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개신교는 이신칭의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2024년 10월의 마지막 주, 종교개혁주간을 맞이한 한국 개신교는 깊은 성찰에 잠겨야 할 때다. 507여 년 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며 촉발시킨 종교개혁은 단순한 교회 개혁 운동을 넘어 서구 사회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변혁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오늘날 한국에서도 늘 동일한 질문이 팽배한 데, 그 질문은 “프로테스탄트의 후예들은 과연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일까?”이다.


[유크시론] 우리 한국 개신교는 이신칭의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 이창배 발행인 » 필자는 소위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독일에서 22년 동안 한국교회 파송 선교사로 사역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불과 4년 전, 필자가 나이들어 고국 땅으로 돌아온 지금, 안타깝게도 한국 개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망각한 채, 물질주의와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 침체의 늪에 빠진 모습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 곳곳을 다녀보면서 정말로 깜짝 놀라곤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해 보곤 한다. 왠 교회당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또는 웅장하던지, 독일에서는 늘 오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낸 체 거무죽죽한 모습, 이끼 끼고, 녹이슬고, 돌벽엔 연기에 그슬린 듯한 쇠락한 모습의 예배당을 익숙하게 보아왔었다. 그런 옛스런 교회당의 모습을 역사와 전통이라는 시선으로 항상 당연시 하던 필자로서는, 한국 교회당을 방문할라치면 왠지 주눅이 들곤 한다. 이 깨끗하고 으리으리한 공간에 발을 내딛는 게 여간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단 느낌이 들어서 나를 더욱 움츠려들게 한다.

정말 한국교회는 예배당 건축에 진심이라서일까? 주위를 둘러보아도 세속적인 건물과 비교가 될 정도의 규모와 그 장식을 자랑한다. 어느 땐 이러한 현대식 건축물 안에서 사역하는 교역자들이 문득 부럽단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기도 한다. 언젠가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대리석으로 둘러쌓인 교회 내부의 공간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테마의 미술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정말로 내 머리속으로는 수많은 상념이 오갔던 적이 있다. 작가가 고심해가며 만들었을 미술작품에 담겨있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과 광대무비한 웅장함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을 상징하는 공간, 최첨단의 장비와 시설로 눈부신 교회당 내부 공간에서 왠지 어울리지 못하는, 아니 너무 왜소하게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우연이라도 어떤 공식적인 자리에서 필자가 만나게 되는 소위 잘 나간다는 부류에 속한 어떤 목회자들은 영적 지도자라기보다는 기업 CEO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쌀을 지푸렸던 기억이 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까만색 큼지막한 세단은 일종의 성공과 부의 상징이다. 부끄럽지만, 필자의 신학 동문들 가운데도 이러한 목회자가 있다. 그럴만한 자격을 운운하는 동문과의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이렇게 목회자들의 만남에도 급이 정해져 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서로 어울릴만한 그룹끼리 편가름을 하고, 모이는 무리의 수준을 놓고, 참석할 자리인가 아닌가를 판단한다 하니 이러한 현실은 내게 있어선 완전 별세계와 다름이 없다.

성공한 목회자와 그렇지 못한 목회자, 목회에 성공이란 말이 과연 되기나 한 말일지 아닐지는 뒤로 놓고서라도 비교감과 상실감과 자격지심이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항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듯한 현실을 종종 필자는 접하게 된다. 물론 이는 필자의 단순한 개인적 경험이랄 수 있다. 나의 이 경험만으로 한국 개신교가 어떠니 저떠니 하는 일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가득한 비분강개함은 적어도 개신교도에게 있어서만큼은 있어야할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렸음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이신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루터의 핵심 교리다. 루터에게 있던 믿음은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 즉 믿음은 삶의 변화와 사회적 책임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서 간과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도덕적 해이와 사회적 무관심에 빠졌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10월 27일 광화문에서 한국교회가 연합해 주도한 200만 반 동성애 집회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서, 서울 용산에서 시청앞, 광화문 사거리를 인파로 북적거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여의도 또한 그랬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대규모의 군중이 동원된 행사에 대해 대한민국 언론은 침묵했다. 아니 외면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태도를 나타냈다. 왜? 대한민국 개신교가 나서서 모처럼 전국적인 행사를 가졌음에도 기성 사회 언론이 이를 애써 무시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그렇다고 세상의 여론이 모두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그들을 옹호하는 분위기도 아닐텐 데 말이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는 한국 개신교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이단사이비 교주 JMS 정명석 사건은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었으며, 그들 내부의 성폭력 문제, 재정 비리 등은 그들의 도덕적 타락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세상 사람들은 JMS 정명석 사이비 종교의 문제를 ‘값싼 은혜’에 안주하며 사회적 책임을 외면해 온 한국 교회의 현실 가운데 일부분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크게 대두되는 각종 이단의 발흥과 이단의 공격적인 포교활동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음을 보게 된다. 이따금 동네 큰길 어귀에는 삼삼오오 짝을 지은 무리가 나타나서 오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천지 포교활동을 벌이는 모습이 내 눈에 띤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에 나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너무 당당하기까지 한 그들의 자신감은 도데체 어디에서 나온걸까? 이러한 생각이 종종 나를 사로잡곤 한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암중에 활동을 하던 무리이다. 남에게 들킬까봐 몰래 숨어서 은밀하게 사람을 포섭하고, 교회내부에 침투해 지신의 신분을 감추고 활동을 이어가던 무리들인데, 이제는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고, 만만한 대상을 만나게 되면, 커피를 대접해가면서 정답게 다가서고, 대화를 유도할 정도이다. 오히려 목회자인 나는 스스로, 되도록 나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비하면, 이것은 세상이 뒤바뀐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세상의 반응은 이들에 대해서 어쩌면 관용적이다. 아무런 저항감이나 반발없이 그들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분위기를 느끼게 되니 오히려 나 자신이 놀라울 정도다.

이러한 사회적 양태는 분명 문제의식을 가져야할 당위성이 있다. 버젓이 이들이 무리를 지어 지상포교활동을 하는 장소에서 불과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는 멋진 카페를 열어놓은 교회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40-50대 아줌마로 이뤄진 30여명이 사거리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이 교회 여선교회가 사람들 전도하는 것으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는 게 도무지 내겐 믿겨지지 않았다.

필자는 이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염려스럽다. 아니, 나는 왜 용기가 없을까 싶다. 그만큼 우리에게 모태가 되는 한국교회의 위상이 떨어질만큼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 개인 성도들의 삶의 무게도 지탱하기 어려울텐 데, 그들이 교회를 다닌다는 게 부담스럽고 짐스럽다는 말이 내게도 들려올 정도이다. 그래서 흔하게 대두되는 단어가 바로  가나안성도(거꾸로 하면 안나가)이다.

이제는 더 이상의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다면, 당면한 한국교회의 실추된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나부터 시작해야 할 때이다. 한국 개신교가 이신칭의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나 형식적인 의례가 아니다. 믿음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실천적인 행위이며, 사회적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 한국 개신교는 이신칭의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며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을 촉구한다.

첫째, 성장제일주의를 버리고 영적 성숙을 추구하십시오.
교회는 양적 성장에 집착하는 대신, 신도들의 영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돕는 데 집중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설교를 통해 성도들의 청지기적 신앙심을 고취하고, 삶의 문제에 대한 지혜와 용기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소그룹 활동, 성경 공부, 봉사활동 등을 통해 성도들이 이웃과 서로 소통하며, 교제하고,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둘째,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정의로운 사회 구현에 앞장서십시오.
교회는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 불의와 부정에 맞서 싸우고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탈북민 지현아 작가가 증언하는 북한의 기독교 박해 실태는 한국 교회가 당면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영역을 보여주는 사례다.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고, 환경 문제, 인권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특정 정치 세력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셋째, 교회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을 이루십시오.
교파 간의 차이를 존중하고, 교회와 교회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큰 교회 작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며, 목회자의 귀족의식을 내려놓고, 형제와 자매로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써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력 다툼을 멈추고,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투명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하여 성도들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넷째, 사이비 종파와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십시오.
사이비 종파는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고 성도들을 현혹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 ‘나는 신이다’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드러난 JMS 측의 방해와 제작팀 내부 스파이 의혹은 사이비 종파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교회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사이비 종파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하고, 신도들을 보호해야 한다. 또한 사이비 종파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사회적인 감시와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다섯째, 10·29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과 소통을 강화하십시오.
교회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실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젊은 세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전환시대에 걸맞는 AI 인공지능을 활용하여서, MZ 세대에 맞춤식 신앙교육을 개발하고, 저출산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젊은이와의 다각적인 소통방식을 창의적으로 구축하도록 힘써야 한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점화된 종교개혁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또한 독일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의 연합과 유럽교회 각 종파와의 연합으로 유의미해진 구시대적인 개혁운동으로 잊혀져서도 안 된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스스로 다시 한번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신칭의의 참된 의미를 되찾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회복해야 한다. 그럴 때 한국 개신교는 사회의 존경을 받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며, 영적인 리디십을 회복해 AI 인공지능 시대를 선도해 갈 윤리 기준을 마련해갈 수 있지 않겠는가! 금년에 맞이한 종교개혁일을 보내며, 조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청지기로써의 자각과 소명을 다시금 되돌아 보게 된다. (昶)

글 이창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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