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승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험한 세상에서, 세속의 도전이 만만치 않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까마귀 같은 존재가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것을 이겨내는 길은, 내 신앙의 수준과 단계를 높이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싸울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신앙을 성장 시키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

[목양저널] 말씀의 승리 » Der Sieg des Wortes! » 마태복음 4:1-11 / 주일설교 새벽묵상 새벽묵상  »

조류계의 왕자 독수리를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놀랍게도 까마귀라고 한다. 까마귀는 독수리의 목 위에 앉아서 독수리의 목을 쫀다. 독수리는 상당한 고통을 당하지만 시간낭비와 에너지를 낭비치 않으려고 반응마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면, 그냥 높게 더 높게 날아오른다. 독수리는 까마귀와 싸우려 하지 않고, 아주 높게 날아오름으로, 결국 까마귀는 산소부족으로 자연히 떨어지고 만다고 한다.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할 때, 우린 대부분 그런 자와 싸우느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극복할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보다 더 큰 능력과 지혜로 문제를 제어할 수 있는 법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험한 세상에서, 세속의 도전이 만만치 않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까마귀 같은 존재가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것을 이겨내는 길은, 내 신앙의 수준과 단계를 높이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싸울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내 신앙을 성장 시키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

▮ 주님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교훈을 하시면서 네 종류의 마음 밭으로 분류하셨다. 길가 밭, 돌 밭, 엉겅퀴 밭 그리고 좋은 밭이다.

길가 밭 같은 마음은 굳어지고 닫혀진 마음이다. 말씀을 듣지만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강퍅한 마음 상태다. 얕은 흙속에 돌들 밭 같은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속에 들어 있는 세속적인 것들로 인해 말씀이 설자리를 가질 수 없는 마음이다. 겉은 믿는 사람인데 속은 세속으로 가득찬 마음이다.

엉겅퀴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고 뿌리는 내린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 당나귀처럼 듣고 결단도 하는데 순종이 없기에 결실도 없다. 고난이나 힘든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침몰해버리는 신앙이다.

그런데, 옥토를 말씀하기 전, “더러는..”했는데, 한글로는 ‘열 개중 서너 개’정도의 뜻이나, 원어에는 “알로스 = 다른”로서 이는 “앞의 세 가지 밭과는 다르게”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좋은 밭이란, 앞서 설명한 단점들을 모두 극복한 마음을 의미한다.

곧 열려진 마음으로 ‘아멘’하며 말씀을 받고, 말씀의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가지를 내어 거침없이 성장하는 믿음이 된다면 열매를 맺는 건 당연지사다. 결국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담아야 할 우리들의 마음이 관건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 로마의 백부장은 자기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 자, 유대 장로들을 청하여 주님께 나아가 대신 청을 넣는다. 주님은 그의 남다른 하인사랑에 직접 심방하여 고쳐 주시려고 했지만 “주여,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게도 종이 있어 이리 가라 하면 가고 저리 오라 하면 오나이다”

그러니 주님이 어디 계시던 말씀 한 마디면 하인이 나을 수 있다고 고백하자, 주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다.

아람 나라 전쟁 영웅인 나아만 장군 역시 문둥병에 걸려 엘리사 선지를 찾아와 도움을 구했을 때 방문도 열지 않은 채 통명스럽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담그라”명하자, “내 생각엔..”하면서 돌아가려다가 종들의 충고를 듣고 순종하여 고침을 받았다. 신앙의 위기는 내 생각이 말씀보다 앞설 때 만난다.

▮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 마귀에게 시험 받으러 가신 것”으로 시작된다. 성자 성령 모두 같은 하나님이신데, 본문은 성자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셨다고 기록한다. 성령께서 이미 비둘기처럼 머리에 임하셨기에 성령충만이시다. 그러면 만사형통의 길을 가셔야 할텐데 광야로 그것도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가신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기적의 신앙을, 말씀의 신앙으로

사단의 공격은 늘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온다. 40주야를 굶주렸으니 얼마나 배고프시겠는가? 적어도 지금은 말씀보다는 떡이 더 절실하다. 그럼에도 거부하신 것은, 떡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을 거부하신 것이다. 창조의 질서를 깨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겐 시험이 안된다. 왜냐면 우린 돌로 떡을 못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것도 은혜요 축복이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시험이다. 그래도 주님은 이기셨다.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것이 능력이다.

▮ 성전 꼭데기에 올려놓는 시험

사단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올려놨다는 것이 문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꼭데기에 서려고 하는 것, 곧 교만이다. 그것도 성전에서 세상의 속한 것들을 자랑하고 으스대고 높아지고 인기 얻으려고 한다면,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감히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기몰리를 해보라는 것인데, 전제조건이 있다. 떡 시험에서도 그랬지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주님은 이미 전 장에서, 세례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인증하셨다.

그런데 사단은 마치 아직 아니라는 트릭을 써서 예수님에게 기만술을 걸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이단들이 조잡하게 짜깁기를 해서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마치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며 자기들에게 와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미혹하곤 한다.

▮ 우상숭배를 부추키는 사단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미혹한다. 주님 자체가 영광이고 천하만국의 주인이신데 말이다. 사단은 이렇게도 허무맹랑하다. 우린 아주 작은 이해관계만 생겨도 쉽게 사단에게 무릎을 꿇어버리지는 않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권위와 힘만으로도 충분히 사단의 시험을 제어하실 수 있다. 그러나 번번이 “기록되었으되”라며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그만큼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말씀의 권위를 인증하신 것이다. 말씀의 승리의 중요성을 일갈하신 것이다.

스스로의 권위와 능력으로 승리의 길을 충분히 가실 수 있지만, 성령에게 이끌리시고 말씀을 인용하셔서 말씀의 승리를 가르치시려는 주님의 깊은 의도를 헤아려야 변질되지 않는 신앙을 지켜갈 수 있다.

필자 한은선 목사/ 베를린선교교회 담임목사 / 코스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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