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을 주시는 하나님

눈길을 주시는 하나님
눈길을 주시는 하나님 이미지 ◙ Photo&Img©ucdigiN

저는 일생동안 꽃을 가꾸거나 정원을 꾸며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쁜 사역 가운데 꽃을 가꾸는 일은 사치스러운 일이고, 꽃을 사는 일이 있다면 그 돈으로 선교 사역에 필요한 구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 제가 웰슬리 지역으로 이사 온 뒤 아침 저녁으로 꽃을 가꾸고 있습니다.

[시대조망] 눈길을 주시는 하나님 » 김종필 선교사 » 처음에는 어찌하는지도 몰랐지만 꽃을 보다가 너무 예쁜 꽃들을 보며, 이름 하나 하나를 찾아 보기 시작했습니다. 종류도 많고 한번 들은 꽃 이름을 다음에도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눈길을 주시는 하나님

“눈길을 주다.”
“눈길을 보내다.”
“눈짓하다.”
“눈길을 사로잡다.”
“눈길이 가다.”
“눈길을 받지 못하다.”
“눈길조차 주지 않다”
“눈곱만큼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저는 종종 “눈길을 주다.”는 말을 생각하곤 합니다.

봄에 피는 꽃, 여름에 피는 꽃, 그리고 가을에 피는 꽃, 일년생 꽃, 다년생 꽃, 나무 위에 피는 꽃, 허브로 피는 꽃 등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나무 전체에 피는 꽃은 크게 보이는 꽃처럼, 단풍 지며 보이는 단풍 나무는 거대한 단풍 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무도 그리고 줄기도 아닌 식물이나 나무 줄기에 달려서 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을 꽃차례라고 합니다.

꽃의 형태에 따라서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이 턱에 달려있는 것을 “꽃”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다 같은 줄 알았던 꽃이 꽃잎이 떨어져서 달린 것을 말하는 “갈래꽃”과 통꽃에서 민들레곷처럼 꽃뿌리의 모양이 주걱처럼 피는 것을 “설상화”라고 하며, 코스모스처럼 꽃이 안쪽으로 통처럼 모양이 생긴 것을 “통상화”라고 부릅니다.

이런 모든 꽃에는 암꽃과 수꽃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꽃차례라는 것이 위로 올라가는 모양과 아래로 내려 오는 모양에 따라서 유한 꽃차례와 무한 꽃차례로 구분합니다. 즉 밑에서 위로 피고 올라가는 유한 꽃차례에는 총상 꽃차례, 수상 꽃차례, 산방 꽃차례, 산형 꽃차례, 꼬리 꽃차례가 있습니다. 반대로 밑으로 향하여 피는 꽃은 무한 꽃차례라고 하는데 이에는 취산 꽃차례, 권산 꽃차례, 배상 꽃차례가 있습니다.

꽃을 지나치듯 보기만 하고 살아왔던 저의 인생 가운데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꽃을 볼 때마다 꽃 모양과 꽃 차례, 그리고 꽃 잎의 모양, 암꽃과 수꽃,잎몸, 잎자루와 턱잎으로 구분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꽃에 초본식물과 목본식물로 구분되어 있음을 저같이 무지한자가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저 제가 아는 이사야 40장 8절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를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 29절의 말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는 알고 있지만 꽃 하나에 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는 눈길조차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꽃을 대하는 제가 꽃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눈길을 주다”

이 말은 어떤 일에 집중하거나, 무심코 지나치다가 우연히 바라보게 될 때 사용됩니다. 평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가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것이 우리의 눈길을 끌 게 될 때에 “우리는 눈길을 준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무심한 듯 걸어 가다 가도 예쁜 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꽃에 눈길을 주곤 합니다.

눈길주면 들풀조차도 꽃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사랑도 머뭅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 만물도 빛을 발하고 존재의 이유를 머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비단 꽃만이 아닙니다.

어두움이 깊게 내려 앉는 밤 하늘에 우리는 셀 수도 없는 별을 보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창세 이후의 인간의 생명보다도 더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인간에게 기억되고 이름이 지어지는 순간 그 별은 빛을 발합니다. 인류는 별들을 발견할 때마다 이름을 지워주었지만 어느 순간 인간의 언어로는 감히 담을 수 없는 별들의 숫자에 그리스인들은 알파벳을 사용하여 무슨 자리의 α별, β별, γ별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마저도 천문학자들은 숫자를 사용해 알파벳을 섞어서 사용하여 이름이 아닌 기호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인류는 대략 10등성(等星)까지 포함하여 80만개의 별을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류가 별들의 이름을 짓는 것 자체가 가장 무모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별들에 대하여 수백 년 그리고 수천년이 지나도 별들의 이름을 다 짓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주에 있는 별의 총 수는 엄청나게 방대하고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관측 가능한 우주에 약 2,000억에서 2조 개의 은하가 있다고 추정합니다. 각 은하에는 수백만 개에서 수천억 개의 별이 있습니다. 수학적 계산으로 해도 아무리 계산기에 00000을 친 다해도 그 숫자를 다 셀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관측할 수 없는 은하계를 빼고 관측 가능한 범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추정에 따르면 우주에는 약 1,000조 개 즉 1023 (10의 23승)개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 마저도 우주의 관측 가능한 부분에 불과하며, 우주가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확장될 수 있으므로 실제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창세기 15:5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앞에 말문이 막힐 정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자손을 주시려고 이런 비유를 주셨을까요?

우리는 과연 별을 셀 수 있으며, 별에게 이름을 다 지어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까지만 해도 인류는 별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셀 수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의 이집트 천문학자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y)는 그의 저서 “알마게스트(Almagest)”에서 약 1,022개의 별을 목록화 했습니다. 이 숫자는 망원경이 없었기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기초한 것이었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유럽에서 단지 수천 개의 별만 존재한다고 믿어졌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1610년 망원경을 발명하면서 획기적인 발견을 거듭하게 됩니다. 갈릴레오는 그의 저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Sidereus Nuncius)”에서 은하수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무수한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갈렐레오는 별들의 총 수를 정량화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갈릴레오보다 7년 뒤에 태어난 요한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갈릴레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케플러는 1571년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개수는 1,000~5,000여개 라고 발표했습니다.

인류는 허블 망원경을 발명하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주에 별이 많다고 말하게 됩니다. 허블 망원경 발명 이후 관측 가능한 별의 숫자가 10의 22승 개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2024년 현재는 10의 23승이라고 말합니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이 발명되면 이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날 것입니다. 10의 23승은 1000,000,000,000,000,000,000,000 개 입니다. 관측 가능한 별의 숫자가 지구상 존재하는 해변의 모든 모래 숫자의 10배 정도 됩니다.

셀 수도 없는 별 가운데, 이름 모를 별을 발견하고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아직도 인류가 꿈꾸는 일입니다. 이사야 40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그 숫자대로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셔서 이끌어 내셨고, 그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으셨다고(부르심)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아직도 관측 수단이 없어서 우주의 끝을 알 수 없으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우주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관측 수단과 과학의 이기로 더 멀리 그리고 더 크게 발견하면 우주는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시편 19편 1절에서 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제가 40일 금식 중 묵상하면서 가장 크게 은혜를 받은 구절이 욥기 38장입니다. 그 중에서도 4절부터 7절까지에 저의 영혼 전체가 주님의 말씀에 압도당해서 놀라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자신에게 닥친 고난 속에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 일이 일어났다고 정죄하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던 욥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 아무도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습니다. 말씀 좀 해 주세요. 내 입장도 변호해 주세요!” 이런 욥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말 중, 그것도 하나님이 세치 혀도 안되는 우리의 말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AI와 모든 지식과 정보와 과학을 다 동원하여도, 셀 수도 없고, 관측도 불가능한 별들을 지으셨고, 밀물과 썰물로 더 이상 땅이 바닷속에 빨려 들어가지도, 육지가 점점 증가하지도 않도록 경계를 정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관측 가능한 measurement 그리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극미의 세계부터 광활한 우주의 경계까지 관측하는 것도 “물리학은 관측 가능한 경계안을 다룬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도량법(measuring line)과 기초 단위(footing set)를 정하셨다고 말하십니다.

윤 동주의 “별 헤는 밤”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1941. 11. 5.)

별을 세다가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가족과 그리고 어머니와 조국으로 연계한 윤동주의 시엔 무모하게 보이는 별을 세는 것이 시인에게는 허용된(?) 시적 기법을 시학에서는 객관적상관물 표현기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표현은 성경에도 자주 나옵니다.

시편 8편이 그러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바다의 모레보다 훨씬 더 많은 하늘의 별들을 지으신 것도, 이 우주를 지으신 것도,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만드신 것도 우리 인간을 위해 지으신 하나님, 거기에 우리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셔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필자는 별들을 다 세어보는 용기를 갖지는 못했지만 지나치는 풀한포기, 꽃 한송이에도 이름이 있음을 봅니다. 꽃과 식물과 곡식과 나무 사이에 우리는 수많은 들풀들을 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잡초라고 합니다. 하지만 잡초 하나 하나에도 모두 고유의 이름이 있습니다. 산을 오르다 만나는 수많은 꽃들을 보며 우리는 이름 모를 들풀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들풀에도 모두 다 고유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만약 이름이 없는 들풀을 발견한다면, 그들 중 특히 식물학자들 그 중에서도 원예 식물학자들이 앞다투어 이름을 지을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의 이름을 짓지 못하지만 이 땅에 기생하는 식물의 이름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 가운데 태어난 우리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셀 수도 없는 별들 속에 수천년이 지나도 다 알 수 없는 그 많은 별들보다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의 구원을 베푸시면서 우리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들풀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을 알고 부르시는 분입니다. 도리에 그의 눈과 귀가 우리에게만 향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대하 7:14-15)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눈길을 주십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시고 오직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돌이키며,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만 눈길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렘 1:5)

식물과 잡초도 구분하지 못했던 내가 하나 하나에 담긴 이름을 보며, 예레미야가 잉태하기도 전에, 그가 어머니 모태에서 짓기 전에, 그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생명에도 계획과 섭리와 예정이 있음을 보며, 그 놀라우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가을 꽃 가람에 주는 눈길

단아한 너의 모습
탐스럽고 아름다워
그대 이름 애스터엔
몰려오는 밤하늘 별들도 닮고파라

가던 길도 멈추게
무심한 내 마음에 눈길 끄는 그대여
달보드레 펼친 보자기
보라색 그린나래엔
고혹적인 자태로 사로잡는 내 눈길
그대 이름은 피투니아(petunia)

금보다 귀한 국화
눈길 닿은 곳에 펼쳐 보이는 현란함은
당신만이 가진 매력
홀꽃엔 수수함과 청초함이
겹꽃엔 화려함과 유려함이
방실 웃는 아네모네형
둥글둥글 생긋 웃는 폼폰형
가늘고 긴 가닥 널출진 스파이더형
가을 꽃의 진수는 당신이 다 담고 있소이다

<시어풀이>
꽃가람: 꽃과 강의 합성어로 꽃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강처럼 보이는 것
달보드레: 연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그린나래: 그린과 나래(날개)의 합성어로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아름다운 날개
널출지다: 꽃이나 식물의 줄기가 가느다랗게 길게 늘어지다.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올립니다.

필자 Dr. Elijah Kim(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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