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5월의 조미수교 관계는 은둔의 나라였고 중국 대륙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이 이제는 세계 열방 중에 한 자주국으로 변신함으로 한국 외교사의 거보를 내디딘 역사였다.
[시사리뷰] 조선 선교의 싹을 틔우다 » 한미수교 140여년 근대문명사 리뷰 시리즈 2회 » 글 강석진 목사 » 미국은 동북 아시아에 마지막으로 남은 미수교국이었던 조선과 수교와 통상을 하게 됨으로 그 나름대로 기대가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새로운 대제국같은 서양의 대국과 국교 관계를 갖었다는 점에 크게 고무되었고 기대가 매우 높았다.
이에 대한 여러 이유로는 조선은 중국과는 오랫동안 군신 관계로 사실상 속방에 불과하여 지나친 조공과 내정 간섭으로 왕권을 갖은 국가로서의 위상이 결여되어 왔었고 일본과는 1876년 강화조약으로 일본의 국력이 날로 조선에 미치는 영향이 커갔기에 새로운 상전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뿐 아니라 새롭게 동방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제정 러시아제국의 남하 정책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조선으로서는 새로운 강국으로서 조선과 우방이 되어 이들 나라들을 견제해 줄 수 있는 대국이 절실한 상황 중에 미국과 수교하게 됨으로 왕실은 조선의 국운을 새롭게 변화시켜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은 조선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수교 이후에 적극성은 별로 보이질 않았다. 미국 정부는 조.미 조약문이 상정되었지만 1883년 5월에 가서야 비준이 교환되었다. 이로서 1883년 5월 16일에 미국 제 1대 전권공사인 푸트(Lucius Harwood Foot)는 성조기를 앞세우고 입경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12년 전인 1871년 신미양요 때에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던 미해군 장교였다. 그의 부친은 목사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서양에서 온 큰 관리였기에 이에 걸맞게 예의를 갖추어서 외무독판 민영목(閔泳穆,1826~1884)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푸트를 환영하였다.
조선에서 이같이 환대한 이유는 수교 당시에 동등한 국가로서 조선을 외교적 예우를 정성껏 해주었기에 이에 고무되었던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 19일에 수교 비준 교환이 있었는데, 이때에 고종은 매우 고무되어있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신뢰와 친근이 돈독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놀랍게도 푸트공사의 직함이 일본이나 청국에 있는 미국 외교관과 직급상에서 동등하였다는 사실에 파격적인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푸트 공사도 본국에 보고하기를 <지금 이들(조선)은 우리나라(미국)에 대하여 그야말로 최상의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푸트가 비준 교환을 하고 나서 바로 다음날 곧 5월 20일, 고종은 민비와 함께 푸트를 영접하였다. 이는 서양 공사의 국왕 접견이 역사상 최초이었으며 또 비준서 교환 하룻만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왕비와 동석 그리고 궁중에서 수 차례의 만찬연회가 있었다. 고종은 고무된 그 심정을 미국 아서(C.A.Arthur,1829-1886)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렇게 미국 공사를 칭찬하는 문서를 보내었다.
“우리와는 아주 놀랄 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는 정직하고 의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성에서의 일을 수행함에 그는 언제나 우리 조정과 협력 관계를 훌륭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조정에서는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푸트의 제안과 충고가 도움이 되었기에 그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과거 청국이나 일본의 공사들은 매우 고압적이며 조선을 무시하는 그런 상관 관계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조정은 푸트의 입성이 청국의 400여 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계기로 보았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조정은 맨 처음 군사 고문관의 파견을 미국에 요청하였다. 그 이후는 육영공원을 설립하여 미국의 교사가 조선의 고관과 그 자녀들에게 영어와 세계역사 등을 가르치도록 미국 정부에 요청을 하였다. 푸트는 고종의 조언자로서 조선의 고위 관리들이 미국의 산업과 공공기관을 방문하고 대통령을 알현하도록 설득하여 보빙사절단을 파견케 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조선이 근대문명 시설을 하도록 다방면에 힘을 썼었다.
한편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에서 기대 이하의 실적을 거두자 1884년 7월 미국 정부는 푸트를 전권공사를 변리공사겸 총영사로 강등시켰다. 이에 그는 반발하여 사임을 결심하나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영국총영사와 청군과 일본군의 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일본에 건너가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그는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푸트는 한국 교회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기여를 하였는데, 그의 역할은 한국교회사에서 최초의 미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알렌(Horase Newtown Allen, 1858~1932) 의사 선교사가 1884년 9월에 조선으로 들어와 발을 디딜 수 있도록 그를 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초청한 것이었다. 이로서 사실상 조선의 선교가 싹을 티울 수 있게 되었다. 그후 1885년 4월 5일에 이어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스크렌턴과 제임스 홀 선교사가 입경함으로 조선의 선교가 본격화 된다. 푸트 공사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라진 것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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