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조망] 근 현대 문명화의 인재들을 키워준 미 선교사들과 플브라이트 장학재단의 기여 » 한-미수교 140년의 근현대문명사 리뷰-19 »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에는 조선에 근대과학문명이 사실상 전무하였었다. 이에 반해 이당시 일본과 중국은 서구의 근대과학문명이 싹트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에 처해 있을 때에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최초로 서양의 근대문명의 전령자들이 되어주었다.
시작은 의학(광혜원)으로 조선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로 시작되었으나 여러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미션스쿨을 통해 기초과학인 수학과 화학, 물리학,생물과, 천문학 등을 초등,고등 과정에 이어 대학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최초로 조선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수학과 화학과 생물학의 기초 과정을 가르친 교사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였다. 이들은 광혜원의 설립자인 알렌이 조선 의료인들을 양육하기 위해 세운 조선의료학원의 필요한 교사로 시작했었다.
그후 고등 수준의 과학 전문 분야에 최초로 전임 교사로 조선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베커(Arther L. Becker, 1879~1978)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천재성을 인정받고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으며, 고등학교 재학 중에 회심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마틴 목사의 추천과 장학금 지원으로 ‘알비온대학교(Albion College)’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베커는 대학 시절에 감리교 선교 본부에 “과학을 가르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그 뜻을 인정받아 조선에 파송된 최초의 교육 전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베커는 1903년 4월 9일, 조선에 도착하여 같은 해 5월 초에 무어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선교사들이 서양 과학을 전해주기 전까지 조선은 유교 ‘성리학’(性理學)에 매몰되어 과학과 기술을 외면하며 천대시하는 풍조 속에 있었다. 그런 문화 속에서는 근대문명이 발아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세태 속에 선교사들은 서양 과학을 소개하였고 인재들을 양성함으로 조선에서도 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베커 선교사는 숭실학당의 설립자인 베어드와 의기투합해 본격적인 과학 교육 활동을 시작하여 수학과 과학 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그의 지도 아래 35명 이상의 학생들이 새로 입학하게 되었고 이는 학교 발전뿐만 아니라 조선 청년들이 과학 분야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다.
평양 숭실학당에서는 대학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미국 감리교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격물학당’(格物學堂)을 설립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인재 양성소가 된 것이었다. 그는 안식년 기간 미국으로 돌아가 과학 분야의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조선에 돌아온 베커는 이번에는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에 설립된 ‘조선예수교대학’ 에서 과학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후 이 대학은 일제의 새로운 교육법에 따라 ‘연희전문학교’로 격상되었다. 연희전문학교에는 수물과(수학.물리학)가 그에 의해 신설되었고, 베커는 이곳에서도 과학 교육을 바탕으로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했다.
1919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서는 첫 졸업생 4명이 배출되었다. 이중 중 한 학생인 이원철은 1922년 미국 북장로회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가서 미시간대학교(Michigan Univ.)에서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서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 다른 졸업생인 최규남도 연희전문을 거쳐 미시간 대학에서 공부하여 조선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었고 해방후 서울대학교 4대총장을 역임했다.
박철재 졸업생은 일본 교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 및 초대 원자력 연구소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원자력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베커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해방을 전후해서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를 세웠다.
한편, 베커 선교사는 1919년 2차 안식년을 맞아 미시간대학교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였고 2년 후에는 핵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자신이 익힌 핵물리학 지식을 조선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1921년에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연희전문학교 부학장으로 복귀하여 교육에 매진하였고 이후 배재고등학교와 서울 외국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며 조선 청년들의 과학 부문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베커는 조선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중요하며 그 일을 할 수 있는 청년 인재들의 양성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이 교육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베커는 두 번의 안식년을 과학 부문의 석사와 박사 과정을 미국에서 공부하여 그 전문 학식을 조선 과학도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1928년에 동아일보사는 조선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에게 ‘조선교육공로자’로 표창을 수여했다.
1940년에 일제가 미국인 선교사들을 강제로 추방하자 베커 선교사도 불가피하게 조선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본국으로 가지 않고, 평생을 과학 선교사로 헌신하고자 인도로 들어가 그곳 대학에서 제2의 과학 선교 사역을 이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조선이 1945년에 해방되자 다시 돌아와 미군정청 교육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이 봉직하였던 연희전문학교 재건을 위해 힘썼다. 이 뿐만 아니라 부산에 국립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미군정청과 협의를 이어가던 윤인구 목사를 도와 해방 후 1946년 5월 15일에 설립된 최초의 국립대학인 부산대학교가 세워질 수 있도록 기여했다.
이는 서울대학이 설립된 1946년 8월 22일보다 3개월 앞선 것이다. 부산대학교는 시민들의 자발적으로 설립 기금을 모아 국가에 기증한 뜻 깊은 대학으로서 베커는 그 초대 학장으로 1년간 시무하다가 1947년에 건강 상의 이유로 구국하였다. 그후 캘리포니아 마르티네즈에서 노년을 보내다가 1978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는 1979년 1월에 베커를 기억하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베커는 조선의 과학도를 키우기 위해 40여 년의 삶을 온전히 바쳤다.
한국의 근현대 과학 분야에 가장 공헌한 시대적 역군들을 시대별로 보면 조선의 개화기에 미국의 선교사들로서 기초 과학인 수학, 화학, 생물학과 의학, 문학, 음악, 교육 등의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그들로부터 배양된 조선 학생들은 한국 근현대문명화에 토양이 되었다. 그 후 일제 시대를 거쳐서 1948년 한국이 독립 국가로 탄생 된 후 이승만 정부가 산업화를 위해 국가의 인재들이 필요로 할 때에 재정적으로 핍절함에도 불구하고 유학생들을 미국으로 보내었다. 이 당시에 유학생 한 명이 유학 자금으로 갖고 갈 수 있는 한도가 최대 100달러였다. 그만큼 국가 재정상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1950년 3년 동안 전쟁으로 초토화 된 대한민국에 다시 산업 분야의 학문과 기술 분야에 인재가 필요하였다. 그 당시 전쟁으로 많은 과학 인재들을 상실하였다. 많은 과학자들이 북한으로 자진 또는 강제 북송되어 갔으며 남은 인재들로서는 국가 발전에 매우 부족한 상태였기에 미국으로 유학생들을 보내는 국가 정책이 절실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약 2만 명에 달하는 인재들을 국비 및 자비로 유학할 수 있도록 국가 정책으로 이들을 키워내었다.
그 내용을 볼 것 같으면 정규 유학생, 기술훈련생, 원자력 기술, 장교 양성 학교와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인재들을 보내어 선진 기술과 학문을 배우게 하여 전후 복구와 산업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들을 일명 ‘이승만키즈’로 불리었고, 이들 인재들은 1960년대 이후의 고도 성장기를 만든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당시 군사 분야에 보내진 대표적 인물을 꼽는다면 박정희로서 1953년 준장으로 미 포병학교에 유학을 하여 포병술 및 전략 훈련을 미국에서 받고 그 다음 해에 돌아왔다.
박정희가 1961년에 ‘5.16군사혁명’을 일으키고 집권 후에는 체계적인 국가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역시 산업 분야의 인재가 절실했기에 미국으로 유학생들을 보내야 했다. 이 당시에 이런 인재들을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미국의 ‘플브라이트(Fulbright Korea)장학재단’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 장학재단은 1950년 4월28일에 한국과 미국이 장학 협정을 맺어서 최초 20개 국 중에 한 국가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바로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실행되지 못하다가 1960년 9월 1일에 한미 양국은 장학협정을 다시 재개하였다.
1961년 5월에 최초로 이 혜택을 입은 장학생이 11명으로 시작되었고 매년 100여 명 이상 미국 유학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현재에도 이 제도는 지속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미유학생의 수는 중국(37만명), 인도(23만명)에 이어서 한국(4만3천명) 유학생은 일본을 앞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과 인구 대비로 본다면 오히려 한국의 유학생들이 압도적일 만큼 많은 것으로서 그만큼 한국인들은 미국 유학에 올인하다시피 하였고 그들은 각 분야의 인재들이 되어서 국가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그후 50여 년 이상이 경과한 한국은 여러 첨단 과학 분야에서도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역으로 반세기 이상 미국의 혜택을 일방적으로 받았던 한국이 이제는 미국 현지에 자동차와 반도체와 전자제품 등의 최첨단의 기업들을 설립하였다. 최근에 와서 3년 동안(2022~2024년) 약 1,140억 달러를 알라바마주를 비롯해 여러 주에 투자하여 미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미국 유학생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약 2천여 명으로 나타나있다. 과거 70여 년 전에는 미국과 군사동맹으로 시작하였으나 이제는 산학동맹과 문화동맹, 가치동맹을 공유하며 그 가치와 유익을 함께 나누고 있다. (다음 호에 이어짐)
글 강석진 목사/ 본지 시사저널 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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