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함께 정처 없이 떠나는 겨울 여행

조기칠 목사 ◙ Photo&Img©ucdigiN

F. 슈베르트, 겨울나그네(Winterreise), D. 911  – 제가 살고 있는 이곳 뉴저지에도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세찬 겨울바람은 몇 장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정원의 도토리 나무들과 단풍잎들을 사정 없이 내리쳐, 이제는 모든 낙엽이 떨어진 채 앙상한 가지들만이 세찬 동부의 겨울바람을 견뎌냅니다.

 

[클래식산책] 절망과 함께 정처 없이 떠나는 겨울 여행 »  글 조기칠 목사 » 늦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즈음이면 늘 손이 가는 음반이 있습니다. 춥고 외로운 겨울 같은 인생을 견디며 마치 자신의 겨울 같은 인생을 곡에 붙여 만든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입니다.

절망과 함께 정처 없이 떠나는 겨울 여행

F. Schubert ◙ Photo&Img©ucdigiN

겨울나그네는 그 어떤 곡보다도 가장 슈베르트적이며, 겨울의 이미지를 가슴 시리도록 잘 표현하고 있는 곡입니다. F. 슈베르트를 가리켜 흔히 가곡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그가 630개가 넘는 가곡들을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곡을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가곡(Lied)이라는 장르를 음악의 하나의 장르로 발전시켰던 가곡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아름답고 위대한 곡들을 많이 만들어냈지만, 슈베르트의 생애는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한 번도 자신의 집이나 피아노를 가져보지 못한 채, 정말 가난하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좋은 친구들이 있어, 그의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그가 음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홈 콘서트 등을 통해 그를 지원해주었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슈베르트의 음악 활동을 위해 ‘슈베르트티아데’라는 이름을 붙여 정기적으로 연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많게는 100여 명 이상, 적을 때에도 30-40여 명의 사람들이 그의 홈 콘서트에 참석하여 그의 음악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귀족들과 그들의 부인들, 시인, 극작가, 변호사 등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슈베르트의 연주 활동에 드는 경비와 악보 출판 등을 후원하였으며, 이 모임은 슈베르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가들인 모차르트, 멘델스존, 슈베르트 등은 하나같이 30대에 이 세상의 삶을 마쳤으나, 특히 슈베르트는 31세라는 정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짧은 생애에도 930여 개가 넘는 위대한 곡을 남기며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 보다 얼마나 가치 있게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의 표본을 보여주었던 삶이 바로 슈베르트가 우리에게 보여준 삶이었다고 생각하며, 그의 삶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겨울나그네(Winterreise)라는 작품은, 동시대의 독일 시인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으로 총 24개의 연가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가곡이란 말 그대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가곡들의 모음을 말합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에는 겨울나그네 외에도,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백조의 노래가 있습니다.  

겨울나그네는 어느 추운 겨울날에 시작된 한 청년의 쓸쓸하고 외롭고 슬픈 여행길을 노래하는 작품입니다. 아마도 슈베르트 자신이 고독하고 슬프고 외로운 인생을 이 나그네에 빗대어 표현한 것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30세의 1827년 겨울에 작곡하는데, 이 겨울나그네의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곡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저변에 깊게 깔려 있어 곡이 풍기는 분위기가 음울하고 어둡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실연당한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의 집 앞에서 ‘안녕!’(Gute Nacht)이라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스산한 칼바람이 불어오는 추운 겨울날, 길고 긴 방황의 겨울 여행을 떠납니다. 때와 장소, 목적지도 없습니다. 청년은 길 위에서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풍향계도 있고, 나무도 있고, 무덤도 있으며, 거리의 늙은 악사도 있습니다. 불길한 까마귀를 만나기도 하고, 따뜻한 꿈을 만나는가 하면 차갑고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가 늘 보는 것은 슬프고 구원받을 길이 없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여행 중에 도깨비불, 백발, 환영의 태양 등 죽음의 매개물들을 끊임없이 마주치며,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죽음입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둘 곳 없이 피곤한 육체를 이끌고 편안히 쉬일 곳이 없는 추운 겨울길을 가다가 청년은 마을 어귀에서 손풍금을 켜고 있는 늙은 거리의 악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 늙은 거리의 악사가 손풍금을 열심히 켜고 있는 처량하고 슬픈 모습을 보고, 이 청년은 자기 자신과 깊은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겨울 여행을 떠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 곡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마지막 24번 곡인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마을 저편 어귀에 손풍금을 켜는 사람이 있다. 얼음 위를 맨발로 이곳저곳을 비틀거리며 찾아다니고 있으나 누구 하나 들으려고 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노인이여,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 노래에 맞춰 손풍금을 켜주지 않겠습니까?”

그는 추운 날씨에 맨발인 채 열심히 손풍금을 켜고 있는 거리의 악사를 통해, 가난과 질병 속에서 어렵고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어떠한 결론도 없이 손풍금을 켜는 노인과 함께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손풍금을 켜는 늙은 악사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떤 학자는 손풍금을 켜는 노인을 죽음의 사자로 보며, 이 젊은 청년이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는 190년 전에 이미 인간 소외의 문제를 깊게 건드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인의 고독한 정서에 직접적으로 깊이 터치하는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이 가곡집은 들어도 들어도 감동적이며, 언제나 가슴 깊이 그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만드는 노래들입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찬 바람 부는 겨울이면 더욱 그렇습니다.

동영상= F. 슈베르트, 겨울나그네(Winterreise), D.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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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기칠 목사/ 본지 클레식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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