿습니다.

5. 사회경제사적 타당성

파피루스와 사회과학적 연구(클로펜보르크, 반 에크)에 따르면 갈릴리와 유대에서 부재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 임대료 징수, 농민 저항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이 배경은 예수의 비유를 단순한 상징담이 아닌 현실적·도발적 선언으로 만듭니다.

6. 마가복음의 수사적 목표

비유의 청중은 예루살렘 성전 귀족층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막 12:12). 구조적으로 이 비유는 성전 청결 사건(11:15–19)과 권위 논쟁(11:27–33) 이후 배치되어, 하나님의 열매 요구, 청지기 심판, 아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수사적 클라이맥스를 형성합니다.

7. 이사야 5:1-7과 마가복음 12:1-12 비교

이사야 5:1–7과 마가복음 12:1–12는 모두 포도원 비유를 사용하지만, 상징과 초점이 다릅니다. 이사야 5:1–7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의미하며, 심판의 대상은 들포도를 맺은 포도원 전체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울타리를 제거하고 포도원을 황폐하게 하십니다. 절정에서는 “정의”(מִשְׁפָּט)와 “유혈”(מִשְׂפָּח) 사이의 언어유희를 통해 메시지를 강화하며, 신학적 초점은 언약 공동체 전체에 대한 심판에 있습니다.
반면 마가복음 12:1–12에서는 포도원이 역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상징하지만, 심판의 대상은 포도원 자체가 아니라 그 소작인들, 즉 지도자들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악한 소작인을 추방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탁하십니다. 절정 부분에서는 아들이 살해되는 장면과 함께 시편 118편의 인용이 등장하며, 신학적 초점은 지도층의 교체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지속됨에 있습니다.

8. 이사야 5:1–7 vs. 마가복음 12:1–12 — 원문·문헌 주석 비교

(1) 포도원 상징

이사야 5:1–7
o 히브리어 핵심어: כֶּרֶם (kerem, 포도원). 5:7은 명시적으로 “כִּי כֶרֶם יְהוָה צְבָאוֹת בֵּית יִשְׂרָאֵל” — “만군의 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집”이라 해석적 결론을 제시합니다.
o 문법 메모: 5:1–2의 동사 연쇄(וַיּ… 와우-연속 미완료)는 “심다–울타리 치다–즙틀 파다–탑 세우다”의 완료된 조성 행위를 서사적으로 압축합니다.
o 랍비 전통: 타르굼 이사야와 미드라쉬(예: Shir HaShirim Rabbah 8:12)는 포도원을 이스라엘 회중/성전 질서와 동일시 합니다.

마가복음 12:1–12
o 헬라어 핵심어: ἀμπελών(포도원), γεωργοί(소작인), οἰκοδεσπότης/ἄνθρωπός τις(소유자/주인).
o 본문: “ἐφύτευσεν ἀμπελῶνα… καὶ περιέθηκεν φραγμόν, καὶ ὤρυξεν ὑπολήνιον, καὶ ᾠκοδόμησεν πύργον” — LXX 이사야 5:2의 어휘군을 재현(순서는 일부 역전)합니다.
o 2성전기 자료: 쿰란 4Q500은 탑=성소, 즙틀=제단으로 상징 해석합니다. 마가는 이 포도원 이미지를 성전 논쟁(막 11–12장)의 문맥에 배치됩니다.

두 본문 모두 포도원을 언약 공동체/하나님 프로젝트의 은유로 사용하되, 마가는 성전·지도층 비판의 레토릭으로 재맥락화합니다.

(2) 심판 대상

이사야 5장
o 대상: 포도원 자체(들포도). 하나님은 울타리를 제거하고 방치합니다(5:5–6).
o 언어유희: “וַיְקַו לְמִשְׁפָּט וְהִנֵּה מִשְׂפָּח; לִצְדָקָה וְהִנֵּה צְעָקָה” — mišpāṭ(정의)↔miśpāḥ(유혈), ṣĕdāqāh(의)↔ṣeʿāqāh(부르짖음). 음운·의미 대응을 통해 윤리 실패를 고발합니다.

마가복음 12장
o 대상: 소작인(지도자). “κακοὺς κακῶς ἀπολέσει”류의 병행(마 21:41)/마가의 결론(12:9)은 “포도원은 ἄλλοις(다른 이들)에게 위탁.”
o 문법: 12:9의 미래/부정법 결합은 판결적 확정을 시사합니다. 포도원은 보존, 청지기 교체가 핵심입니다.

이사야는 공동체 자체의 심판, 마가는 지도층 심판+포도원 보존을 선언합니다.

(3) 결과(심판의 양상)

이사야 5장
o “וָאָסִירָה מְשֻׂכָּתוֹ… וְהָיָה לְבָעֵר… וְשַׁמְתִּיהָ בָתָה” — 울타리 제거·황폐화.
o 형태론: 일련의 cohortative/1인칭 미래형은 주체적 판결 의지를 강조합니다.

마가복음 12장
o “ἀποστελεῖ… ἀποδώσουσιν… δώσει τὸν ἀμπελῶνα ἄλλοις” — 추방과 재위탁합니다.
o LXX–NT 연결: 포도원의 ‘이전/위탁’은 다니엘 7·시편 118의 권한 이양 모티프와 호응합니다.
이사야는 폐허화를 말하는 반면 마가복음은 관리권 이전(언약의 지속)을 강조합니다.

(4) 절정(클라이맥스 장치)

이사야 5장
o 음성·의미 유희(미쉬파트/미스팍; 체다카/체아카)로 예언적 소송 형식(rîb)을 완결합니다.

마가복음 12장
o 아들(υἱὸς ἀγαπητός) 살해 → 시편 118:22–23 인용: “λίθον ὃν ἀπεδοκίμασαν οἱ οἰκοδομοῦντες… παρὰ Κυρίου ἐγένετο αὕτη.”
o 상호본문: 마가 1:11; 9:7의 하늘 음성(“사랑하는 아들”)과 연결, 메시아 거부/하나님 옹호를 해석틀로 제시합니다.

이사야는 언어유희로, 마가는 메시아 인용과 내러티브 비극으로 절정을 형성합니다.

(5) 신학적 초점

• 이사야 5장: 언약 공동체 전체의 윤리·예배 실패에 대한 법정 판결입니다.
• 마가복음 12장: 지도층 교체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 지속 — 포도원(언약)은 하나님의 소유로 남고, 불충한 청지기만 폐위합니다.

마가는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를 틀로 삼아, 심판의 초점을 공동체에서 지도층으로 이동시키며, 언약의 지속성과 메시아의 정당성을 동시에 천명합니다. 이처럼 마가복음 12장은 이사야 5장을 충실히 반향하면서도, 심판의 초점을 공동체에서 지도층으로 이동시킵니다. 포도원은 파괴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 아래 유지되며, 실패한 청지기는 폐위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끊기지 않고, 메시아를 통한 새로운 청지기 시대가 열림을 선포합니다.

<랍비 제라의 해석>

포도원 품꾼 비유와 j. Berakhot 2:8의 랍비 비유 비교 주석

1. 랍비 제라의 장례식 비유 (j. Berakhot 2:8[5c]) 원문과 번역

원문 (아람어)
אמר ר’ זירא: דמי מילתא למלך ששכר פועלים הרבה. בתוך שתי שעות נכנס המלך ובדק את הפועלים, ומצא אחד מהן שזריז ובקי במלאכתו יותר מכולם. נטל ידו והיה מהלך עמו עד הערב. לפנות ערב נתן שכר לכל הפועלים שווה בשווה. התחילו הפועלים מתרעמים ואומרים: “אנחנו עבדנו כל היום, וזה לא עבד אלא שתי שעות, ואתה נותן לו שכר של יום שלם!” אמר להם המלך: “אין אני עושה עמכם עוול. בשתי שעות עשה יותר ממה שעשיתם כל היום.”
כך רבי בון בר חייא – בעשרים ושמונה שנה עשה מה שחכמים גדולים עשו במאה שנה. לפיכך, נטל הקדוש ברוך הוא את ידו והעלוהו אצלו.

번역
랍비 제라가 말했다. “이 일은 마치 한 왕이 많은 일꾼을 고용한 것과 같다. 두 시간이 지나 왕이 일꾼들을 살펴보니, 그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민첩하고 일에 능숙하였다. 왕은 그의 손을 잡고 저녁까지 함께 다녔다. 저녁 무렵, 왕은 모든 일꾼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었다. 그러자 일꾼들이 불평하며 말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일했는데, 그는 두 시간만 일했으면서 하루 품삯을 다 받다니!’ 왕이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는 두 시간 만에 너희가 하루 종일 한 것보다 더 많이 했다.’

이와 같이 랍비 분 바르 히자는 28년 동안 위대한 학자들이 백 년 동안 한 일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으므로, 거룩하신 분께서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데려가셨다.”

2. 비유의 배경과 맥락

랍비 제라의 장례식 비유 (j. Berakhot 2,8(5c))
서기 325년경, 랍비 제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스승 랍비 분 바르 히자의 장례식에서 추도 연설로 이 비유를 전했습니다. 왕이 여러 일꾼을 고용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과 근면성을 보였습니다. 왕은 그와 함께 일하며, 그가 하루 종일 일한 다른 사람들보다 두 시간 만에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며 동일한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는 랍비 분 바르 히자가 짧은 생애 동안 거둔 탁월한 업적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 (마 20:1–16)
포도원 주인이 하루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일꾼을 고용했으나, 늦게 온 자들도 하루치 품삯을 받았습니다. 불평하는 이들에게 주인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며 자신의 주권적 선하심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노동량이나 자격과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공통점
1. 주요 비유 요소
두 이야기 모두 주권자(왕/포도원 주인)와 여러 일꾼들이 등장하며, 하루의 노동과 동일한 보상이라는 구조를 공유합니다.
2. 청중의 불평과 주권자의 응답
다른 일꾼들이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주권자가 이유를 설명하는 대화 구조가 있습니다.

3. 핵심 메시지 전달 방식

실제 경제 상황과는 다른 ‘비현실적’ 설정을 통해 신학적·윤리적 진리를 전달합니다.

차이점과 신학적 함의
랍비 제라의 비유에서는, 두 시간 만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한 일꾼이 동일한 품삯을 받는 장면이 핵심입니다. 여기서 보상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공로와 업적에 기반합니다. 주권자인 왕은 그의 능력과 탁월한 성취를 이유로 보상을 정당화하며, 짧은 생애일지라도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받는 탁월한 업적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공덕(Merit) 중심으로, 덕과 업적이 높이 평가되고 칭송받는 구조를 반영합니다. 적용 대상은 뛰어난 학문과 덕을 갖춘 라비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는, 거의 일하지 않은 사람조차 하루 품삯을 받습니다. 이는 그들의 노동량이 아니라 주인의 선하심과 자유로운 은혜 분배가 기준입니다. 핵심 메시지는 인간의 자격이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보상의 기준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은혜(Grace) 중심으로, 자격 없는 자들에게도 선물이 주어지는 복음의 논리를 보여줍니다. 적용 대상은 제자 공동체 전체뿐 아니라, 은혜를 받는 모든 사람입니다.

4. 통합적 분석

두 비유는 동일한 비유적 틀(일꾼·품삯·불평·설명)을 사용하지만, 메시지는 서로 정반대입니다. 랍비 제라 비유는 탁월한 업적이 짧은 생애를 정당화한다는 ‘공로의 논리’를 강화합니다. 이는 유대 랍비 전통의 미드다트 하라하밈(מידת הרחמים, 자비의 속성)과 결합되어, 하나님이 공의 위에 서서 자비를 베풀되, 여전히 업적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고를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업적이 전혀 없는 자에게도 동일한 상을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선포합니다. 여기에는 율법과 복음의 대조가 내포되어 있으며,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ἀγαθός)이 구원의 근거임을 드러냅니다.

이 두 비유의 나란한 비교는, 랍비 유대교의 ‘공덕 중심 자비’와 예수님의 ‘무자격 은혜’라는 두 세계관의 대비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업적을 귀히 여기시는 정의로운 보상의 세계를, 다른 하나는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주권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역설의 세계를 제시합니다. 이 대조는 단순히 보상의 방식 차이가 아니라, 율법과 복음, 공로와 은혜라는 근본적인 신학 구조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5. 마태복음 20:1–16 헬라어 본문 중 핵심 구절

원문 (헬라어)
Ἐγὼ θέλω τούτῳ τῷ ἐσχάτῳ δοῦναι ὡς καὶ σοί· οὐκ ἔξεστίν μοι ὃ θέλω ποιῆσαι ἐν τοῖς ἐμοῖς; ἢ ὁ ὀφθαλμός σου πονηρός ἐστιν ὅτι ἐγὼ ἀγαθός εἰμι;
Οὕτως ἔσονται οἱ ἔσχατοι πρῶτοι καὶ οἱ πρῶτοι ἔσχατοι.

번역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기를 원하노라.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내가 선하므로 네 눈이 악하게 되었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6. 구조 비교

예수님의 비유(마태복음 20:1–16)에서는 주인이 ‘포도원 주인(κύριος τοῦ ἀμπελῶνος)’으로 등장하며, 하루 종일 일한 품꾼도 있고 단 한 시간만 일한 품꾼도 있습니다. 이 중 마지막에 고용된 일꾼은 특별한 성과를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품삯을 받습니다. 그 품삯의 근거는 전적으로 주인의 선함과 은혜(χάρις)에 있으며, 신학적 메시지는 “은혜는 공로에 비례하지 않는다”라는 선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권적 은혜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반면, 랍비 제라의 비유(j. Berakhot 2:8)에서는 주인이 ‘왕(מֶלֶךְ)’으로 설정되며, 하루 종일 일한 일꾼과 단 두 시간만 일한 일꾼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마지막 일꾼은 짧은 시간 안에 다른 이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품삯의 근거는 전적으로 일꾼의 공로와 덕에 있으며, 신학적 메시지는 “짧아도 탁월한 공로는 긴 수고를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결과 해석은 뛰어난 의인의 짧은 생애를 칭송하는 데 있습니다.

7. 랍비 유대교의 은혜와 공로 개념

공로 중심 전통 (middah keneged middah, “행위에 따른 상응”)
o 미쉬나 Avot 3:15: כל הפעלים נמדדים במידה — “모든 것은 행위에 따라 측량된다.”
o b. Sanhedrin 90a: “의인은 그 행위에 따라 보상받는다.”

은혜 강조 전통
o b. Berakhot 17a: הקדוש ברוך הוא נוהג עם בריותיו בחסד — “거룩하신 분은 피조물들과 은혜로 행하신다.”
o Midrash Tehillim 103:10: לֹא כַחֲטָאֵינוּ עָשָׂה לָנוּ — “그가 우리의 죄에 따라 갚지 않으셨다.” (시 103:10 인용)

이처럼 랍비 제라의 장례식 비유는 공로 중심적 사고의 대표 예입니다.

8 교부 해석과의 접점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De Gratia et Libero Arbitrio): 마 20장의 비유를 전적으로 은혜 중심으로 해석, 인간의 자격을 무효화합니다.

•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Commentarii in Matthaeum): 유대인(처음 온 자)과 이방인(나중 온 자) 대비로 읽음 → 대체신학적 해석 경향을 보입니다.

• 차이점: 교부들은 j. Berakhot의 전승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팔레스타인-시리아 지역의 문화적 교류로 비슷한 이야기 구조를 접했을 가능성 있습니다.

9. 신학적·해석학적 고찰

1. 메시지의 방향 차이
o 예수: 은혜(Eirēnē) — 공로와 상관없이 주권적으로 베푸심
o 랍비 제라: 공로(Meritum) — 짧아도 탁월한 행위는 긴 수고를 능가

2. 예수님의 의도
o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계약 노동의 논리가 아니라 언약 은혜의 논리에 기초합니다.
o 마지막 시간에 온 자도 동일한 영광을 받는 것은 구원의 주권성과 종말론적 완성을 나타냅니다.

10. 교회사적 오해 가능성

o 헬라 철학적 이분법 + 알레고리 해석 → 유대인=초기 일꾼, 이방인=후기 일꾼, 유대인 폐기 → 이스라엘이 교회로 대체됨.
o 그러나 1세기 청중에게는 ‘포도원=이스라엘’이라는 친숙한 상징이 있었기에, 비유의 핵심은 유대-이방의 대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질서 선포합니다.

이 두 비유는 외형적으로 유사하지만 메시지가 정반대입니다.

• 랍비 제라는 뛰어난 제자의 짧은 생애를 ‘왕이 손을 잡아 함께하는 비유’로 설명하며 공로를 칭찬합니다.
• 예수님은 마지막에 온 자들의 공로 부족을 전제로, 동일한 품삯을 주는 주인의 선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포도원 품꾼 비유를 공로주의나 대체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문 의도를 훼손하며, 이는 헬라적 알레고리 해석의 전형적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포도원 품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랍비 유대교의 비교 분석>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품삯은 ‘그날의 일당’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추수의 완결’에 참여한 몫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시간에 온 일꾼조차 없었다면 추수가 미완으로 남았을 것”—은 고대 유대 전통과 예수의 의도, 그리고 주요 신학자들의 읽기와 상당 부분 맞물립니다. 아래에 랍비 유대교·타나크·예수님의 맥락·역사적 주해를 나란히 대조해 보며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랍비 유대교의 관점: “마지막 한 시간”도 결정적이다

(1) 시간-긴박성-완결

• “날은 짧고, 일은 많고, 품꾼은 게으르며, 삯은 크고, 집 주인은 재촉한다.”
(יהוֹם קָצָר, וְהַמְּלָאכָה מְרֻבָּה, וְהַפּוֹעֲלִים עֲצֵלִים, וְהַשָּׂכָר הַרְבֵּה, וּבַעַל הַבַּיִת דּוֹחֵק)
— 미슈나 아보트 2:15(탈폰)

이 금언은 “집 주인(בַּעַל הַבַּיִת)”의 재촉, 곧 마감의 긴박성과 완결을 향한 동원을 정면으로 말합니다. 비유의 시간 구조(이른 아침부터 열한시까지 계속 나가서 사람을 부르는 장면)와 꼭 들어맞죠.

• “네 죽기 하루 전에 회개하라.” (아보트 2:10, 엘리에제르) → 사람은 죽을 날을 모르니 항상 회개하라는 뜻. 즉, 마지막 순간의 돌이킴도 실제적으로 상정됩니다.
• “어떤 이는 많은 해에 걸쳐 자기 세계(올람 하바)를 얻고, 어떤 이는 한 시간에 얻는다.”
(יֵשׁ שֶׁקוֹנֶה עוֹלָמוֹ בְּשָׁעָה אַחַת) — b. Avodah Zarah 17a

늦게 온 자가 **‘한 시간’**에 결정적으로 합류할 수 있다는 사유틀은, 포도원 비유의 “막판 노동자”와 정확히 공명합니다.

(2) 은혜와 공의의 겹쳐짐

• 유대 전통은 하나님이 공의(דִּין) 위에 자비(רַחֲמִים)를 세우신다고 배웁니다(출 34:6의 자비 속성; 랍비 격언 “선의 분량이 징벌보다 크다” 미다 토바 메루바).

• 따라서 ‘오래 일했느냐’보다 ‘지금 합류했느냐’가 결정적일 수 있고, 마지막에라도 참여하면 온전한 몫을 받는다는 사고가 가능합니다.

결론(랍비 전통): “마지막 한 시간”은 추수 완결을 위해서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도 실제로 결정적일 수 있다. 당신의 해석과 잘 맞습니다.

2. 타나크(히브리 성경): 추수-완결의 종말론적 모티프

추수=‘마감’의 이미지:
“낫을 대라, 수확이 익었음이니라”(욜 3:13), “여호와께서 큰 키질로 곡식을 떠실 것”(사 27:12). 추수는 심판·완결의 은유이자 **모으심(수확)**의 은유입니다.

무상성/언약 인애:
“오라 값 없이(בְּלוֹא־כֶסֶף) 포도주와 젖을 사라… 언약의 인애로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라”(사 55:1–3).

구원의 분배는 ‘계약·공정·비례’만이 아니라, 언약적 호의(חֶסֶד)와 무상성(חֵן)의 차원에서 설명됩니다. 타나크에서 보이는 마감-추수-모으심이라는 종말적/언약적 프레임은, “마지막 인력 동원 없이는 완결이 안 된다”는 당신의 직관을 지지합니다.

3. 예수님의 의도(마 20:1–16): 은혜의 경제 + 완결을 위한 총동원

(1) 본문 앞뒤 맥락

• 앞단(마 19:27–30)에서 베드로가 “우리는 다 버렸는데 우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묻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역전 규범을 붙이시고 곧장 포도원 비유를 주십니다.
• 비유는 ‘계산하는 제자’에게 “임금=은혜, 기준=부르심”임을 가르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 완결을 위한 촉박한 동원의 그림을 제공합니다(아침·3시·6시·9시·11시).

(2) 은혜의 구조와 완결의 긴박성

• 주인의 말: “내가 원하여(θέλω) 마지막 온 자에게도 너와 같이 준다… 내가 선(ἀγαθός)하므로 네가 악한 눈(ὀφθαλμὸς πονηρός)이냐?”(마 20:14–15)
→ 주권적 선하심이 임금 배분의 근거가 됩니다.
• 동시에 끝 시간까지 사람을 데려옴: 포도원은 오늘 끝나야 하며(포도 추수는 적정일에 끝내야 품질과 손실을 관리 가능), 마지막 인력이 없으면 추수 미완.
• 예수의 다른 말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추수의 주인(κύριος τοῦ θερισμοῦ)께 일꾼을 보내주소서”(마 9:37–38).
→ “마지막 품꾼”의 소집은 하나님 나라 수확의 완결을 위한 총동원으로 읽혀도 무방합니다.

예수님 비유의 1차 초점은 은혜의 경제(동일 품삯, 시기하지 말 것)지만, 이야기의 시간 설계는 완결을 위한 ‘마지막 동원’이라는 점에서 은혜와 완결이 함께 굴러갑니다.

4. 역사적 주해(교부·신학자): “한 데나리온 = 영생”, “시간대 = 인류 역사/인생 시기”

• 어거스틴(Sermon 87 등): 시간대 또는 구속사 시대(아담→노아→아브라함→모세→그리스도 이후)로 읽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영생을 의미하며, 늦게 온 자(이방인/후기 회심자)도 동일한 생명을 받습니다. 포인트는 은혜의 평등성과 질투 금지한다는 사실입니다.
• 그레고리우스 대제와 크리소스톰: 임금의 동일성을 하나님의 호의로, “불평”을 시기로 해석합니다. 마지막 시각의 회심도 충만한 몫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아퀴나스(Catena Aurea 요약): 공정성의 침해는 없고(먼저 온 자에게 약속 준수), 은혜의 초과가 있을 뿐이라고 정리(정의+은혜 동시 성립)했습니다.
• 루터/칼뱅: 공로주의 교정—하나님은 빚진 분이 아니며, 상급은 은혜에서 온다고 강조하며 동시에 겸손과 감사를 촉구했습니다.
• 현대 신약학(예: 요아킴 예레미아스, K. 스노드그래스, N. T. Wright):

비유를 언약-역전-포용(이스라엘/이방·의인/죄인) 구도로 읽으며, 임금 동일성은 왕국 공동체의 동등 참여를 가리킨다고 해석. 일부는 “마지막 동원”을 종말적 수확의 시급성(마 13장의 추수 종말론)과 연결합니다.

다수의 전통 주해는 은혜의 평등성과 질투 금지에 초점을 두지만, 시간대/마감-완결을 인생/구속사/종말 수확으로 읽는 전통도 뚜렷합니다. 당신의 “마지막 품꾼-완결” 논지는 합리적 보조 포인트로 충분히 배치 가능합니다.

5.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이해하는 두개의 축

1. 핵심 축: 비유의 1차 의도는 임금 분배 = 은혜의 주권(정의의 약속 준수 + 은혜의 초과)과 시기 금지(“네 눈이 악하냐? 나는 선한데”)입니다.
2. 보조 축: 이야기의 시간 설계(아침~열한시, 마감 직전 동원)는 완결을 위한 총동원을 암시하고, 이는 랍비적 긴박성(아보트 2:15)과 한 시간에 얻는 세계(AZ 17a), 타나크의 종말적 추수 모티프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3.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완결에는 처음 온 사람도, 나중 온 사람도 모두 필요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종말론적 의미>

1. 서론: 완결성(Completion)과 충만(Plērōma)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단순히 공정한 보상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결(תַּכְלִית)에 도달하는지를 드러냅니다. 헬라어로 ‘충만, 완전함’을 뜻하는 πλήρωμα (plērōma, 롬 11:25; 엡 1:10)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모든 시대와 민족을 포괄하는 최종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랍비 유대교의 תִּקּוּן עוֹלָם (Tikkun Olam, 세상의 회복)과 종말론적 완성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2. 부르심의 완결성: 시간과 순서의 역전

비유에서 주인은 다섯 번(6시, 9시, 12시, 3시, 5시)에 일꾼을 부릅니다. 이 시간 구조는 하루의 기도 주기(שַׁחֲרִית Shacharit, מִנְחָה Minchah, מַעֲרִיב Ma’ariv)와 연결됨을 이미 앞선 글에서 충분히 언급했습니다.

랍비 문헌(ברכות Berakhot 26b)은 세 차례 기도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연관 지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세대를 따라 지속됨을 강조합니다. 마지막 다섯 시(ἡ ἑνδεκάτη ὥρα, 11th hour)는 일몰 전의 절박한 시간으로, 종말론적 ‘마지막 기회’를 상징합니다.

이 구조는 순서상의 우선권보다 부르심의 완결성—즉,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하나로 통합됨—을 강조합니다.

3. 공동체의 완결성: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14–16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을 “한 새 사람”으로 묘사하며, 이는 헬라어 εἷς καινὸς ἄνθρωπος (heis kainos anthrōpos)로 표현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동일 품삯 지급은 이러한 연합의 상징적 예고입니다.

탈무드(סנהדרין Sanhedrin 105a)에서는 이방인이 회개하여 의로워지는 경우, 이스라엘과 동일한 상속권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비유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가 ‘유대인만의 나라’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완성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4. 추수의 완결성: 이사야의 포도원과 종말의 수확

이사야 27:2–6의 “좋은 포도원의 노래”는 종말론적 수확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בָּאֵשֶׁר יָשִׁית (ba’esher yashit)—“그가 심으신 곳”—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암시하며, 모든 열매가 때가 차면 거둬집니다.

요한계시록 14:14–20은 “땅의 곡식이 다 익었다”는 종말의 추수를 선포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마지막 한 시간 일한 자도 이 추수에 참여함으로써 완전한 수확이 이루어집니다.

5. 완결성의 윤리: 공로주의를 넘어선 은혜

하나님 나라의 완결성은 ‘많이 일한 자가 더 많이 받는다’는 인간적 공로주의를 해체합니다. 히브리어 חֶסֶד (ḥesed, 언약적 인애)와 헬라어 χάρις (charis, 은혜)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인간의 조건과 무관하게 주어짐을 강조합니다.

미슈나(אבות Avot 2:16)는 “네가 일을 다 마칠 필요는 없으나,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 완성을 위한 각자의 책임과 은혜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6. 신학적 결론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결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1. 부르심의 통합 — 모든 시간과 세대가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통합됩니다.
2. 공동체의 통합 —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3. 추수의 완성 — 마지막 품꾼의 참여로 종말의 수확이 충만하게 됩니다.
4. 은혜의 우위 — 보상은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결정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와 언약 공동체의 종말론적 포용성>

포도원 품꾼 비유는 단순히 품삯의 공정성 문제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언약 공동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핵심은 종말론적 시점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동일하게 부르심을 받으며,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된다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 중심 언약관에서 보편적 언약관으로

유대 전통에서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는 철저히 이스라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 예언서의 확장된 시야: 이사야 56:6–7, 스가랴 8:20–23 등은 말일에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예언합니다.
• 랍비 문헌: 미드라쉬 탐후마에서는 종말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온다고 말합니다.
• 예수님의 비유는 이 종말론적 포용의 시야를 강화하며, 언약의 경계선을 허무는 선언으로 작동합니다.

2. 포도원 품꾼과 이방인의 수용

• 아침에 부름받은 품꾼: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알았던 이스라엘입니다.
• 나중에 부름받은 품꾼: 복음 시대에 부름 받은 이방인, 또는 종말 직전 회개한 자들입니다.
• 동일한 삯: 부르심의 시점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생명(영원한 생명)을 동일하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3. 바울 신학과의 연결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를 감람나무 비유로 설명합니다. 이는 포도원 품꾼 비유와 신학적 공명을 가집니다.

• 감람나무의 뿌리: 하나님의 언약 약속.
• 접붙임 받은 가지: 복음으로 부름받은 이방인.
• 다시 접붙임 받을 가지: 종말에 회복될 이스라엘.

포도원 품꾼 비유와 감람나무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종말론적 통합을 강조합니다.

4. 종말론적 공동체의 특징

• 민족과 언어의 경계 초월: 요한계시록 7:9–10의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하나의 찬송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 시간과 공로의 초월: 구원의 보상은 시간적 투자나 종교적 공적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 하나님 주권의 실현: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 주권적 선택과 은혜가 중심입니다.

5. 교회사 속 포용성 이해

• 초대교회: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을 통해 유대인-이방인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 교부 해석: 오리게네스는 이 비유를 구약 성도의 부르심과 신약 교회의 부르심의 통합으로 해석합니다.
• 현대 선교 신학: 종말론적 시야에서 복음은 모든 민족이 동일한 언약 공동체의 일부가 되게 하는 도구로 이해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언약 공동체가 종말에 이르러 완전히 포용적이고 통합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예고합니다. 이는 언약의 경계가 이스라엘 중심에서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되는 종말론적 언약의 보편성을 드러내며, 그 기초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경제·사회적 함의와 종말론적 정의>

포도원 품꾼 비유(마태복음 20:1–16)는 세속적 경제 논리로 보면 불공평해 보입니다. 같은 임금을 받았지만, 일한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경제학의 등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정의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정의(צֶדֶק, tzedek)와 은혜(חֵן, chen)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결합합니다.

1. 1세기 팔레스타인의 경제 구조와 포도원

• 로마 제국의 토지 소유제
대부분의 토지는 부유한 지주 또는 로마의 후원 관계망을 통해 통제되었습니다.

• 일용직 노동자의 불안정성
시장(ἀγορά, agora)에 서서 고용주를 기다리는 구조는 오늘날의 ‘하루 품삯 노동’과 유사했습니다.

• 포도원 이미지의 상징성
이사야 5장과 시편 80편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며, 그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2. 랍비 전통의 노동과 보상 이해

• 미쉬나 바바 메치아 7:1: 고용주는 일한 시간에 따라 품삯을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 탈무드 바바 메치아 83a: 노동자의 존엄성을 지키는 공정 임금 원칙을 강조합니다.
•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이 일반 원칙을 깨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세속적 보상 논리를 넘어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3. 종말론적 정의와 하나님의 경제

• 첫째와 나중: 인간 사회의 위계와 서열이 뒤집히는 ‘종말론적 전복’(eschatological reversal)입니다.
• 공로 중심에서 은혜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경제는 meritocracy(공로주의)가 아니라 grace economy(은혜의 경제)입니다.
• 은혜의 보편성: 부름 받은 시점이 아니라 부름 자체가 결정적인 가치입니다.

4. 사회적 메시지

• 공동체 내부의 불평 해소: 초대교회 내 유대인-이방인 갈등, 오래된 성도-새 신자 간의 비교심리를 경계합니다.
• 노동·경제 윤리의 재해석: 하나님 나라의 임금은 단순히 노동의 양이 아니라 주인의 선의와 약속에 의존합니다.
• 사회적 약자 포용: 가장 늦게 고용된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상징합니다.

5. 현대 적용

• 교회 공동체: 신앙 경력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 은혜를 중심에 둔 평등한 수용입니다.
• 경제 정의 논의: 세속 경제에서의 공정성 담론과 달리, 종말론적 정의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절대 기준 위에 섭니다.
• 선교와 복음 전파: 마지막 순간에 부름받은 자도 동일한 영광에 참여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세속적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 은혜로 완성된 정의임을 보여줍니다. 경제적 비유 속에 담긴 이 종말론적 메시지는, 공동체 안팎에서 하나님의 포용과 주권을 선포하는 강력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의 하가다적 해석과 신약 공동체 윤리>

하가다는 단순한 이야기나 예화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서사적·도덕적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품꾼 비유 역시, 당시 랍비 문학에 나타나는 하가다적 전통과 연결됩니다. 차이점은, 예수님의 하가다는 ‘율법 준수’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은혜 질서’를 새롭게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1. 랍비 하가다 전통 속의 노동 이야기

• 미드라쉬 전통: 늦게 온 자가 동일한 보상을 받는 이야기는 흔치 않으나, 하나님의 자비가 사람의 공로를 초월한다는 메시지는 빈번히 등장합니다.
• 예시 – 미드라쉬 시르 하쉬림 라바 5:2: “하루 동안 회개한 자가 일생의 공로를 얻는다.”
• 탈무드 아보다 자라 17a: 회심 직전의 선행도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는 논의합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포도원 품꾼 비유가 랍비 전통의 은혜-공로 논쟁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예수님의 하가다적 확장

예수님은 하가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완성을 지평에 둡니다.

• 주인의 주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지 못하겠느냐?”(마 20:15) — 하나님 주권의 하가다적 선포입니다.

• 마지막이 첫째: 종말론적 역전은 하가다의 전형적 주제이지만, 예수님은 이를 은혜 중심의 왕국 질서로 구체화됩니다.

3. 신약 공동체 윤리에의 적용

• 차별 없는 수용
초대교회에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오래된 신자와 새 신자의 위계 갈등을 해소합니다.

• 섬김과 겸손
‘먼저 온 자’의 특권 의식을 버리고,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 은혜의 경제 실천
교회 재정과 사역 배분에서 ‘공로 중심’이 아니라 ‘필요 중심’의 분배입니다.

4.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

• 신앙 경력으로 서열을 만들지 말 것: 오랜 신앙 생활이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월감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봉사와 헌신의 동기 점검: 보상의 크기가 아니라, 주인의 부르심과 약속에 집중합니다.
• 신앙의 마지막 순간도 소중함: 말년의 회개와 헌신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동참합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하가다적 맥락에서 읽을 때, 우리는 단순한 도덕 교훈을 넘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윤리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의 틀 안에서 완성되는 윤리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재정의된 윤리이며, 종말의 빛 속에서 현세의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식탁과 품꾼 비유의 완결>

포도원 품꾼 비유는 단순히 하루 품삯을 나누는 경제 비유가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식탁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잔치, 혼인, 식탁의 이미지로 자주 묘사되는데(마 22:1–14; 눅 14:15–24), 이는 고대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기대와 깊이 연결됩니다.

1. 유대 종말론에서의 식탁 이미지

• 이사야 25:6–8: “만군의 여호와께서…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한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고…”
• 에녹서와 4에스드라서: 의인들이 메시아와 함께 잔치에 참여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묘사됩니다.
• 쿰란 공동체 규율서(1QSa 2:11–22): 마지막 날에 메시아와 성도들이 함께 식탁에 앉습니다.

이 모든 전통은 하나님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하나의 식탁에 모이는 사건을 종말의 완성으로 보았습니다.

2. 포도원 품꾼 비유와 식탁 비유의 연결

• 포도원 품꾼 비유의 핵심은 ‘동일한 품삯’이며, 이는 종말의 식탁에서 주어질 동일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 마지막이 첫째 되는 원리는 종말론적 잔치에서 “먼저 초대된 자가 거절하고, 나중에 초대된 자가 들어오는” 잔치 비유(마 22:1–14; 눅 14:15–24)와 구조적으로 병행됩니다.
• 주인의 품삯 약속이 잔치 초대장의 역할을 하고, 하루의 노동 여부가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결정 요인이 됩니다.

3. 신약 공동체와 종말론적 식탁 윤리

• 포용의 식탁
교회 식탁은 종말 식탁의 예표이므로, 인종·신분·성별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갈 3:28).

• 은혜의 동일성
신앙의 연륜, 직분, 사역량에 따라 ‘더 많은 자리’나 ‘특별 메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주님의 잔에 참여합니다.

• 초대받은 자의 책임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4. 현대 교회의 적용

• 성찬의 재해석: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종말 잔치의 선취로서의 성찬을 인식해야 합니다.
• 교회 내 계층 해체: 물질적 기부액, 봉사량, 연령, 세례 연도에 따른 비공식 서열을 없애야 합니다.
• 선교와 포용: 아직 초대받지 못한 자들을 식탁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은혜의 경제를 가르칠 뿐 아니라, 그 은혜가 종말의 식탁에서 완전하게 실현됨을 보여줍니다. 이 식탁은 공로와 능력의 차이를 넘어,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자를 하나로 묶는 자리이며, 하나님 나라의 완결성을 미리 맛보는 은총의 현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종 심판과 포도원 품꾼 비유의 경고>

포도원 품꾼 비유는 은혜의 풍성함을 전하는 동시에, 그 은혜를 오해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에게 숨겨진 종말론적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초청받은 모든 자에게 열려 있지만,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초대장이 아니라 응답과 충성을 요구합니다.

1. 비유 속에 내포된 심판의 논리

• 불평하는 첫 번째 품꾼들은 은혜를 공평 대신 불공정으로 해석합니다.
• 주인의 응답(마 20:13–15)은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부정하는 자에 대한 선언입니다.
• 여기서 심판은 거절의 심판으로 나타난다.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2. 유대 종말론에서의 상벌 구조

• 다니엘서 12:2: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얻기도 하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리라.”
• 미쉬나 아보트 4:16: “이 세상은 장차 올 세상의 현관이니, 스스로를 현관에서 준비하라.”
• 종말 심판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궁극적 구별(separation)이며, 이는 초대받은 자 중 일부가 식탁 밖으로 나가는 장면(마 22:13)과 겹칩니다.

3. 품꾼 비유와 다른 심판 비유의 평행 구조

1. 열 처녀 비유(마 25:1–13): 준비하지 못한 자는 문 밖에 남겨집니다.
2. 양과 염소 비유(마 25:31–46): 행위와 마음으로 드러난 진정한 제자만 왕의 식탁에 앉습니다.
3. 혼인 잔치 비유(마 22:1–14): 초대받았으나 예복 없는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납니다.

이 모든 구조가 포도원 품꾼 비유의 메시지와 연결됩니다—마지막 날, 하나님은 은혜에 응답한 자를 식탁 안으로 들이시고, 거부한 자를 바깥으로 내보내십니다.

4. 현대 교회에 주는 경고

• 자격의식과 비교의식: 오래 신앙생활 했다고, 직분이 높다고,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은혜 거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정의한 공평만을 주장하면, 은혜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됩니다.
• 겉모습의 신앙: 직분·명예·형식은 종말 심판에서 무력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 속 심판은 형벌보다 분리, 벌보다 배제에 가깝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들어가며, 은혜로 완성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끝까지 붙들지 않는다면, 마지막 식탁의 자리에서 사라지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따라서 종말의 심판은 단순히 “누가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은혜를 끝까지 붙드는가의 문제입니다.

<포도원 품꾼과 교회-이스라엘 문제>

1. 교회사 속 잠재적인 오해

(1) 알레고리·헬라 철학적 틀

• 초기 교부 시대부터(특히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헬라 철학과 알레고리 해석이 결합하면서, 비유의 각 요소를 교회-이스라엘 대조 구조로 재해석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o 초기 품꾼 = 유대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
o 후기 품꾼 = 이방인 (복음을 나중에 받은 자)
o 결론: 유대인은 시기하여 배제되고, 교회가 참 포도원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 이는 비유의 핵심 포인트(하나님의 은혜와 주권)보다, 역사적 권리 이전이라는 정치-신학적 결론을 강조하게 만들었습니다.

(2) 역사적 영향

• 중세와 종교개혁기까지 이어지며, 유대인을 ‘먼저 된 자’로만 보고, 종종 “불순종하여 탈락한 집단”으로 규정했습니다.
• 이는 반유대주의 신학의 한 기반이 되었고, 비유가 포용과 은혜의 메시지라는 본래 성격이 왜곡되었습니다.

2. 랍비 유대교적 관점에서의 해석 틀

랍비 유대교에서 포도원은 대부분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사 5:1–7, 시 80편, 예 12:10)를 의미하지만, 품꾼 비유 자체를 이방인 배제 논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 마지막 순간의 합류도 온전한 몫을 받는다는 개념은 테슈바(תשובה, 회개)와 게율라(גאולה, 구속)의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 미슈나와 탈무드에서는 이방인도 ‘의로운 이방인’(חסידי אומות העולם)은 올람 하바(세상에 올 세계)에 참여한다고 가르칩니다(b. Sanh. 105a 등).
• 즉, 마지막 온 자가 이방인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폐기를 뜻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언약 공동체의 확대로 봅니다.

3. 예수님의 의도

마태복음 20장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은혜의 경제 — 하나님의 보상은 ‘일한 시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부르심에 따라 주어집니다.
2. 시기 금지 — 먼저 부름받은 자들이 나중 온 자를 질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 왕국의 포용성 — 하나님 나라에는 유대인·이방인, 오래 된 제자·막 온 제자가 모두 들어갑니다.
4. 그러나, 비유의 1차 청중은 유대인 제자들이었고, 그들에게는 “먼저 된 자로서 은혜를 오히려 기뻐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즉, 대체가 아니라 함께 참여가 목적입니다.
5. 종합 분석 — 잘못된 해석 바로잡기

이스라엘-교회 해석에서는 포도원을 교회로 간주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유대인에서 교회로 완전히 대체되었다고 봅니다. 이에 비해 랍비 유대교적 배경에서는 포도원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로 이해하되, 이방인도 포용될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보다 더 확장되어, 포도원을 하나님 나라 전체로 보며, 그 안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가 포함됩니다.

‘초품꾼’에 대해서 이스라엘-교회 신학은 유대인을 가리키며 이제는 폐기된 존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적 배경에서는 여전히 부르심이 유지되는 언약 백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먼저 부름 받은 제자와 이스라엘로 보셨습니다. 반대로 ‘후품꾼’은 대체신학에서 이방인, 즉 유대인을 대신한 새로운 백성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랍비 유대교에서는 회개하여 합류한 늦은 자, 이방인 가능성을 포함한 부류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나중에 부름 받은 자, 막 합류한 자로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신학의 메시지는 ‘교회가 유대인을 대체했다’는 주장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의 해석은 은혜의 보편성과 언약의 확장을 강조하며, 예수님의 본래 의도는 은혜와 포용, 질투 금지, 그리고 공동의 완결을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해 유대인 → 교회로 권리 이전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유의 중심을 벗어나고, 반유대주의적 결과를 초래해 왔습니다. 랍비 유대교와 예수님의 메시지는 오히려 “마지막 온 자도 포도원 완결에 필수”라는 포용과 공동 사역의 비전을 공유합니다. 따라서 비유는 대체가 아니라 연합과 완성을 말합니다. 먼저 된 자(이스라엘)와 나중 된 자(이방인)가 함께 하나님의 나라 추수를 완결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은혜의 질서>

1. 오래된 신자와 새 신자 사이의 긴장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유사한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수십 년간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들은 ‘오랜 기간의 수고’를 근거로 인정과 보상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동일하게 중요한 역할을 맡거나 동일한 영적 은혜를 누릴 때, 오랜 신자들은 종종 서운함과 비교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받는 것을 불편해했던 것과 같은 심리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시간보다 관계를 본다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 시작했느냐”보다 “어떻게 응답했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교회 안에서 이 원리를 실천하려면, 봉사의 연한이나 직분의 높이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진정성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3:6–7의 말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3. 은혜의 질서가 만드는 공동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인정하는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1. 서로를 비교하지 않음 – 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비교하는 대신, 각자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2. 새 신자를 환영하는 문화 – 늦게 온 사람도 동일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요청됩니다.
3. 섬김의 동기 변화 –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은혜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봉사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마치 초기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가족으로 묶어냈던 것처럼,
다양한 배경과 신앙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4. 현대 교회의 도전

그러나 현대 교회는 여전히 성취 중심 문화와 경쟁 구조 속에 있습니다. 직분과 봉사의 연한이 ‘영적 서열’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비유는 교회가 이런 구조를 깨고, 하나님의 은혜를 평등하게 나누는 공동체로 돌아가도록 부르십니다.

5. 오늘의 메시지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래된 봉사도, 막 시작한 순종도 모두 은혜로 채워진다.
그 은혜의 기준은 우리의 계산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다.”

<품꾼 비유가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전체 그림>

포도원 품꾼 비유는 단순한 경제 이야기나 선심성 고용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성격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메타포입니다. 포도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사 5:1–7)이며, 예수께서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열매로 설명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경제

• 주권: 하나님은 포도원의 주인이며, 누구를 언제, 어떻게 부르실지 전적으로 결정하십니다(마 20:15).
• 은혜의 경제: 세상 경제는 능력과 시간, 노력에 따라 보상이 결정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관계와 부르심, 그리고 언약에 근거한 보상으로 운영됩니다.
• 이것은 인간의 공로주의와 비교 경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2. 종말론적 전환과 가치의 역전

포도원 품꾼 비유의 핵심 구절—“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치의 역전이 필연적임을 선언합니다.

• 역사적 맥락: 유대인-이방인 구원의 순서 전환
• 공동체적 맥락: 직분, 연차, 봉사의 양이 아니라 은혜와 충성이 평가 기준
• 개인적 맥락: 회심이 늦었어도, 끝까지 충성하면 동일한 하늘 상급

3. 공동체와 제자도의 재정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교회 공동체의 존재 이유와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 차별 없는 부르심 — 교회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를 차별 없이 품어야 한다.
• 비교를 넘어선 기쁨 — 다른 사람의 은혜를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는 성숙한 공동체
• 종말을 준비하는 제자도 — 하루의 끝(역사의 끝)을 바라보며, 주인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삶

4. 오늘을 사는 성도의 결단

포도원 품꾼 비유는 단순히 과거의 교훈이 아니라 오늘과 종말을 잇는 신앙 결단의 초대장입니다.

• 하루를 은혜로 시작하라: 새벽부터 부름받았든, 해 질 무렵에 부름받았든, 모든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비교 대신 감사로 살라: 타인의 상급이 내 상급을 빼앗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합니다.
• 끝까지 충성하라: 하루의 마지막, 역사의 마지막,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에 주인께서 “자, 와서 받으라”고 하실 때까지.

포도원 품꾼 비유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는 시작도, 과정도, 끝도 은혜로 이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오해하면, 기쁨의 식탁이 아니라 불평의 자리로 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는 단순한 순서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은혜임을 마지막까지 잊지 말라는 초청이자 경고입니다.

<은혜의 경제학과 하나님의 나라>

1. 세상의 경제와 다른 하나님의 나라

세상은 시간·노력·성과에 따라 대가를 지급합니다.
기업은 근속 연수, 실적, 효율성을 기준으로 임금을 책정하고,
사람들은 이를 ‘공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공정’보다 ‘은혜’를 우선시합니다.
하나님의 경제학에서 보수는
얼마나 오래 일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선하심에 의해 결정됩니다.

2. 포도원 품꾼 비유의 신학적 핵심

1. 하나님의 주권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권리가 없느냐?”(마 20:15)
2. 은혜의 보편성 – 늦게 온 자나 먼저 온 자나 동일한 은혜
3. 관계 중심성 – 주인의 초대에 응답한 것이 결정적인 기준
4. 시기심 극복 – 다른 사람의 은혜를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이 성숙한 신앙

이 네 가지는 바울이 로마서 3:22–24에서 말한
“차별이 없으니 다 죄를 범하였으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3. 은혜를 받아들이는 태도

은혜의 경제학은 겸손과 감사를 요구합니다.
먼저 부름 받은 자는 자신의 특권을 자랑이 아니라 사명으로 삼아야 하며,
나중에 부름 받은 자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회개와 변화로 응답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단순히 개인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방식에 관한 선언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새로운 일꾼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주십니다.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아직 초대받지 못한 자”를 찾고,
그들을 부르러 ‘시장’으로 나가는 사명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마무리 고백
“주여, 저의 계산기를 내려놓고,
당신의 은혜의 장부를 기뻐하게 하소서.
먼저 온 기쁨도, 나중 온 은혜도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결론 – 포도원 끝자락에서 부르는 은혜의 노래>

이제 포도원 품꾼의 긴 여정을 마감합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한 비유를 해석하는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골짜기와 언덕을 지나, 열방의 먼 바람 속으로 나아가,
유대인의 골목과 로마의 광장을 거닐며,
역사의 강과 구속사의 물줄기를 함께 따라온 긴 순례였습니다.
그 길 위에서, 마차 창가에 스쳐 보았던 작은 풍경들이
훗날 깊고도 광대한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깨닫게 되듯,
포도원 품꾼의 비유 속 한 단어, 한 장면마다
덩굴이 본체를 감싸듯, 종말의 완성을 향한 거대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인류 전체를 향해 들려주신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깊은 아가다였습니다.
이 아가다가 세대마다 들리고 읽히며,
감추인 비밀의 휘장이 조금씩 열릴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숨겨 두신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랍비 제라의 이야기는
겉으로는 ‘짧은 시간’과 ‘동일한 보상’이라는 유사성을 가지지만,
그 뿌리와 열매는 서로 다릅니다.
제라의 이야기는 뛰어난 업적을 칭송하는 공덕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무자격자에게도 베풀어지는 주권적 은혜의 세계를 드러냅니다.
이 차이는 당시 유대 사회 안팎에서
은혜의 범위와 보상의 기준을 급진적으로 재정의하게 만들었고,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나는 지금 공로의 세계에 서 있는가, 은혜의 세계에 서 있는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약속을 철저히 지키시는 정의”와
“그 정의를 넘어서시는 은혜”가 동시에 참됨을 증언합니다.
먼저 온 자의 한 데나리온은 취소되지 않고,
나중 온 자의 한 데나리온은 깎이지 않습니다.
주인은 선하시고, 그 선하심이 보상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대체가 아니라 연합이며,
경쟁이 아니라 포용이며,
계산이 아니라 감사로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도 같습니다.
타인의 은혜 앞에 ‘악한 눈’(질투)으로 설 것인가,
아니면 주인의 선하심을 찬양하는 눈으로 설 것인가.
계산기를 내려놓고, 은혜의 장부를 기뻐하는 공동체—
그곳이 곧 포도원이요,
그 자리가 종말의 식탁입니다.
이제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침내 이 비밀을 깨달은 이들에게
예언자적 음성이 울려 퍼집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2025년 8월 13일 보스톤 김종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