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 1차대전이 끝나기 대략 1년 전인 1918년 1월 미 의회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영토적 야심이 없는 해양 무역 국가인 미국이 식민지 종주국 중심으로 구축 되어왔던 경제블럭을 해체하고 평등주의에 입각한 국제통상을 확대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자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를 위한 명분으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제시된 것이다.
[시사리뷰] 3.1독립만세운동 촉발점 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 한미수교 140여년 근대문명사 리뷰 시리즈 14회 » 글 강석진 목사 » 이에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약소 피지배 민족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러나 그 당시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오히려 패전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민족자결을 구현하는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했다. 즉 ‘국제연맹을 구성하여 식민지 되었던 나라들을 한시적으로 위임통치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3.1만세운동
윌슨은 1차대전의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의 영토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역을 국제연맹이나 다른 나라들에게 맡겨서 한시적으로 통치한 후에 독립시키자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었고, 그의 구상은 식민통치 국가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이 당시에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이 중심이 된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구상은 결국 일부만 수용되었다. 우선은 ‘국제연맹’이라는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기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 다음은 위임통치 대상 지역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리해서 다루기로 했다.
예를 들어 터키(오스만제국)에서 분립되는 이라크, 팔레스타인, 요르단은 영국이, 시리아, 레바논은 프랑스가 각각 후원국이 되어 위임통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한편 패전국인 독일의 해외 식민지는 승전국들의 식민지로 재분할되었다. 또한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에는 5개 독립 국가 즉,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가 들어섰다. 이같이 1차대전 후에 다시금 재편되는 국제 질서 속에 국제연맹에 의한 약소국들의 위임통치는 기존 식민 지배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속박을 받는 것이기에 이들 나라들은 환영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미주지역의 독립인사들인 이승만, 민찬호, 서재필, 정한경은 필라델피아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때에 이승만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파리에서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준비하자고 제의하여 마침내 이 당시에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안창호의 동의를 얻어 1919년 2월 25일에 청원서에 서명하고 3월 3일에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제출했다. 그 내용은 “장차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도록 해달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윌슨은 이 위임통치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회부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만큼 그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국에 대한 존재감이 미국에는 없었던 것이었고 또한 그때 미국과 일본과는 외교나 통상적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였기에 일본의 조선 지배를 거슬릴 수 없었다. 이처럼 나라를 이미 빼앗긴 상태에서 국제 무대에서는 강대국들간의 유불리에 따라 차별되고 무시되는 사례는 통상적이었다.
국내에서도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 대해 신채호 등 이승만을 반대하는 인사들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라고 조롱하며 공격하였다.
이처럼 국내의 독립운동 인사들과 해외 인사들 간에는 갈등의 간극이 있었다. 국내의 독립인사들은 국제적인 환경과 국제간의 거래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였기에 서로 간 이해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미주의 이승만과 안창호, 서재필 등은 강압적인 일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통치가 실현되면 상대적으로 훨씬 유리하다고 여겼고 잠정적 통치를 끝내면 바로 독립이 주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판단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독립은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과의 지배적 환경이 서로 충돌되는 판세였기에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미주의 이승만 같은 인사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과신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인들에게 실효적으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당시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사상과 국제적인 호소는 세계의 약소민족들과 피지배 국가들과 한국인에게도 큰 자극과 희망을 품게 하였기에 일제 식민지하에서 해방되고자 몸부린친 3.1독립만세운동으로 승화되어 비폭력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실제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지구상의 식민 통치의 해체는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된 지 27년 만인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서야 성사되었다. 한국 또한 미국이 일본에 승전국이 됨으로써 미국을 통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제 사회에서는 강자의 힘의 논리에 의해서만 완결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승만과 3.1운동 ◙ Photo&Img©ucdigiN
이승만과 3.1만세운동의 연관성
미주지역의 이승만, 안창호, 서재필 등이 희망했고 시도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독립은 무위로 끝났지만 놀랍게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큰 각성과 움직임이 크나큰 태풍처럼 일어나는 놀라운 계기가 만들어졌다. 애초에 윌슨이 주장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안을 이승만은 국제 역학 관계 속에서 미국을 통해 진행하기 위해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동시에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함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온 세계에 알리고 특히 윌슨에게도 자신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에 부합되는 독립만세운동을 통해 윌슨이 다른 강대국들을 설득하면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하고 두 개의 독립운동 트랙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국내에서는 늦게나마 이 사실을 알게 된 독립 인사들에게 독립 만세운동을 거행하도록 은밀한 계획을 국내로 밀지를 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이승만은 이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거사하기 위해선 천도교와 기독교 단체와 유교 단체를 집합시켜 실행하면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승만이 이러한 착상과 구체성 있는 계획은 미국에서 5년 동안 아이브 리그의 명문대학(죠지 워싱톤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의 정계와 학계의 인사들(훗날 미국무장관 및 맥아더 장군 등)과 발을 넓히며 국제 외교의 정세와 미국의 공화 민주 정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며 체험하였기에 남달리 국제 정세를 늘 민감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승만이 정치학박사 학위를 공부한 프린스턴대학에서 그 당시에 총장(1902~1910)으로 있던 윌슨을 사적으로도 친밀 관계를 유지했고 때로는 그의 가정에 초대를 받아 가족들과 교제를 가질 만큼 이승만은 윌슨으로부터 총애와 신뢰를 받았었다. 이때에 사석에서 이승만이 앞으로 코리아의 독립을 위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 후 1918년에 윌슨은 미국 대통령(28대, 1913~1921)으로 취임한 후에 이 같은 놀라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으로 이에 큰 자극을 받은 이승만을 비롯한 미주의 독립인사들은 가뭄의 단비같은 희소식으로 받아들였다.
1918년 10월 이승만은 국내 인사들에게 독립을 위한 만세 운동을 일으키라고 수 개월을 통해 여러 루트로 밀서를 보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사차 이승만을 찾아온 여운호(여운형 동생)과 평북도 선교사인 샤록스(Alfred M. Sharrocks)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을 통해 이승만은 이상재, 김성수, 송진우, 함태영, 양전백, 이종일 등에게 알렸고 일본과 중국에도 연락해 줄 것을 재촉하였다.
1918년 12월에 인촌 김성수에게 밀사를 보내어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미국 동지들도 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에 김성수와 송진우와 현상윤 세 사람은 이제야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숙직실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할까를 고심했으나 그 방법에 묘안이 없었다.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인수한 다음 해에 이런 밀서를 받은 것이었다.
김성수는 중앙학교 교장인 성진우와 현상윤과 상의 끝에 1천5백만 동포들을 동원하기로 작정하고, 이 당시 천도교가 제일 많은 수백만 명의 신도들이 있었고 지도자가 손병희였다. 현상윤이 손병희를 설득하여 함께 결기를 다지기로 하였다. (仁村 金性洙의 사상과 일화)
두 번째로 밀서를 보낸 곳은 일본의 동경 유학생들이었다. 이곳에 김철과 선우혁과 서병호 등을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기독청년회관에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독립요구서’ 혈서를 써서 일본 국회와 정부에 제출하려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로서 유학생들이 27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 유학생들은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를 통해서 이승만과 정한경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면서 독립에 대한 뜻을 함께 품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이승만이 보낸 그 밀서에 설득이 되었다.
이 사건이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3.1만세 운동에 큰 자극이 되기도 하였다. 유학생들의 독립선언문은 일본에 유학생이었던 이광수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승만이 일본 유학생들과의 관계는 1912년 3월 미국으로 망명길에 유학생들을 만나서 7,8개로 나누어졌던 유학생 단체들을 YMCA 산하에 일원화하게 한 바가 있었다.
이어서 세 번째로 밀서를 받은 인물이 천안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던 임영신이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깨우쳐 주고 있었다. 어떤 행상인으로 변장한 연락원이 이승만의 필사된 밀지를 전해주자, 임영신은 그 내용을 보면서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헌신하기로 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세계 평화를 위한 14개조문을 선언, 그 중에 하나가 민족자결인데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야 한다. 한민족의 분명한 의사 표시가 국제적으로 속히 알려져야 미 대통령도 우리를 도울 것이다.” 이 당시에 임영신은 중국 상해의 밀사들을 통해 이승만의 밀지를 여러 차례 받은 바가 있었기에 그 밀지를 신뢰할 수 있었다. (임영신, 나의 40년 투쟁사)
네 번째로 또 다른 밀지를 받은 인사는 월남 이상재였다. 그는 이승만과 감옥 동지였고 이승만에 의해 전도되고 기독교인이 되였었다. 출옥 후에는 그당시 이승만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 전국에 수십 개 교회에 YMCA 조직을 만들어 놓았다. 이상재는 그 조직의 총무를 맡아 봉사하고 있었고 이승만은 105인회 사건으로 미국으로 도피하고 있었던 차였다. 다시 이승만으로부터 밀지를 받은 그는 크게 고무되어 조선에 산재해 있는 교회 청년들과 이상재의 감옥동지 43인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토록 하여 이들이 주력부대가 되게 하였다.
이 당시에 기독교인의 수는 약 1만여 명 정도였지만 만세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전국의 교회(평양의 장대현교회, 서울 정동교회, 광주 양림교회 등)와 기독교 학교, 특히 배제, 이화, 숭실과 광주 수피아 여고와 군산 영명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참여케 하는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조직화하였다. 그후 중국 상해와 미주지역의 필라델피아와 센프란시스코와 만주의 용정 등지와 러시아 연해주와 일본의 동경 유학생들도(2.8독립선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같은 3.1만세운동은 그만큼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을 세우고자 하는 그 열망을 온 세계에 보여준 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국내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 민족의식이 각성되었고 하나로 뭉치어 일제강점기 중에도 새로운 민족 자산을 구축하였다는 점이다. (다음호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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