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니케아에서 안디옥까지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열었지만, 다른 욕심과 동 로마 제국과의 불신은 나중에 십자군 국가들 의 내부 분열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결국 안디옥의 함락은 단순한 도시의 점령이 아니라, 제1차 십자군의 본질인 신앙과 그리고 군사 운동을 드러내는 역사적 시험의 무대였다. 그리고 십자군 제후들의 본 마음이 들어나는 순간이자, 동시에...

[미션저널] 십자군, 니케아에서 안디옥까지 » 선교의 관점으로 읽는 십자군 이야기(19) »

십자군 정규 부대와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던 니케아에는 오늘도 큰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저 있다. 필자는 한국의 모 신학교에서 졸업여행과 현장학습의 강의를 부탁받아 몇 번 진행한 적이 있다. 그 때마다 다른 곳은 몰라도 필자는 니케아를 꼭 들려야 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니케아 공의회와 1차 십자군의 첫 번째 전투 현장이어서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풍경 또한 어느 지역보다도 좋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십자군 당시에는 스카니아스 호수(Lake Askania)불리던 이 호수는 오늘은 이즈닉 호수(Lake İznik)이다. 저녁놀이 질 즈음 이 호수를 지날 때면 역사가 떠오르지만 호수에 지는 노을은 마음을 울적하게 할만 큼 로맨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즈닉 고대도시 니케아 마므마와 호수 경관

십자군, 니케아포위전

1097년 5월 초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of Bouillon)의 군대는 제일 먼저 소아시아의 니케아(Nicaea) 성벽 앞에 도달했다. 니케아는 셀주크 투르크의 룸 술탄국(Sultanate of Rûm)의 중요한 요새였다. 동로마 제국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도시였다. 십자군의 다른 부대들인 보에몽, 레몽, 탱크레드 등의 부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로베르 2세(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노르망디 공작), 에티엔 드 블루아 등이 뒤늦게 포위군에 합류하였다. 이들 부대들은 공성 장비들이 없었기 때문에 성을 포위하는 장기전에 돌입 할 수밖에 없었다.

룸 술탄국은 니케아를 중심으로 서부 아나톨리아를 장악했다. 당시 아나톨리아의 중부·동부 지역에서는 급성장한 다니슈멘드 왕조(Danişmendliler)가 세바스테이아(Σεβάστεια),카이세리(Καισάρεια)일대를 차지했다. 룸 술탄 국 역시 셀축 튀르크 계였지만 서로 경쟁자였다. 영토와 영향권을 놓고 끊임없이 충돌 중이었다.

제1차 십자군이 소아시아로 진입하기 직전, 술탄 킬리크 아르슬란(Sultan Kilik Arslan)은 십자군을 과소평가했다. 이미 전 십자군의 부대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음에도 그의 부대는 동부로 이동시켜 다니슈멘드와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마치 무주공산 격으로 십자군이 니케아에 집결했을 때는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술탄 아르슬란이 기병대를 투입하여 포위를 뚫으려고 했지만 십자군의 방어진은 더욱 견고했다.
성은 포위되어 고립되었지만 호수를 통해서 식량과 전투 물자는 공급되었다. 참으로 장기전이었다.

니케아에서 아나톨리아까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을 아나톨리아 전장으로 끌어들이면서도, 니케아가 십자군들에게 약탈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해군제독 마누일 부투미티스(Manuel Boutoumites)가 선박을 육로로 끌어와 호수에 투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제국의 함선과 병력을 호수로 이동시켜 적의 보급로를 완전하게 차단했다. 이 작전은 니케아성이 완전히 고립되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튀르크의 수비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동 로마제국과 비밀 협상을 벌인다. 성을 포위한 십자군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에 항복한 것이다. 십자군 병사들은 첫 전투의 승리와 전리품을 기대했지만 성문은 닫힌 채, 자신들의 깃발이 아닌 동 로마제국의 깃발이 성 망루에 걸렸다. 이는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간의 첫 불신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 우리 속담에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그렇잖아도 붕신 서약으로 불만에 가득한 십자군의 제후들은 동로마 제국과 더욱 불신에 쌓았다.

니케아의 함락 이후, 십자군과 동 로마 제국의 연합군은 1097년 6월 26일 새로운 목표를 향해 출정하였다.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니케아 근교 펠레카논(Πελεκάνον)에서 십자군 대표단을 맞이하며 각 지도자에게 다시금 충성 맹세를 다시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제후들은 형식적으로 이에 동의했으나, 보에몽과 레몽, 그리고 특히 탕크레드는 끝까지 주저했다. 이것은 훗날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의 불화가 본격화되는 예고편이었다.

니케아의 항복은 알렉시오스 황제의 외교적으로 대단한 승리였다. 무력으로 도시를 파괴하지 않고 협상으로 회수함으로써 제국은 옛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약탈과 전리품 취득기회를 빼앗긴 십자군은 불만을 품었고, 자신들을 이용 했다는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케아는 전략적 교두보였고, 이곳을 기반으로 십자군은 본격적으로 아나톨리아 내륙 원정을 시작하였다.

그해 7월 1일, 아나톨리아 서부 도릴라이움(Δορύλαιο)평원에서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결전을 준비했다. 그는 니케아에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훨씬 더 큰 병력을 끌어 모았다. 셀주크 투르크뿐 아니라 그가 싸웠던 다니슈멘드 투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이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자 소수 부족의 군대까지 합류시켰다. 그가 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모은 것이었다. 아르슬란 1세의 전략은 간단했다. 십자군을 아나톨리아 내륙 깊이 끌어들인 후, 기동력을 갖춘 기병대로 포위한 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전투 초반, 보에몽과 탕크레드의 선발대는 투르크 군에 포위를 당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십자군의 주력부대인 고드프루아, 레몽, 아데마르, 로베르 등이 이끄는 병력이 도착하면서 십자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예전 로마군들이 주로 사용한 밀집방진으로 셀주크 기병의 파상 공격을 견뎌내었다. 그리고 적의 전력 양측에 숨겨놓은 파괴력을 가진 중기 병을 출전시켰다. 중기 병의 돌격은 아르슬란의 연합군전열을 무너뜨렸다. 전투는 투르크의 전멸에 가까운 십자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상대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위신은 회복 불능으로 떨어졌다.

 

이 승리를 통해 십자군은 단순한 약탈의 무리가 아닌 정규 군사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사실상 영향력을 상실했다. 반대로 비잔틴 제국은 도릴라이움을 점령해 서부 아나톨리아 회복을 본격화했을 뿐 아니라, 알렉시오스 황제는 십자군의 힘을 빌려서 옛 영토를 수복의 꿈을 착실히 실현해 나갔다.

니케아 함락은 첫 목표 달성이자 동로마제국의 외교적 승리였다. 그리고 도릴라이움 승리는 셀주크 기병을 정면에서 꺾은 군사적 전환점이었다. 이어진 이고니온(Ικόνιο)과 헤라클레아(Ηράκλεια)에서의 연승으로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정복한 십자군은 이제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 같은 승리의 뒤편에는 금이 간 차 유리처럼 균열이 도사리고 있었다. 알렉시오스의 치밀한 외교 전략은 제국의 영토 회복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십자군 내부에서는 우리를 이용 한다는 불평과 불만은 쌓여져 갔다. 1097년 여름의 승리들은 단순한 군사적 성취가 아니라, 훗날 십자군과 동 로마제국 사이의 갈등을 불러올 씨앗을 심은 사건이기도 했다.

아나톨리아 서부 도릴라이움(Δορύλαιο)평원 전투 승리 후 십자군은 이제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십자군의 중부 아나톨리아 점령

도릴라이움에서의 승리 이후, 십자군은 더욱 아나톨리아 깊숙이 진격했다. 한 달 후 그들은 룸 술탄국의 주요 도시인 이고니움 오늘의 콘야(Konya)에 도달했다. 하지만 의욕을 잃은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미 병력과 주민을 철수시키고 도시를 비워둔 상태였다. 십자군은 도시를 약탈해 식량과 보급을 확보했다. 이 사건은 룸 술탄국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술탄이 의도한 초토화 전략은 십자군을 지치게 만들려 했지만, 십자군들에게는 더욱 전의를 부추기는 동기가 되었다. 나아가 룸 술탄국은 자신들의 수도를 그대로 내어놓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십자군은 행군 도중 헤라클레아에서 다니슈멘드 투르크의 저항을 만났다. 다니슈멘드는 도릴라이움 패전 이후 독자적으로 저항을 시도했지만, 십자군의 재차 승리 앞에 무너졌다. 이로써 중앙아나톨리아의 군사적 저항은 사실상 소멸하였다. 십자군은 카파도키아(Καππαδοκία)와 타우루스(Ταύρος)산맥 너머 시리아로 향할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

9월로 접어들면서 십자군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병력의 규모가 크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각 지휘관들은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9월 14일, 탕크레드와 보두앵은 영지와 식량 확보를 명분으로 본대에서 이탈해 킬리키아(Κιλικία)로 진출했다. 그들의 명분은 보급과 영토 확보였지만, 내면에는 이미 서로 다른 길을 걷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탕크레드는 9월 21일 타르수스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튿날 수적으로 우세한 보두앵이 도착해 탕크레드에게 항복을 받아내며 도시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탕크레드는 분노 속에 동부 방향으로 이동하여 마미스트라(Μαμίστρα)를 장악했다. 보두앵 역시 그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탕크레드측의 기사들이 보두앵에게 타르수스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했으나, 결국 양측은 화해했다. 이 사건은 십자군 내부의 갈등이 얼마나 쉽게 폭발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각 지도자들이 십자군 전체의 목표보다 개인의 영토 확보를 우선시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분열과 협력 그리고 보두앵의 행보

십자군 내부의 이런 경쟁은 단순한 사소한 갈등이 아니었다. 각 제후들은 원정 과정에서 자신만의 영토 기반을 찾고자 했고, 이는 곧 십자군 원정이 정복 전쟁과 봉건적 분할 통치의 성격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킬리키아 지역은 전략적으로 안디옥으로 향하는 길목이자, 지중해와 연결되는 보급로였기 때문에 더 큰 관심을 끌었다.

10월, 비잔틴 함대는 시리아 해안 도시 라타키아(Λατάκια)를 수복했다. 이는 알렉시오스 황제가 십자군의 진격을 외교적·군사적 기회로 삼아 옛 제국의 영토를 되찾아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탕크레드와 보두앵은 마라쉬(Μαράς)에서 본대와 다시 합류했고, 십자군은 안디옥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의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10월 15일, 아르메니아인들의 요청을 받은 보두앵은 본대를 떠나 약 100명의 기사를 이끌고 에데사로 향했다. 그의 선택은 단순한 분견 작전이 아니었다. 보두앵은 아르메니아 영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토를 구축하고자 했고, 이는 곧 십자군 최초의 국가, 에데사 백국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이 많은 아르메니아인인 영주 토로스(Thoros of Edessa)는 십자군의 군사적 힘을 빌리기 위해 보두앵을 자신의 양자(adopted son)로 삼았다. 당시 아르메니아에서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옛 신하로서, 라틴 십자군과 관계를 곱게 보지 않았던 아르메니아사람들에 의해 토로스가 살해되자 보두앵은 토로스의 죽음을 계기로 에데사의 지배자가 되었고, 곧 에데사 백국(County of Edessa)을 세웠다. 이 시점에서 십자군 원정은 단순한 예루살렘 탈환 성지 회복을 넘어, 각 지도자들의 영지를 취득하려는 봉건적 야망이 실현되는 무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1097년 가을, 제1차 십자군은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 마침내 시리아 북부에 도달했다.

안디옥, 예루살렘의 관문(Gateways)

1097년 가을, 제1차 십자군은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 마침내 시리아 북부에 도달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도시는 오론테스 강변의 거대한 요새, 안디옥이었다. 안디옥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옛 부터 동서 교역의 중심지이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안디옥을 함락하지 않고서는 예루살렘으로 나가는 길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십자군들은 사도바울을 파송한 성경속의 안디옥을 결코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안디옥을 포위한다는 것은 원정군인 십자군에게도 또 다른 차원의 시련이었다.

1097년 10월 16일, 안디옥의 성주인 야기시얀(Yagishyan)은 성 안의 기독교인들을 내쫓으며 외부 십자군의 관계와 내부에서 배신을 사전에 차단했다. 며칠 뒤, 십자군은 철의 다리를 건너 도시를 포위했다.

오론테스(Orontes)강, 오늘날 아시 강(Asi Nehri)과 접해 있었다. 도시 북쪽 성문에서 강을 가로지르는 큰 돌다리가 있었다, 다리에 철제 장식과 방어 시설이 설치되어 있기에 철의 다리라 불렀다. 이 다리를 건너야만 도시로 진입하기에 안디옥의 관문 같은 곳이다. 성벽은 높고 강했으며, 도시내부에는 충분한 식량이 있었다. 반면 성 밖의 십자군은 긴 원정으로 이미 지쳐 있었고, 보급은 불안정했다.

그러나 늦가을 제노바 함대가 오론테스 강 하구에 도착해 일부 지원을 제공했지만, 겨울이 다가오면서 식량난은 심화되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십자군은 생존을 위해 시리아 북부를 약탈한다. 삼일 후, 보에몽과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가 식량 확보를 위해 출정한 사이, 안디옥 수비대가 기습하여 십자군 진영을 습격했다. 숫적으로 십자군은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십자군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간신히 포위를 유지했다. 시간이 갈수록 십자군에게 피로와 절망, 그리고 균열을 낳는 계절이었다.

1098년이 되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1098년 1월, 십자군 내부에서 탈출 시도자들이 생겨나면서, 병사들의 동요가 일어났다. 2월에는 동로마 제국의 사령관인 타티키오스는 십자군을 감시하고, 동시에 제국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 파견한 인물이다. 연락 사령관인 타티키오스(Τατίκιος)를 십자군들이 암살한다는 소식에 그는 키프러스로 철수하자,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나마 지원하던 모든 것을 중지한다. 이 사건은 십자군 제후들과 동로마 제국사이에 더욱 골이 깊어진다. 그해 3월, 십자군은 장기 포위를 위해 라 마호메이레(La Mahomerie)성채를 세우며 봉쇄망을 강화한다. 하지만 성벽은 여전히 굳건했다.

안디옥과 사도 안드레아

안디옥 포위는 7개월을 넘어섰다.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십자군은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이때 보에몽은 성내 아르메니아 출신 장교 피르즈(Firuz)와 접촉했다. 피르즈는 원래 성의 탑 중 하나를 지키는 무슬림 군대 소속 장교였다. 그러나 투르크 지배자들과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보에몽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성의 한쪽 탑을 십자군에게 열어주었고, 이를 통해 십자군이 성벽을 돌파해 들어올 수 있었다. 십자군은 성벽과 문을 통해 진입했고, 안디옥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성주 야기시얀은 붙잡혀 살해되었다. 그러나 승리는 불완전했다.

안디옥성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성벽처럼 외벽과 내벽으로 구성된 강력한 성벽이었다. 내부의 성벽(citadel)은 안디옥의 북쪽 실피우스 산(Mount Silpius)의 높은 지점에 따로 구축된 요새에는 여전히 수비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안디옥의 함락 직후 모술의 무슬림 지휘관 아타베크 카라부가(Atabek Karabuga)가 대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이번에는 십자군이 성 안에서 포위된 처지가 되었다. 식량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다. 탈영병들이 속출했고, 절망감은 극에 달했다.

극적인 전환점이 도래 되었다. 십자군에 참전한 평민 성직자 피에르 바르톨로메오(Pierre Barthélémy)가 이렇게 말한다. ‘사도 안드레아스(Απόστολος Ανδρέας)가 나타나서 계시를 주었는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렸던 ‘성창(Holy Lance)’이 안티오크 대성당 지하에 묻혀 있다는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안드레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의 형제이며 제자이다. 동방 교회 즉 동 로마제국에서는 특히 안드레아스를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의 창립자로 여긴다. 로마 가톨릭의 베드로에 맞서는 사도의 권위로 내세우는 인물이다. 십자군이 성지회복을 위해가는 길에서 서방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 모두의 정통성을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안드레아스의 이름은 종교적 무게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스가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믿어진다.

십자군이 포위한 안디옥(Antioch)은 이미 사도 바울, 베드로, 그리고 안드레아스의 전승과 연결된 초대 기독교의 성지였다. 이 같은 안디옥에서 안드레아스가 나타났다는 피에르 바르톨로메오의 주장은, 군사적으로나 정신적인 위기를 맞은 십자군에게 엄청난 신뢰감을 줄 수 있었다.

피에르 바르톨로메오가 사도 안드레아스가 계시했다고 말한 순간, 그의 발견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사도의 보증이 붙은 기적이 되었다. 십자군 병사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사기 저하 속에서도 우리는 사도 안드레아스가 선택한 군대라는 확신을 얻었다. 결국 무슬림 포위군을 돌파해 승리할 수 있었다.

사도 안드레아스는 십자군의 사기 고양에 있어 중재자로 인식되었다. 다만, 서방교회 일부에서는 정말 사도의 계시였을까, 아니면 바르톨로메오의 조작이었을까? 라는 의심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십자군이 스스로를 신의 선택을 받은 군대라 믿게 만든 전환점이 되었다. 사도 안드레아스는 십자군의 위기 순간에 등장한 사도의 권위였고, 그의 이름을 통한 계시는 안디옥 전투의 결과를 바꿀 정도로 강력한 심리적 무기였다.

숫적으로 부족했던 십자군은 방어에서 이제는 성문을 열고 목숨을 건 전투에 임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십자군의 종교적 열정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카라부가의 연합군은 분열과 지휘 불일치로 무너졌다. 전투는 십자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카라부가는 퇴각했다.

보에몽드 1세 (Bohemond of Taranto)는 안디옥 공방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 하면서 그 보상으로 안디옥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레몽 4세 (Raymond IV of Toulouse)는 안디옥을 개인 영지로 삼기보다는, 동 로마제국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맹약에 따라, 비잔틴 땅을 되찾아 돌려주기로 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십자군 지휘부는 안디옥 성의 대성당에서 회의를 열고회의를 했지만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고, 지휘부가 분열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성창, 성화 그림

십자군, 니케아에서 안디옥까지(에필로그)

니케아에서 안디옥까지인 1097년 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제1차 십자군 행군은 그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내주었다. 니케아와 도릴라이움에서의 승리는 십자군이 단순한 종교적 열정에 기반한 군중이 아니라, 서방의 군사적 역량을 결집한 조직적 원정군임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콘야와 헤라클레아를 거쳐 아나톨리아 종단에 성공한 것은 이들의 행군이 단순한 약탈이나 방랑이 아니라, 전략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군사적 작전이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성과와는 별개로 킬리키아에서 드러난 보두앵과 탕크레드의 갈등, 그리고 보두앵의 독자적인 에데사 진출은 십자군이 하나의 신앙의 공동체가 아니라, 봉건 제후들의 이해관계와 권력과 욕망이 교차하는 연합단체임을 나타냈다.

특히 보두앵의 에데사 점령은 십자군 최초의 독립적 영토 국가를 탄생시킴으로써, 원정 자체가 예루살렘을 향한 성지회복이 아니라 야만적인 정복욕을 드려낸 것이 가장 두드러진 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강한 불신으로 변해갔다. 니케아 함락 이후 약속된 영토 반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안디옥을 둘러싼 보에몽의 전횡은 십자군 제후들이 동 로마제국과의 동맹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한 것을 극명히 나타내었다. 십자군 제후들이 자신들의 영토형성과정에서 나타난 힘의 정치문화는 지배적인 구조로 자리를 잡았다.

안디옥의 포위전은 제1차 십자군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8개월에 걸친 장기 포위, 여러 차례의 무슬림 구원병들을 격퇴 했다. 진퇴양란의 포위 상황에서의 대역전은 그들의 믿음이 단순한 군사적 행군이 아니라 신앙, 생존, 야망, 불신이 교차하는 거대한 드라마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안디옥 함락 이후 보에몽은 도시를 장악하고, 보두앵은 에데사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는 승리와 함께 영지획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공동 목표였던 성지회복은 공허한 목표처럼 보였다. 근본적인 분열이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열었지만, 다른 욕심과 동 로마 제국과의 불신은 나중에 십자군 국가들 의 내부분열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결국 안디옥의 함락은 단순한 도시의 점령이 아니라, 제1차 십자군의 본질인 신앙과 그리고 군사운동을 드러내는 역사적 시험의 무대였다. 그리고 십자군 제후들의 본 마음이 들어나는 순간이자, 동시에 십자군 운동이 정의로 시작했을 까? 하는 회의를 품는 시간이기도 했다.

표지사진: 아나톨리아 내륙의 카파토기아 전경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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