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트 교회(Beesd Kerk)는 요한 칼빈의 종교 개혁 후로 세워진 교회로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다. 이 교회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으로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앙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교회이다.
[문화칼럼] 카이퍼의 발자취를 따라서 » 임청화 교수 » 2024년 9월 13일~19일, 네덜란드, 카이퍼의 발자취를 따라서 특별기고 » 26세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 교회에 첫 부임 해서 설교했을 때 베이스트 교회의 성도들은 카이퍼 목사가 현대주의적이고 자유주의 신학의 냄새가 풀풀나는 젊은 풋나기로 인지하고 카이퍼 목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치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님 후임으로 온 목사들을 무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하나님의 영역주권을 최우선으로 삼고 그들의 삶이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사는 카이퍼 목사를 개혁주의 성도들은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의 통로의 자세로 카이퍼 목사는 개혁주의 성도들을 가까이하고 이들을 계속적으로 인내함을 갖고 심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사슴이 귀를 기울이듯이 경청하며 끊임없이 들어주며 대화하는 가운데 카이퍼 스타일의 청중을 깨우는 개혁 설교의 확신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점점 개혁주의 성도들은 카이퍼 목사의 말씀에 녹아들어가며 그들의 세계관ㆍ 인생관ㆍ신앙관이 바뀌게 되었다. 특히 카이퍼 목사의 중후한 품성과 겸손으로 말미암아 장차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의 거목이 태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역할과 그 대표적인 영향을 준 여성도 발투스 (Pietronelia Baltus)를 만날 수가 있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마게도니아 환상에서 군대장관이 건너와서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고 빌립보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난 것과 오버래핑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카이퍼는 당대의 최고의 지성으로 자유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와 말씀 앞에 내려놓게 된다. 시골교회 베이스트에서 카이퍼는 진정으로 칼빈을 가슴으로 만나게 되었으니 칼빈의 좌우명인 하나님 앞에서 “즉각적으로 신실하게(promptly and sincerely)” 행함과 진실함으로 살기로 헌신하게 되었다.
베이스트 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그 옛날 칼빈이 죽은 지 300년이 훨씬 지났어도 칼빈이 쓴 라틴어 책을 읽고 그대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신앙은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영역 주권을 최우선으로 하고 살았다.

필자 임청화 교수의 ‘카이퍼의 발자취를 따라서’ 베이스트교회를 배경 삼아
당시 유럽의 신학교와 대도시 교회들은 한결같이 계몽주의, 합리주의, 현대신학으로 세속화 되었는데, 이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칼빈 신학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셈이다. 카이퍼는 칼빈의 영적 자녀들의 만남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드디어 카이퍼는 칼빈 가슴 속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카이퍼는 칼빈의 화란어ㆍ라틴어 ㆍ독일어ㆍ영어로 된 책들을 탐독하며 19세기 칼빈주의 부흥사로 다시 태어났고, 진리의 정수인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다윗의 5개의 물맷돌과 같이 영혼육에 지닌 복음의 전사로 되살아났다.
젊은 목사 카이퍼가 시골교회 베이스트에서 4년간 목회한 것은 그의 일생 일대의 변화의 기간이었고 영적으로 성숙 되어가는 시기였다. 카이퍼의 학자적 입지는 30세가 되기 전에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론 연구에 유기체적 교회의 개념으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생활 가운데 행동하는 교회라는 절대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
당시 라틴어는 유럽의 고급 언어요 공통 언어 였음으로 카이퍼는 화란을 뛰어넘는 대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카이퍼는 당대의 걸출한 칼빈주의 정치가였던 흐룬 반 프린스터(G.Groen Van Prinstetrer)의 기독교 정치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 카이퍼는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스포츠, 철학, 과학, 서비스, 교육 등 학문의 전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그의 생애 이른 시기에 이미 기독교 민주주의자가 되었다.
카이퍼는 베이스트 교회에 목회하는 중에서도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환경을 즐기는 삶이 아닌 방대한 독서와 연구생활, 서신교환, 각종 회의를 주제했으며 보통 새벽 두시까지 연구에 몰두하고 때로는 새벽 4시까지 거의 밤을 세우면서 공부했다.
베이스트에서 4년간의 목회기간에 카이퍼는 화란 국가 교회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목회자로 성장했고, 대 신학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카이퍼는 철저한 칼빈 신학자가 되었고 ,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왕되심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했으며 16세기 칼빈의 사상으로 돌아갔다.
그는 1867년 6월 우트레흐트(Utrecht) 중앙교회 담임 목회자로 청빙 받게 되었다. 우트레흐트 중앙교회의 첫 부임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 교회의 생활원리”(DE menschwording Gods; het levensbeginsel Der kerk)란 제목이었다. 그의 설교는 완벽한 칼빈주의자의 설교는 아니었지만 국가교회는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포문을 열었다.
카이퍼는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한다.그러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면 성령께서 계시하신 교회 건설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또 순수해야한다”
우트레흐트 교회의 정통 신앙을 가진 개혁주의 성도들은 카이퍼의 설교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어느 지교회에서 설교를 하던지 상관없이 사람들은 교회당을 가득 메워 그의 설교를 들었다. 이는 잠자던 화란 국교회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카이퍼의 목회철학은 어떤 목표와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 구성원의 그리스도안에서의 말씀에 기초하여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67년과 1868년에 노회와 총회에서 선거 열풍이 불었고 현대주의.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자들이 진을치고 있을 때 카이퍼는 제직회, 노회, 총회 등에서 중직을 맡을 인물들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로 과감히 물갈이를 했다.
1870년 2월12일 33세에 암스텔담 중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교인 수는 일만사천명으로 암스테르담 인구의 절반이 신자였다.
끊임없이 카이퍼는 교정가(敎政家)로서 현대주의ㆍ자유주의자들을 계몽하기 위해 《확신컨대》(Confidentie)란 책을 썼다. 카이퍼는 신학자 목회자 언론인이자 교회 개혁가로서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신앙의 진리에 대하여 분명히 갈파한 것이다.
대한민국 교회는 지금 어떠한가? 필자는 한국에서 정성구 박사님을 통해 카이퍼에 대해 좀 더 배우면서 네덜란드에 탐방을 와서 카이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진정한 기독교 국가의 기틀이 다시 세워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올해 10월27일 종교개혁주일에 한국교회는 광화문에 200만 성도가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사탄의 문화가 이미 깊이 들어와 교육이 붕괴되어 버렸다. 젊은이들이 마약에 쉽게 노출되어 향정신성 우울증을 앓고 있다.
인권이란 가면으로 동성애를 옹호하고 있다. 생명존중의 개념을 저버린 낙태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비혼주의로 인구절벽시대에 가정이 깨어지고 있다.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전교조 교육에 흡수되어 역사왜곡은 물론이요 반민주주의적 사고와 시장경제파탄과 파괴적인 사고는 국가의 존폐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네덜란드도 아브라함 카이퍼의 기독정신 개혁주의 신앙생활에서 멀어진 지 오래이고 심지어 아브라함 카이퍼를 모른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를 모른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일부 선지자적 마인드로 깨어있는 목사님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정신을 들고나와 부르짖고 영적회복 운동에 앞장서고 있으며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정신을 재조명하고있다.
유럽ㆍ미국ㆍ 이스라엘 모든 선진국가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성경에 반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차악을 선택하며 사는 악의 축과 같이 돌아가고 있는 이 시기에 대한민국의 하나님의 종 깨어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뭉치고 있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제2의 종교개혁운동이며 이를 바라보는 성도들의 시각은 긍정적이다.
대한민국이여!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살 수 있다.
대한민국이여! 자국민을 깨우며 세계를 기독교 정신으로 깨우는 빛의 사자들로 거듭나야 살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교회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제2, 제3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서로사랑을 실천하는 K-기독교인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응원한다.
필자소개 : 임청화 교수 현재 백석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2000. 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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