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쏘니, 사도 바울이 뵈레아에서 배를 타고 떠난 항구

오늘의 메쏘니는 평범하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함이 바울의 발걸음과 겹쳐지며 특별해졌다. 작은 마을, 소박한 항구, 그 속에서 세계사의 한 장면이 쓰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거대한 유적이나 유명한 도시보다 오히려 이름 없는 마을에서 더 깊은 울림을 받을 때가 있다. 메쏘니가 그랬다

[미션저널] 메쏘니, 사도 바울이 뵈레아에서 배를 타고 떠난 항구 » 김수길 선교사 » 그리스 이야기(35회)  »

성지 뵈레아는 산간 지역이기에 계곡과 언덕이 이어져 있어 외부로 나가려면 반드시 평야와 바다로 내려가야 했다.

사도 바울은 뵈레아(Berea)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데살로니가(Thessalonica)의에서 쫓아온 유대인들로 인해 다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테살로니키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뵈레아에서도 많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소리를 듣고 분노했다. 그리고 성경적 표현대로 패악한 사람들을 베레아로 보내어 바울 사도를 쫒아 내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사적이었던 뵈레아 형제들은 그 밤에 사도 바울을 홀로 바닷가로 피신시켰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사도행전 17장 14절)

짧은 기록이지만, 행간에는 긴박감이 흐른다. 어두운 밤길, 급히 챙겨 떠나는 바울, 남아서 공동체를 지켜야 했던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그들을 작별하며 눈시울이 붉어졌을 형제들의 모습. 베레아 사람들은 바울을 홀로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 순간이 훗날 교회 역사의 한 장면이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 이야기 12호에서 바울이 뵈레아에서 배를 타고 떠난 항구는 ‘디온’(Διον) 이라는 이미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디온이 바울이 배를 타고 간 곳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자신 있게 써왔던 나의 글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간 곳이 다른 곳이라고, 지역 역사학들과 여러 그리스 사학자들 역시 동일하게 주장하는 장소는 메쏘니(Messoni)였다. 약 4년 전에 영국의 최 모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내 C TV와 “바울로부터 ”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려고 하는데 그리스 부분의 코디가 되어 도와 달라는 연락이었다. 사실 최 목사님을 존경하고 있었고 C TV는 창사 설립 15주년 특집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제작 방송하기도 한 여러 이유로 “바울로부터”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1차 방송 촬영은 메인 쎌럽(Celeb)이었던 배우 차모 님의 촬영이 있기 1년 전부터 작업을 하였다. 뵈레아 바울의 강단에서 한참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이 작업을 처음부터 관심 있게 주변에서 바라보던 중년 부인이 말했다. 자신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소개를 하고는, 우리 팀에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 관련된 프로그램 작업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나에게 말했다. “그럼 메쏘니도 촬영해야 하겠네요.?” 라고 말이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 역사 선생님이 나의 휴대전화에 찍어준 GPS를 따라서 메쏘니로 향했다. 사실 메쏘니는 디온 보다도 뵈레아에서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작은 어촌에 서린 바울의 흔적

메쏘니에 들어서자 언덕 위에는 바울을 기념하는 비마(강단)가 서 있었고, 바닷가에는 알렉산더 대왕 아버지 빌립 2세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이곳은 이미 고대 마케도니아 해군의 거점 항구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빌립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아테네와 연합한 해안 도시들을 제압하기 위해 메쏘니와 피드나를 공격했다가 전투 중 투석기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한쪽 눈을 가린, 애꾸눈의 빌립 2세의 작은 동상 하나가 그 사실을 증언하듯 서 있었다.

마을 자체는 너무도 평범했다. 낡은 배와 물새들이 바닷가를 맴돌고, 어부들은 거물을 손질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관광객의 발길도 드물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풍경이 오히려 성경 속 장면과 겹쳐졌다. 바울이 이곳에서 배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메쏘니의 고요한 바다는 다르게 다가왔다.

그러나 작은 동상 외에는 어느 그리스 작은 어촌의 분위기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너무도 평범한 분위기에 제작 책임자인 정 감독은 처음에는 “별로 사용할 것이 없겠는데요!”라고 말했지만 현지 학자들의 주장, 그리고 직접 발로 확인한 풍경의 아우라가 우리를 설득했다. 정황 상 모든 것이 디온이 아니라 이곳 메쏘니가 바울 사도가 배를 타고 떠난 곳이라고. 우리 모두는 이곳이 바로 바울의 항구임을 확신했다. 그 순간, 평범한 어촌 풍경이 역사의 현장으로 겹쳐졌다.

그래서 다음 촬영지로 결정했던 디온은 촬영하지 않고 이곳 메쏘니에서 작업으로 그날 일정을 마쳤다. C 방송국에서 방영된 바울로부터 6편에서 메쏘니를 보니 내 자신이 당시 사도 바울과 동행한 것 같은 환영과 감동이 밀려왔다. 하지만 내가 메쏘니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난 곳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었다.

가끔 그곳을 들릴 때 마다 호수와 같은 바다에는 플라밍고 무리와 페리컨들이 어부들이 거물을 손질하는 배 주변을 유영하고 있었다. 정말 평온하고 한적한 풍경이었다. 그 아래에 들끓는 세계사를 품고서도 시침을 뚝 떼고 선 개구장이처럼.

메쏘니, 피드나(Pydna)의 그림자

오늘의 메쏘니는 587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메쏘니는 가까운 피드나(Pydna)와 아기아니스(Agiannis) 마을 외에도 두 개의 마을이 포함된 피드나 자치 지역에 속해있다. 다섯 개의 마을 전체 인구는 2,663명이다. 하나의 자치구이지만 작은 마을들이기에, 메쏘니는 너무도 작고 평범한 곳이다.

상주 인구는 작지만 사도바울이 그들의 마을에서 배를 타고 갔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자신의 마을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2018년부터는 여름마다 바울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열고 있다. 마을 뒤편 작은 광장에 무대가 마련되고, 현악기와 피아노 소리가 어둑해지는 바닷가에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와인과 치즈를 나누며 음악을 듣고, 밤이 깊어지면 바다 위에 별빛이 번져간다. 바울의 이름은 그렇게 지금도 마을의 축제를 이끌고 있다.


메쏘니에서 남쪽으로 조금 달리면 피드나 유적이 나타난다. 잡풀 사이로 드러난 돌 무더기는 초라해 보이지만, 한때 이곳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중심이었다. 이 도시는 빌립 2세의 시대에 크게 번영했고,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는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동시에 피드나는 왕가의 비극이 서린 장소이기도 했다.

올림피아스는 역사 속에서 “가장 야심 많았던 여인”으로 기록된다. 빌립 2세의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고, 아들이 죽은 뒤에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끝없는 야망은 결국 카산드라(Cassander)와의 내전에 휘말리게 했고, 마침내 피드나에서 돌을 맞아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혈통은 이곳에서 끊겼다.

피트나 전투와 팍스 로마나

지중해를 안마당의 호수로 삼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전성기는 로마제국이 가까운 그리스와 네 번에 걸친 전쟁의 결과였다. 결정적인 전투는 기원전 168년 6월 22일 피드나(메쏘니)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피드나 전투는 헬레니즘 시대를 지탱해 온 마케도니아의 가장 완벽한 전술인 팔랑크스(φάλαγξ, 장창 밀집 보병전술) 이다. 마케도니아는 지금까지 이 전술로 헬라제국을 지탱해 왔다. 메쏘니로 가는 길은 현재의 고속도로로 달려도 몇 개의 언덕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구간이다.

이 구릉지대에 로마군의 두 배가 넘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군대의 수적 우위뿐 아니라 천하무적 팔랑크스 의 긴 창을 가진 그들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그래서 피드나주민 뿐 아니라 모든 마케도니아사람들은 평안함 가운데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마케도니아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것이다.

로마의 장군 로마군 장군 루키우스 파울루스(Lucius Paullus)는 페르세우스(Perseus)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에 대승을 한 것이다. 역사 학자들은 만약 이 전투가 평지가 많은 까떼리니에서 벌어졌다면 로마군은 패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투지인 피드나는 높고 낮은 구릉 지대였다. 로마 진영까지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먼저 진격해 왔다. 수백 명의 병사가 창을 들고 밀집 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평탄한 지형에서는 막강했지만 기동성이 떨어지고, 진형이 깨지면 취약했다.

강력한 밀집 대형에 균열이 생길 때 로마 장군 파울루스는 로마군에게 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소규모 군대로 편성된 그의 부대에게 유연하게 각개 격파를 명령했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긴 창을 잡은 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인 피드나 전투를 마무리했다. 그래서 피드나 전투에서는 팔랑크스 전술의 종말을 고했다. 이는 마케도니아를 대신하여 로마가 이 지역의 주인이 된 것을 의미한다.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왕조는 종말을 고하고, 로마는 네 개의 자치구(merides)로 이 지역을 개편했다. 기원전 148년 다시 마케도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 자치령마저도 폐지하고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공식적으로 로마의 완전속주(Provincia Macedonia)로 개편시켰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새로운 군대의 도시가 필요한 로마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대 도시 디온을 더욱 강력한 성벽으로 구축한 군사의 도시로 재건축했다.

오늘의 메쏘니는 평범하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함이 바울의 발걸음과 겹쳐지며 특별해졌다. 작은 마을, 소박한 항구, 그 속에서 세계사의 한 장면이 쓰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거대한 유적이나 유명한 도시보다 오히려 이름 없는 마을에서 더 깊은 울림을 받을 때가 있다. 메쏘니가 그랬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특별할 것 없는 항구였지만, 그 고요 속에 바울의 흔적이 살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깨달았다. 역사는 늘 웅장한 무대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작은 항구, 이름 없는 마을, 소박한 어부의 삶 속에서 세계사의 물줄기가 바뀐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우리는 잠시나마 그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감각을 맛본다.

메쏘니에서 바라본 바다는 그렇게 내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본다. 저자거리의 패역한 사람들을 피해서 홀로 배를 타고 가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데살로니가에 살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얼마나 미웠으면 다른 도시까지 그를 쫓아야 했을까?

밤중에 흔들리는 배를 타고 아덴으로 떠나는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잔잔한 바다, 물새와 어부들, 그 평범함 속에서, 바울이 급히 몸을 피하며 아테네로 향하던 장면을 떠올리자 가슴이 묘하게 저려왔다.

사진 1: 피드나 유적지의 유물과 메쏘니 풍경
사진 2: 바울의 비마에서 종교 행사 사진

글쓴이: 김수길 선교사/ 본지 미션 칼럼니스트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